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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희의 맛따라기] 농사 지은 콩·깨·채소로 차린 소담·고소한 한 상 ’오현리 두부집’

파주시 법원읍 직천리에 있는 ‘오현리 두부집’은 직접 농사지은 콩과 채소·양념으로 두부와 반찬을 만들어 손님 상을 차린다. 식탁에서 끓이면서 먹는 두부찜을 냄비에서 덜어낸 모습. 들어간 재료가 모두 보인다. 두부·파·마늘·고춧가루·들기름에 젓새우 한 마리까지. 진한 두부에 어우러진 양념이 빚어내는 맛은 순정한 시골 미각이다. 칼칼하면서 깊고 깔끔하다.

파주시 법원읍 직천리에 있는 ‘오현리 두부집’은 직접 농사지은 콩과 채소·양념으로 두부와 반찬을 만들어 손님 상을 차린다. 식탁에서 끓이면서 먹는 두부찜을 냄비에서 덜어낸 모습. 들어간 재료가 모두 보인다. 두부·파·마늘·고춧가루·들기름에 젓새우 한 마리까지. 진한 두부에 어우러진 양념이 빚어내는 맛은 순정한 시골 미각이다. 칼칼하면서 깊고 깔끔하다.

두부를 좋아한다. 특히 순두부를 좋아한다. 50여년 전 집에서 두부를 하는 건 큰일이었다. 콩을 불리고 갈아, 가마솥 아궁이에 장작불 지펴 끓이고 거르고, 다시 끓이고 간수 질러 엉기면 걸러서 누르고 굳히기까지, 하루 안에 끝나지 않았다. 번잡한 일이니 명절이나 제사가 있어야 집에서 두부를 만들었다. 대엿새 전에 미리 만들어둔다. 우리 집은 제사가 겨울에 몰려 있어, 어린 시절 학교에 가지 않는 겨울방학이면 두부 별식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추석이 다가오니 그 시절 차례상에 올릴 두부 만들던 고향 생각이 되살아난다.

 
콩 원산지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 
옛사람들이 두부를 좋아한 기록이 많다. 콩의 원산지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라는 게 정설이다. 고조선이나 고구려의 강역이다. 그 땅에 살던 핏줄기이니 콩 음식을 즐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요즘도 두부 좋아하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제대로 된 두부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수입한 유전자변형(GMO) 콩으로 공장에서 대량생산한 두부가 시장을 점령해버렸기 때문이다.
9월 10일 12시 무렵 ‘오현리 두부집’은 손님들 차량으로 완전히 포위돼 있었다. 멀리 대전차장애물이 보인다. 여기서 10여㎞ 북상하면 임진강이니 최전선이다.

9월 10일 12시 무렵 ‘오현리 두부집’은 손님들 차량으로 완전히 포위돼 있었다. 멀리 대전차장애물이 보인다. 여기서 10여㎞ 북상하면 임진강이니 최전선이다.

낮에는 마당에 차가 가득했는데 두부가 떨어져 손님 발길이 끊긴 ‘오현리 두부집’. 이곳은 원래 마을 농산물판매소였다. 군 훈련장 부지에 포함돼 두부집도 곧 떠나야 한다.

낮에는 마당에 차가 가득했는데 두부가 떨어져 손님 발길이 끊긴 ‘오현리 두부집’. 이곳은 원래 마을 농산물판매소였다. 군 훈련장 부지에 포함돼 두부집도 곧 떠나야 한다.

지난 7월 7일 이 난에 소개한 삼각지 ‘요리가 있는 집(http://news.joins.com/article/21735836)’의 채성태(50) 사장이 어느 날 물었다. “혹시 두부 좋아하세요? 기가 막힌 집이 하나 있습니다.” 귀가 번쩍 뜨이는 얘기였다. 지난달 27일 일요일에 그곳에 함께 갔다. 외진 곳 가건물에 자리 잡은 두붓집이었다. 식당 주위 좁지 않은 공터를 차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 풍경을 보니 솔깃해졌다. 기웃기웃 살펴보니 실내 포장마차 같은 환경인데 마당이나 나무 아래에 그늘막 간이식탁까지 만석이었다. 궁금증이 안개처럼 피어났다. 결론부터 말하면 맛있다. 두부는 씹을 때마다 콩즙이 물씬거리며 배어 나왔고, 신선한 들기름에 내 손으로 구워 먹으니 맛이 배가됐다. 순두부에 섞인 순물은 고소한 향과 진한 맛이 두유 같았다. 두부 응고제로 소금간수를 사용해 그냥 먹어도 간이 맞았다.

 
허름한 가건물에서 만난 고소한 두부 
입구 길가 전봇대에 기대 세워둔 입간판에는 ‘오현리 두부집’이라고 쓰여있다. 주차장에서 보면 ‘약수터 휴게소’라는 간판이 서있다. 가건물 외벽에는 ‘오현농산물판매소’라는 글씨가 붙어있다. 그 아래 ‘식당 이전 안내’ 현수막이 걸려있다. 이 집의 복잡한 사연이 그 이름마다 새겨있다. 현재 위치는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만월로 263(직천리). 11월 말이면 자리를 옮긴다. 군 훈련소가 들어서게 돼 토지가 수용됐기 때문이다. 이사할 곳은 양주시 광적면 덕도리 371번 지방도 옆에 142㎡(43평)짜리 2층으로 지은 새 집이다. ‘오현리 두부집(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광적로332/전화 031-958-1810)’이라는 상호로 간판을 새로 걸고, 지금껏 없던 영업허가증과 카드결제기도 구비한다. 17년째 두부를 팔며 정들었던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
‘오현리 두부집’의 이전 안내판. 이곳에 군 훈련장이 들어서게 돼 토지가 수용된 주민들이 모두 떠났다. 11월과 12월이 보이는데 이사할 곳 건축공사가 잘 진행돼 11월 말쯤 입주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오현리 두부집’의 이전 안내판. 이곳에 군 훈련장이 들어서게 돼 토지가 수용된 주민들이 모두 떠났다. 11월과 12월이 보이는데 이사할 곳 건축공사가 잘 진행돼 11월 말쯤 입주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훈련장이 조성될 구역 안에 있는 무덤을 신고하라는 최후통첩 현수막.

훈련장이 조성될 구역 안에 있는 무덤을 신고하라는 최후통첩 현수막.

이형우(57)·정순영(54)씨 부부가 운영하는 이 식당은 식재료 생산부터 조리, 상차림까지 가족 일관체제다. 남편은 콩과 찬거리 채소 농사를 지으면서 콩을 갈아 두부를 만든다. 아내는 반찬을 만들고 식당 운영과 주방을 책임진다. 손님맞이는 1남3녀가 돌아가며 분담한다. 그래서 음식이 집에서 두부를 빚어 굽거나 찜을 해 먹듯 실하고 맛있지만 값은 싸다.

‘오현리 두부집’ 대표 음식 ‘순두부 보리밥’ 1인 상. 반찬 9가지 중 7가지를 직접 재배한 채소로 만들었다. 보리밥에 넣고 비비기 좋은 나물들이다. 들기름과 고추장도 농사지은 깨와 고추로 마련했다. 값은 5000원.

‘오현리 두부집’ 대표 음식 ‘순두부 보리밥’ 1인 상. 반찬 9가지 중 7가지를 직접 재배한 채소로 만들었다. 보리밥에 넣고 비비기 좋은 나물들이다. 들기름과 고추장도 농사지은 깨와 고추로 마련했다. 값은 5000원.

순두부와 함께 나오는 보리밥. 쌀이 35%이고 나머지는 삶은 보리쌀과 좁쌀로 지었다. 나물반찬들과 비빌 때는 들기름을 쳐야 한다.

순두부와 함께 나오는 보리밥. 쌀이 35%이고 나머지는 삶은 보리쌀과 좁쌀로 지었다. 나물반찬들과 비빌 때는 들기름을 쳐야 한다.

푹 퍼지게 잘 지은 보리밥에 7가지 나물반찬을 쓸어 담고 들기름 치고 고추장 넣어 비빌 준비를 마쳤다. 쌓여있는 7개의 빈 접시가 나물 수를 대변한다.

푹 퍼지게 잘 지은 보리밥에 7가지 나물반찬을 쓸어 담고 들기름 치고 고추장 넣어 비빌 준비를 마쳤다. 쌓여있는 7개의 빈 접시가 나물 수를 대변한다.

상에 나온 나물반찬을 다 쓸어 담으니 많아 보였는데 비비니까 밥이 더 많다. 안주인 정순영씨가 상을 오래 차리다 보니 반찬의 적당한 양을 아는 듯하다.

상에 나온 나물반찬을 다 쓸어 담으니 많아 보였는데 비비니까 밥이 더 많다. 안주인 정순영씨가 상을 오래 차리다 보니 반찬의 적당한 양을 아는 듯하다.

9가지 반찬 중 7찬은 농사지은 채소로
‘순두부 보리밥’은 9찬이 함께 나오는데 값이 5000원이다. 반찬 9가지 중 7가지는 농사지은 채소로 만들었고 상마다 놓인 고추장과 들기름도 직접 수확해 담그고 짜온 것이다. 들기름은 한 달에 두 번씩 짠다. 바깥주인 이씨는 “싸니까 이 산골까지 손님이 오지 않겠나. 집 옆 약수터 물까지 받아가면 돈 벌어가는 거다. 이사하면 1000원은 올려야 한다. 지금까지는 군사시설 예정지라 허가도 안 나고, 그래서 카드도 못 받고, 세금도 없었지만 이사하면 정식허가 받아 세금 내고 카드수수료도 있을 테니 값을 올리지 않을 수 없다. 여기는 사람을 쓰려고 해도 쓸 수가 없다. 자기 차 없으면 출·퇴근이 안 된다. 가족끼리 하려다 보니 너무 힘들다”고 쌓인 사연을 털어놨다. 두부찜(2만5000/2만/1만5000원), 두부전골(2만/1만5000/1만원), 두부튀김·두부김치·두부데침(각 7000원)도 있다. 
 
오전 11시에 시작해 오후 7시에 문을 닫는데, 마감 전에 재료가 떨어지는 날도 많다. 매주 월요일 쉬는데, 추석 연휴 열흘 동안에는 3일(최대 5일) 간 쉬고 나머지는 문을 열 계획이다. 긴 연휴에 소일거리를 찾는다면 수도권에서는 나들이 삼아 갈 만하겠다. 쉬는 날을 아직 정하지는 않았으니 미리 전화로 확인해보고 가길 권한다.  

 
길을 안내한 채 사장은 “서울서 여기 오는데 1시간30분 걸린다. 파주는 장단 콩으로 유명하고, 두부 집도 많다. 잘한다는 집 다 다녀봤다. 두부 집 찾기는 이 집에서 끝냈다. 두부를 먹고 나면 콩 즙의 고소한 맛과 향이 코와 입에 한참을 맴돈다. 여기 두부 먹고 나서는 다른 집 두부가 잘 안 먹힌다. 법원읍에 사는 친구가 소개해줘 알게 된 뒤 3년을 다녔다. 두부 먹으러 다니던 마을에 건강이 좋지 않은 아내 요양을 위해 월세 집까지 얻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번철에 굽기 전의 생 두부 단면을 보면 맛이 어떨지 짐작이 간다. 부드럽고 고소하다.

번철에 굽기 전의 생 두부 단면을 보면 맛이 어떨지 짐작이 간다. 부드럽고 고소하다.

농사지은 들깨로 짠 들기름을 치고 구워 먹는 두부튀김. 손님들이 상에서 직접 해야 한다.

농사지은 들깨로 짠 들기름을 치고 구워 먹는 두부튀김. 손님들이 상에서 직접 해야 한다.

들기름에 잘 구워진 두부. 두부가 부드러워 젓가락으로 오래 들고 있기 어렵다.

들기름에 잘 구워진 두부. 두부가 부드러워 젓가락으로 오래 들고 있기 어렵다.

목은·매월당·추사, 글로 남긴 두부 예찬
옛 사람들 가운데서도 목은 이색(1328~1396)은 두부를 아주 좋아한 듯하다. 몇 편의 시를 남겼다. 「대사(大舍)가 두부를 구해 와서 먹여 주기에」라는 작품에서는 두부가 기름진 고기 같다고 읊었다.  
 
오랫동안 맛없는 나물국만 먹다 보니(菜羹無味久)
두부가 마치 금방 썰어낸 비계 같아(豆腐截肪新)
성긴 이로 먹기엔 두부가 그저 그만(便見宜疏齒)
늙은 몸을 참으로 보양할 수 있겠구나(眞堪養老身)
월 나라 나그네 농어와 순채 생각하고(魚蓴思越客)
오랑캐 사람들 머리 속엔 양락인데(羊酪想胡人)
이 땅에선 이것을 귀하게 여기나니(我土斯爲美)
황천이 인민을 잘 기른다 하리로다(皇天善育民)
 
대사(大舍)는 승려 법계(法階)의 하나인데 통상 승려를 존대해 부르는 말로 쓴다. 육식을 금하는 절에서는 예로부터 두부를 많이 만들어 먹었다. 흔히 국수를 승소(僧笑)라 하지만 불가에서 국수·두부·떡을 승소라 한다. 승려들이 이 세 가지 음식을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양락은 양젖의 지방을 굳혀 만든 치즈와 비슷한 음식이고, 황천은 크고 넓은 하늘을 말한다.
뜨거운 물에 살짝 데쳐서 내온 두부는 부들부들하게 입안에서 녹는다. 그냥 먹어도 간이 맞아 자꾸 젓가락이 가지만 조선간장으로 만든 양념간장도 두부 못지 않은 맛을 보여준다.

뜨거운 물에 살짝 데쳐서 내온 두부는 부들부들하게 입안에서 녹는다. 그냥 먹어도 간이 맞아 자꾸 젓가락이 가지만 조선간장으로 만든 양념간장도 두부 못지 않은 맛을 보여준다.

목은보다 107년 뒤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천재로 이름을 날린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은 일찍이 5세에 길에서 어떤 노파가 두부를 주자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고 그의 행장(行狀)은 전한다.

 
품질이 맷돌 속에서 나왔는데(稟質由來兩石中)
원광은 해가 동쪽에서 솟는 것과 같도다(圓光正似日生東)
삶은 용, 구운 봉황에는 미치지 못하나(烹龍炮鳳雖莫及)
머리칼 없고 이 빠진 늙은이에게 가장 맞겠구나(最合頭童齒豁翁)
 
품질(稟質)은 타고난 성질, 원광(圓光)은 둥글게 빛나는 빛 또는 부처의 몸에서 내비치는 빛이다.


허균이 꼽은 창의문 밖 두부 요즘도 성업
『홍길동전』을 쓴 허균(1569~1618)은 과거시험관을 맡았을 때 친인척을 부정하게 합격시켰다는 죄목으로 전북 함열에 유배를 갔다. 1611년 그곳에서 전국 8도의 식품과 명산지에 관해 항목 풀이 식으로 메모한 글 『도문대작』을 썼다. 두부에 대해서는 “장의문(藏義門) 밖 사람들이 잘 만든다. 말할 수 없이 연하다”고 짧게 소개했다. 장의문은 조선시대 장의동 위에 있어 그렇게 불리던, 현재의 창의문이다. 한양도성의 4대문 4소문 중 북소문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세검정 인근 사람들이 두부를 잘 만들었던가 보다. 조선시대 그곳에는 종이 만드는 일을 담당하던 관청 조지서(造紙署)가 있었고, 북한산과 북악산 계곡에서 흘러오는 물이 좋았을 테니 두부를 만들어서 팔 여건은 충분했을 것이다. 현재도 그곳엔 북한산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 두부 집이 있다.
1856년 71세이던 추사가 타계 두 달쯤 전에남긴 예서 대련. 기록이 확실한 것 중 마지막 작품이다. 추사는 그해 10월 세상을 떠났다. 간송미술관소장. [중앙포토]

1856년 71세이던 추사가 타계 두 달쯤 전에남긴 예서 대련. 기록이 확실한 것 중 마지막 작품이다. 추사는 그해 10월 세상을 떠났다. 간송미술관소장. [중앙포토]

하지만 무엇보다 두부 얘기라면 추사 김정희(1786~1856)의 말년작인 예서 대련 ‘대팽고회(大烹高會)’를 꼽지 않을 수 없다.  
 
大烹豆腐瓜薑菜(좋은 음식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
高會夫妻兒女孫(훌륭한 모임은 부부 아들딸 손자)
 
이 글귀는 명나라가 망할 때 신하였던 오동리(吳東里)가 쓴 시 「중추가연(中秋家宴)」의 경련(頸聯; 8구 형식의 한시에서 5~6구)에 ‘大烹豆腐瓜茄菜, 高會荊妻兒女孫(좋은 음식은 두부 오이 가지 나물/훌륭한 모임은 아내 아들딸 손자)‘라는 대구를 살짝 바꿔 쓴 것으로 추정한다. 글 속의 인물 간 위계를 보면 추사는 부부를 동등하게 참석시켰고, 오동리는 가부장의 눈으로 아내를 보았다. 추사의 ‘부처(夫妻)’는 부부를 아우른 말이요, 오동리의 ‘형처(荊妻)’는 자기 아내를 남에게 낮추어 이르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 예서 대련은 서울 삼성동 봉은사의 ‘판전(版殿)’ 현판 글씨와 함께 추사가 세상을 떠나던 해 쓴 명작이다. ‘칠십일과(七十一果)’는 71세 과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 해 10월 생을 마감했다. 대련 협서(脇書; 본문 옆에 따로 기록한 글)에 다음과 같이 풀이를 적었다.
 
추사 "촌 늙은이의 제일가는 즐거움" 
此爲村夫子第一樂上樂 雖腰間斗大黃金印 食前方丈侍妾數百 能享有此味者畿人 -爲杏農書 七十一果(이것이 촌 늙은이의 제일가는 즐거움이다. 허리춤에 한 말 크기 황금도장을 차고, 음식을 사방 한길이나 차려놓고 시중드는 첩이 수백이라도 이런 맛 누릴 수 있는 사람 몇이나 될까 -행농을 위해 쓴다. 71세 과천 사람)
 
매월당이 다섯 살에 두부를 두고 “머리칼 없고 이 빠진 늙은이에게 가장 맞겠구나”라고 간파했듯이 351년 뒤 사람인 추사도 말년에는 두부와 나물을 좋아한 모양이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글을 보면 “1932년 10월 서울 미쓰코시 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갤러리에서 ‘완당 김정희 선생 유묵·유품 전람회’라는, 추사 사후 최초의 대규모 전람회가 열렸다… ‘대팽두부(大烹豆腐; 큰 요리는 두부찌개)’ 대련(쌍폭)이 경매에 나왔을 때 예상가가 100원 정도였는데 간송이 만주에서 사업하는 일본인 경매자와 치열하게 경합한 끝에 결국 1000원에 낙찰 받았다. 당시 쌀 한 섬 값이 3원이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당시 쌀 값을 현재와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다. 경제가치의 기준으로 화폐보다 쌀이 더 신뢰를 받던 시대였다.
콩 단백질이 몽글몽글 엉긴 순두부. 단백질이 분리되고 남은 물인 순물을 한술 떠 먹어보니 콩의 고소함이 진한 두유 같았다. 소금간수를 사용해서 그냥 먹어도 간이 어느 정도 맞았다.

콩 단백질이 몽글몽글 엉긴 순두부. 단백질이 분리되고 남은 물인 순물을 한술 떠 먹어보니 콩의 고소함이 진한 두유 같았다. 소금간수를 사용해서 그냥 먹어도 간이 어느 정도 맞았다.

새벽에 만들어 냉장고 안에 넣어둔 순두부. 가운데 열이 안 식고 맛이 변할까 봐 얼린 생수 병을 박아뒀다. 순두부가 잠긴 순물의 노릇한 색이 콩의 품질을 대변하는 듯하다. 순물만 먹어도 고소하고 맛이 진했다.

새벽에 만들어 냉장고 안에 넣어둔 순두부. 가운데 열이 안 식고 맛이 변할까 봐 얼린 생수 병을 박아뒀다. 순두부가 잠긴 순물의 노릇한 색이 콩의 품질을 대변하는 듯하다. 순물만 먹어도 고소하고 맛이 진했다.

처음 간 8월 27일 먹은 순두부가 맛있어 집에 가서 또 먹으려고 포장해서 사왔다. 그날 종일 식사를 두부로 했다. 모두부도 사가서 다음날 들기름에 부쳐서 먹었다.

처음 간 8월 27일 먹은 순두부가 맛있어 집에 가서 또 먹으려고 포장해서 사왔다. 그날 종일 식사를 두부로 했다. 모두부도 사가서 다음날 들기름에 부쳐서 먹었다.

지금도 떠오르는 고향집 두부 만들던 풍경
목은이나 추사를 흉내라도 내듯 두부를 좋아하는 나는 어릴 때 본 두부 만들던 집안 풍경이 반세기도 더 지난 지금까지 동영상처럼 머리에 떠오른다. 핵심과정은 맷돌로 간 되직한 콩물에 물을 보태 장작불 지핀 아궁이 가마솥에 붓고 바닥이 눋지 않도록 긴 나무주걱으로 저으며 끓이는 일로 시작한다. 끓으면 베자루에 옮겨서 짜 거친 섬유질을 걸러낸다. 자루에 남는 것이 비지다. 함지에 고인 것은 두유(豆乳)다. 이걸 가마솥에 붓고 다시 끓인다. 바닥이 눋지 않도록 주걱으로 저으며 거품을 걷어낸다. 끓어오르면 아궁이 불을 빼내고 주걱으로 저으면서 간수를 지르면 콩 단백질이 뭉게뭉게 구름처럼 엉긴다. 순두부가 되는 것이다.
 
그걸 대접에 덜어내 준비한 양념간장을 쳐서 먹는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기 전에 어머니가 만들어둔 양념간장은 집간장에 참기름·깨소금·고춧가루와 다진 움파·마늘이 들어갔다. 특히 겨울에 움 속에서 햇빛을 못 보고 자라 색이 노란 움파 향이 좋았다. 땅에 묻은 김장독에서 갓 꺼낸 배추김치를 이 순두부에 곁들이면 당시로서는 세상 부러울 게 없는 별미가 됐다. 아들딸들이 순두부를 자꾸 퍼다 먹으면 어머니는 “제사 지낼 두부도 안 남겠다”고 지청구를 했고, 할머니는 “먹게 놔둬라, 제사야 두부 한 모만 있으면 지내는데”라며 더 먹으라고 편을 들었다. 두 분 다 외며느리였다.
 
우리가 순두부를 먹는 동안 할머니는 비지를 삼베보자기에 싸서 채반에 담아 뜨거운 아랫목에 묻어 뒀다. “비지가 한번 식으면 띄워지지 않는다”고 하는 말을 여러 번 들었는데 왜 그런지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비지는 거칠지만 띄우면 청국장처럼 쿰쿰한 냄새가 돌면서 부드러워진다. 이걸로 멸치국물에 살코기와 김장김치 넣고 찌개를 끓이면 풍미가 좋다. 이 음식을 대부분의 농촌지역에서는 ‘비지장’이라고 부른다. ①비지로 만든 음식에 쳐서 먹는 양념장 ②비지와 밀기울에 메주를 넣고 담근 장이라는 국어사전의 풀이와는 사뭇 다르다. 띄운 비지를 경기 동부와 강원도에서는 ‘고작비지’라고 한다. 양평 장터와 남양주 금곡 두부 집에서 그렇게 말하는 걸 봤다.


이제는 맛보기 어려운 띄운 비지찌개 맛
띄운 비지 얘기를 하면 아버지 고향이 개성인 한 지인이 늘 떠오른다. 그는 “비지 띄운 건 없이 산 사람들이나 해 먹던 음식이다. 꺼칠꺼칠해서 그걸 어떻게 음식이라고 먹나. 개성에서는 콩을 갈아 거르지 않고 다 넣어 돼지사골국물에 끓인다”고 언성을 높였다. 개성 옆이 장단이고, 장단 콩이 품질 좋고 유명하다는 건 안다. 하지만 두 가지를 다 먹어보면 그의 말은 동의하기 어렵다. 두 음식은 빈부와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미각의 문제다. 맛의 구조가 다르다. 나는 지금도 담백하고 구수하고 쿰쿰한 띄운 비지찌개를 더 좋아한다.
두부전골에는 두부와 들기름·파·마늘 말고 들어간 게 별로 없어 보인다. 맛은 칼칼하고 시원하다. 주방을 책임진 안주인 정순영씨는 “고춧가루를 잘 써야 음식이 맛있다”고 했다. 이 집은 농사지은 고춧가루를 쓴다. 반찬으로 낸 풋고추를 먹어보니 초가을 햇살을 받고 약이 바짝 올라 ‘작은 고추’ 성깔을 보여줬다.

두부전골에는 두부와 들기름·파·마늘 말고 들어간 게 별로 없어 보인다. 맛은 칼칼하고 시원하다. 주방을 책임진 안주인 정순영씨는 “고춧가루를 잘 써야 음식이 맛있다”고 했다. 이 집은 농사지은 고춧가루를 쓴다. 반찬으로 낸 풋고추를 먹어보니 초가을 햇살을 받고 약이 바짝 올라 ‘작은 고추’ 성깔을 보여줬다.

콩으로 유명한 장단은 분단의 아픔을 온몸으로 견뎌내고 있는 슬픈 땅이다. 분단 이전에는 장단군이었지만 6·25 휴전 이후 휴전선이 복판을 가로지른 분단의 현장이 됐다. 북한 지역 6개 면은 장풍군으로 재편됐고, 남쪽에 남은 군내·장단·진동·진서 4개 면은 임진강과 비무장지대(DMZ) 사이에 고립된 채 대부분이 민간인출입통제구역이 됐다. 파주시의 일부로 군내면사무소에 장단출장소를 두고 있다. 잊혀지던 장단이라는 이름은 1997년 시작된 파주장단콩축제(올해는 11월 24~26일) 덕에 그나마 국민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게 됐다. 

 
두부 하는 날은 소도 호강한다. 순두부를 걸러 두부를 만들 때 콩 단백질과 분리된 순물이 남는다. 누르스름하면서 따끈해 먹음직스러운 순물은 농가 상일꾼인 소의 몫이다. 소에게 순물은 콩의 유효성분이 많이 녹아있는 보양식이다. 순물은 요리의 밑국물로 써도 감칠맛을 돋우는 조미료 구실을 한다.
 
두부로 겨울 벌이하던 미군부대 주변 마을 
‘오현리 두부집’ 주인 이씨는 12대조 선영이 있는 이 마을에서 태어나 집안 고종손(고조부 이래 4대 종손)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고향을 지키며 살았다. 그런데 태어나 57년을 지키며 산 고향을 이제 떠나야 한다. 현재 식당 자리는 예전 오현리 청년회에서 농산물판매소로 운영하던 곳이다. 그게 잘 안돼 비어 있었다. 그 전부터 바로 옆 약수터에서 노부부가 평상 놓고 천막 치고 약수 뜨러 오는 사람들에게 두부를 만들어 팔았다. 그 분들이 연로해 힘들다고 그만두면서 이씨 부부에게 맡아서 해보라고 자리를 물려줬다.
두부집 바로 옆에 있는 약수터. 물 뜨러 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물 받는 동안 두부를 시켜서 먹기도 한다. 두부집의 출발은 약수터 옆 평상이었다. 동네 노부부가 처음 거기서 시작했는데 나이 들어 힘들다며 현재의 주인 부부에게 자리를 물려줬다.

두부집 바로 옆에 있는 약수터. 물 뜨러 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물 받는 동안 두부를 시켜서 먹기도 한다. 두부집의 출발은 약수터 옆 평상이었다. 동네 노부부가 처음 거기서 시작했는데 나이 들어 힘들다며 현재의 주인 부부에게 자리를 물려줬다.

1960~70년대 이 동네 사람들은 집집마다 두부를 해서 광주리에 이고 다니며 팔았다. 동네에서 조금 북으로 가면 웅담리 일대에 미군부대가 많았다. 기지촌도 제법 크게 있었다. 그곳 ‘양색시’들에게 두부도 팔고, 겨울엔 엿도 고아 팔았다. 그 시절 이 최전방 산골에는 돈 나올 구석이 없었다. 콩과 땔감은 풍부했으니 불 때서 두부나 엿을 만들어 팔았다. 잘할 수 있는 게 두부였다. 노부부의 권유에 따라 2002년께부터 두부를 만들어 팔면서 비어있던 농산물판매소를 이용했다.

고향에서 선산 지키며 농사를 짓다가 간이음식점으로 시작한 두부집을 17년째 이끌어온 이형우·정순영씨 부부. 남편은 농사지으며 두부를 만들고, 부인은 그 두부에 반찬 만들어 손님들 상을 차린다. 손님맞이는 1남 3녀가 번갈아 한다.

고향에서 선산 지키며 농사를 짓다가 간이음식점으로 시작한 두부집을 17년째 이끌어온 이형우·정순영씨 부부. 남편은 농사지으며 두부를 만들고, 부인은 그 두부에 반찬 만들어 손님들 상을 차린다. 손님맞이는 1남 3녀가 번갈아 한다.

부부는 1989년 결혼했다. 부인은 고향이 전북 임실이지만 성남에서 자랐다. 이씨와 한 동네에서 자란 친구가 처제를 소개했다. 친구와 동서가 됐다. 부인 정씨는 형부가 가라고 하니까 믿거라 하고 농촌이지만 시집을 왔다고 한다. 이씨는 “특별히 배운 적은 없는데 음식을 잘했다. 두부 집 하기 전, 농사만 지을 때 새벽에 들에 나가 함께 일하고 집에 오면 10~20분만 뚝딱거려도 아침 밥상이 근사해지더라. 식당 반찬도 도와주는 사람 없이 혼자 다 한다. 결혼 전 방직공장에 다닐 때는 일손이 빠르다고 공장장이 가욋돈을 줬다고 한다. 함께 입사한 사람들이 있어 혼자만 월급을 올려주기는 어려우니까 따로 돈을 더 준 것 같다. 농사 일도 내가 따라가지 못할 만큼 일손이 재다”고 아내 자랑을 했다.  

바닥에 얇게 저민 무를 깔고 두부를 얹어 지지는 두부찜. 파·마늘을 많이 다져 넣고 고춧가루와 새우젓이 약간 들어가 국물 맛은 칼칼하면서 짭짤하다. 신선한 들기름도 많이 넣어 두부와 함께 먹으면 맛이 잘 어우러진다. 도수가 좀 높은 막걸리나 청주와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닥에 얇게 저민 무를 깔고 두부를 얹어 지지는 두부찜. 파·마늘을 많이 다져 넣고 고춧가루와 새우젓이 약간 들어가 국물 맛은 칼칼하면서 짭짤하다. 신선한 들기름도 많이 넣어 두부와 함께 먹으면 맛이 잘 어우러진다. 도수가 좀 높은 막걸리나 청주와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부는 남편이, 반찬은 솜씨 좋은 부인이
두부 콩은 직접 농사지은 것으로 절반을 충당하고, 나머지는 지역 농협에서 수매한 것을 사다가 쓴다. 들깨도 1년에 20가마를 수확해 들기름 짜서 식당에 쓰고 남아서 팔기까지 한다. 고추장·된장도 판매한다. 식당을 옮겨도 채소·양념은 직접 조달하려고 2650㎡(800여평)의 농토를 마련했다.  
 
일요일만 빼고(월요일은 식당을 쉬므로) 날마다 저녁 9시에 콩을 물에 담가 불리고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 갈기 시작하면 7시쯤 두부가 나온다. 평일에는 모두부와 순두부를 콩 한 말씩 한다. 주말에는 합해서 서너 말쯤 준비한다. 두부 만드는 일은 남편 이씨가 다 한다. 콩 한 말을 하면 두부 30모(제사용 옛날 크기로 자르면 15모)가 나온다. 큰 모를 7000원에 팔고 있다. 장단 콩의 지난 가을 수매가가 한 말에 4만5000원이었다. 정부 규격은 한 말이 7㎏이지만, 이곳 실제 거래는 8㎏으로 한다. 반찬을 만들고 손님을 치르는 일은 부인 정씨가 한다. 아침 일찍부터 10시까지 당일 사용할 반찬을 다 만든다.
 
두부 맛의 비결은 장단 콩, 옹달샘 물 말고는 특별한 게 없다고 했다. 예전에 동네 상수도를 만들었는데 훈련소 들어온다고 토지가 수용되면서 주민들이 다 떠나서 수원지 물을 혼자 쓰고 있다. 그 물로 두부를 만든다. 소금간수를 쓰는 것도 공장 두부와는 다른 점이다. 공장에서는 두부 응고제로 소금간수를 쓰지 못하게 돼있다. 소금 도매상에서 예전에는 간수를 한 통에 5만원은 받았는데 요즘은 쓰는 집이 적어 5000원이면 살 수 있다. “MSG 넣은 거 아니냐”고 농 섞인 질문을 던지자 “하하하하, 넣어서 한번 자셔 보세요. 느끼해서 못 먹을 걸요” 하며 질문이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갓 지은 보리밥을 주걱으로 저어주는 안주인 정순영씨. 그는 주걱으로 밥을 저어보면 잘 지어졌는지 느낌으로 알 수 있다고 했다. 어떤 느낌인지 묻자 몸으로 터득해야지 말로 설명할 수는 없다고 했다.

갓 지은 보리밥을 주걱으로 저어주는 안주인 정순영씨. 그는 주걱으로 밥을 저어보면 잘 지어졌는지 느낌으로 알 수 있다고 했다. 어떤 느낌인지 묻자 몸으로 터득해야지 말로 설명할 수는 없다고 했다.

식재료 대부분 재배..."국산만 쓰면 맛있어"
밥은 쌀 35%와 보리·좁쌀을 섞어 짓는다. 보리가 훨씬 많이 들어간다. 보리는 많이 삶아뒀다가 밥을 지을 때 쌀과 함께 물로 씻어서 섞는다. 보리밥의 식감을 좌우하는 보리 삶기도 요령이 있다. 안주인 정씨는 “쌀보다 물을 더 넣고 센 불에 삶다가 끓어 넘치면 찬물을 부어준다. 도로 넘지 않을 만큼 붓는다. 그리고 약불로 익힌다. 묵은 보리는 약불 익히기를 길게, 햇보리는 좀 짧게 한다. 잘 익었는지는 주걱으로 저어서 느낌으로 아는데 말로는 설명 못한다. 본인이 터득해 아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지난달 27일 찾아갔을 때 ‘순두부 보리밥’의 반찬은 취나물, 깻잎나물, 노각무침, 무생채, 열무김치, 콩나물무침, 호박나물볶음, 오이싱건지, 풋고추가 나왔는데 취나물·콩나물만 시장에서 사왔고 나머지는 모두 직접 농사지은 것이었다. 지난 10일 점심에 갔을 때는 노각무침이 가지나물로 바뀌었을 뿐 8가지는 같았다. 모든 반찬을 손수 만드는 정씨는 “우리 농산물로만 하면 맛이 있다. 고춧가루가 중요하다. 우린 수입품은 없다. 국산만 쓴다”며 솜씨가 아니라 재료를 맛의 원천으로 꼽았다.
파주이이유적 정문을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바로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 동상이 서있다.

파주이이유적 정문을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바로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 동상이 서있다.

율곡의 고향 파주, 묘소·자운서원 들러볼 만
두부 집이 있는 법원읍의 다른 마을인 동문리에는 파주이이유적(사적 제525호)이 있어 들러볼 만하다. 이이(1536~1584)를 배향한 자운서원(紫雲書院·경기도기념물 제45호)과 가족묘소가 있다. 이이와 어머니 신사임당 묘소가 이곳에 있다. 이이를 얘기하면 늘 강릉을 생각하지만 그곳은 외가이고 친가는 임진강 변, 현재의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에 있었다. 유적에서 직선거리로 5.5㎞ 떨어진 곳이다.
율곡 가족묘역 안내판. 세 구역으로 나뉘어 무덤이 모여 있는데 가운데 구역 산줄기에 율곡 직계 3대가 묻혔다. 위로부터 ①율곡 부인 곡산노씨-율곡(전후 합장) ②율곡의 맏형 이준 부부 ③이이의 부모(이원수 공과 신사임당) ④율곡의 맏아들 이경림 무덤이다. 신사임당의 두 아들·며느리가 더 높은 곳에 묻힌 역장묘다. 조선 중기 이전에는 크게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율곡 가족묘역 안내판. 세 구역으로 나뉘어 무덤이 모여 있는데 가운데 구역 산줄기에 율곡 직계 3대가 묻혔다. 위로부터 ①율곡 부인 곡산노씨-율곡(전후 합장) ②율곡의 맏형 이준 부부 ③이이의 부모(이원수 공과 신사임당) ④율곡의 맏아들 이경림 무덤이다. 신사임당의 두 아들·며느리가 더 높은 곳에 묻힌 역장묘다. 조선 중기 이전에는 크게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율곡 가족묘역으로 들어가는 삼문 현판은 ‘여견문(如見門)’이다. 산소를 흙과 풀과 석물로 보지 말고 고인을 뵙는 듯 하라는 뜻인가 보다. 삼문을 출입할 때는 걷는 사람의 입장에서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서 오른쪽 문으로 나와야 한다. 문 밖에서 보자면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서 왼쪽 문으로 나오는 것이다. 가운데 문은 조상의 혼령이 다니는 길이다.

율곡 가족묘역으로 들어가는 삼문 현판은 ‘여견문(如見門)’이다. 산소를 흙과 풀과 석물로 보지 말고 고인을 뵙는 듯 하라는 뜻인가 보다. 삼문을 출입할 때는 걷는 사람의 입장에서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서 오른쪽 문으로 나와야 한다. 문 밖에서 보자면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서 왼쪽 문으로 나오는 것이다. 가운데 문은 조상의 혼령이 다니는 길이다.

율곡 직계 3대의 묘역으로 올라가는 참배로. 맨 앞에 율곡의 맏아들 묘가 있고 가장 위에 율곡 부부의 전후 합장묘가 있다.

율곡 직계 3대의 묘역으로 올라가는 참배로. 맨 앞에 율곡의 맏아들 묘가 있고 가장 위에 율곡 부부의 전후 합장묘가 있다.

율곡의 부모인 이원수 공과 신사임당의 합장묘. 바로 위에 맏아들 준 부부의 묘가 있다.

율곡의 부모인 이원수 공과 신사임당의 합장묘. 바로 위에 맏아들 준 부부의 묘가 있다.

보기 드문 전후 쌍분 합장묘. 비문에 ‘문성공 율곡 이 선생의 묘. 정경부인 곡산노씨 묘(뒤에 있음)’라고 새겨있다.

보기 드문 전후 쌍분 합장묘. 비문에 ‘문성공 율곡 이 선생의 묘. 정경부인 곡산노씨 묘(뒤에 있음)’라고 새겨있다.

묘역의 가장 위쪽에서 본 전경. 사진 가운데 나란히 자리잡은 봉분이 율곡 부부, 그 아래 봉분 일부만 보이는 것은 율곡 부모의 묘소다.

묘역의 가장 위쪽에서 본 전경. 사진 가운데 나란히 자리잡은 봉분이 율곡 부부, 그 아래 봉분 일부만 보이는 것은 율곡 부모의 묘소다.

가족묘소는 산자락 세 구역에 11기의 무덤이 있는데 6기는 합장묘, 5기는 단장묘다. 율곡 부부와 부모 합장묘가 가운데 구역에 있다. 그런데 산줄기 위로부터 율곡 부인·율곡(전후 합장), 율곡 맏형 부부, 율곡 부모, 율곡의 맏아들 순서로 촘촘하게 자리잡았다. 요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역장묘(逆葬墓)다. 조선조 중기 이전에는 이런 사례가 흔했다고 한다. 율곡의 문인이며 조선 예학(禮學)의 태두로 불리는 사계 김장생(1548∼1631) 무덤은 7대 조모 양천허씨 유택 바로 위에 있다. 아들 신독재 김집(1574~1656)도 아버지가 예학의 체계를 확립하는 데 크게 뒷바라지한 대학자였는데 법도를 몰라서 그렇게 했을 리 만무하다.

자운서원은 1615년 창건해 율곡과 제자인 김장생·박세채를 모셨는데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69년부터 여러 차례 복원했다. 서원 안의 느티나무 노거수는 수령이 각각 431년과 452년이다. 창건하던 해 29년·50년생을 심은 셈이다. 유적지는 공사 중인데 10월 1일 다시 열 예정이다.

자운서원은 1615년 창건해 율곡과 제자인 김장생·박세채를 모셨는데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69년부터 여러 차례 복원했다. 서원 안의 느티나무 노거수는 수령이 각각 431년과 452년이다. 창건하던 해 29년·50년생을 심은 셈이다. 유적지는 공사 중인데 10월 1일 다시 열 예정이다.

파주이이유적 앞 주차장에서 본 전경. 나지막한 산줄기가 둥그런 호를 그리며 지나가는 지형 안에 율곡 가족묘역과 자운서원이 들어앉았다. 안목이 없는 사람의 눈으로 봐도 아늑하고 양지바른 곳이다.

파주이이유적 앞 주차장에서 본 전경. 나지막한 산줄기가 둥그런 호를 그리며 지나가는 지형 안에 율곡 가족묘역과 자운서원이 들어앉았다. 안목이 없는 사람의 눈으로 봐도 아늑하고 양지바른 곳이다.

자운서원은 율곡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1615년 창건해 1650년 자운(紫雲)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1713년 김장생·박세채(1631~1695)를 추가로 모셔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 기능을 수행했으나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 1969년 국비 보조와 주민 성금으로 문성사(사당)와 내삼문을 복원한 후 1974년에 국가에서 묘역과 서원 일대를 정화했다. 1997년 다시 강당과 동·서재를 복원했다. 서원 안에 느티나무 노거수가 있는데 수령이 2017년 기준으로 각각 431년과 452년이다. 현재는 탐방로 포장 등 정비공사 중이어서 관람객 입장을 일시 중단했고, 10월 1일 다시 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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