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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도 좋다. 대화·협상으로 평화만은 지키려 했다. 그 결과…

채인택 국제전문기자의 글로벌 줌업  
   
“전체주의 정권에 대한 굴복과 물질 제공으로 평화를 지킬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이… 새로운 국제질서인가” -윈스턴 처칠  

굴복·양보로 전쟁 피하려 했던 1938년 체임벌린
히틀러 야욕 키워 1년 만에 2차대전 대참화 터져
‘평화는 평화의지 아닌 전쟁의지로 지킨다’ 교훈
2차대전 이후 평화 수호와 협상장의 금과옥조로

 
 
 
아돌프 히틀러의 요구대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넘기는 내용의 뮌헨협정에 서명한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1938년 9월30일 헤스톤 공항으로 귀국한 뒤 마중 나온 군중 앞에서 협정문을 보여주고 있다. 체임벌린은 적의 도발을 반드시 분쇄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지 않고 유화적으로 평화를 애걸하면 오히려 비극을 초래한다는 역사적인 교훈을 남겼다.

아돌프 히틀러의 요구대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넘기는 내용의 뮌헨협정에 서명한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1938년 9월30일 헤스톤 공항으로 귀국한 뒤 마중 나온 군중 앞에서 협정문을 보여주고 있다. 체임벌린은 적의 도발을 반드시 분쇄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지 않고 유화적으로 평화를 애걸하면 오히려 비극을 초래한다는 역사적인 교훈을 남겼다.

 
오는 30일로 뮌헨협정(Munich Agreement)이 체결된 지 79주년이 된다. 1938년 9월30일 독일의 뮌헨에서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총리와 프랑스의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가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총통 및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 총리와 합의해 서명한 협정이다. 서명은 4개국이 했지만 내용은 협상장에 초대받지 못한 신생국 체코슬로바키아의 운명에 관한 것이었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으로 탄생한 신생국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인 주데텐란트(독일계 다수 거주지역)를 나치독일에 넘기는 굴욕적인 내용을 담았다.  
 
 
자정을 넘긴 30일 새벽에 협정문에 서명한 체임벌린 총리는 해가 밝자 항공편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런던 서부 헤스턴 공항에 도착한 체임벌린은 환영객에게 협정문을 흔들어 보인 다음 자랑스럽게 읽었다. 체임벌린이 이날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관저로 돌아와 “독일에서 명예로운 평화를 들고 돌아왔다”라며 “이것이 우리 시대의 평화라고 믿는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BBC방송을 통해 영국 전역에 중계됐다. 불과 20년 전에 끝난 제1차 세계대전의 상처를 기억하고 있던 체임벌린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평화를 지키고 싶어했다. 굴욕적인 양보와 신생약소국 희생, 그리고 동맹 배신이란 딱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역사가들은 이를 '유화정책(appeasement)'이라 부른다. 사실 당시 영국 여론도 이를 지지했다. 체임벌린이 재임중 기사 작위를 받는 첫 총리가 되거나 다음 노벨평화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줄을 이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하지만 이는 히틀러의 속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오판이었다. 33년 집권한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신국제질서인 ‘베르사유 체제’를 무너뜨리고 싶어했다. 36년 3월 독일 서부 라인란트가 첫 목표였다. 철과 석탄이 풍부한 공업지대인 라인란트는 베르사유 조약 이후 독일군 진입이 허용되지 않은 비무장지대로서 프랑스군이 관리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병력이 10만 이하로 제한됐으며 대형군함·항공기·전차 보유도 금지됐다. 라인란트 점령에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국제사회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만한 일’로 다시 전쟁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국제사회의 무기력을 확인한 히틀러는 쾌재를 부르며 본격적인 전쟁준비에 들어갔다. 히틀러는 이어서 1938년 오스트리아를 병합했다. 이 역시 베르사유 체제가 금지한 것이지만 거리낌없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베르사유 조약은 휴지가 됐으며 힘과 행동을 수반하지 않은 국제사회의 항의는 무의미했다.  
 
뮌헵협정 조인 직후 체임벌린, 프랑스의 달라디에,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독일의 히틀러. (왼쪽부터)

뮌헵협정 조인 직후 체임벌린, 프랑스의 달라디에,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독일의 히틀러. (왼쪽부터)

 
 
히틀러는 본격적으로 야욕을 드러냈다. 독일계 주민이 다수 살고 있다는 이유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내놓고 요구했다. 히틀러는 영국의 체임벌린 총리 등과 여러 차례 대화를 한 끝에 뮌헨에서 “최후의 영토적 요구”라고 압박해 이를 얻어냈다. 주권국가 체코슬로바키아는 협상장에 초청받지도 못한 채 영토를 잃어야 했다. ‘체코슬로바키아 패싱’이자 강대국들의 ‘뮌헨 배신’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프랑스의 동맹국이었지만 국익 앞에선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프랑스의 어떤 정치인도 자국 젊은이들에게 동맹국을 위해 피를 흘려야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영국은 베르사유 체제를 만들고 체코슬로바키아를 탄생시킨 당사국으로 도덕적인 책무가 있었다. 하지만 동맹이나 도덕은 '무정부 상태'인 국제사회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체임벌린은 뮌헨협정 체코슬로바키아의 에두아르트 베네스 대통령이 항의하자 “영국은 주데텐란트 건으로 전쟁을 하고 싶지 않다”라고 잘라말했다. 베네스는 영국에서 망명정부를 세웠다.  
 
 
 
영국과 프랑스는 다시는 제1차 세계대전 같은 참화를 겪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나치 앞에 유화정책으로 일관했다. 말만 할 뿐 행동이 따르지 않는(only talk, no action) 유화정책은 영국과 프랑스의 무력개입을 두려워하며 조마조마하던 히틀러의 간만 키워놓았다. 히틀러의 침략 야욕을 잠재우기는커녕 오히려 자극했다. 유화정책을 바탕으로 한 체임벌린의 ‘우리 시대의 평화’는 유효기간은 짧았고 대가는 엄청났다. 독일이 39년 9월 폴란드를 침공해 제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됐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은 서방세계가 절대 손잡을 수 없다고 믿었던 공산국가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폴란드를 함께 침공해 영토를 나눴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체임벌린은 전시내각을 구성하려 했지만 야당인 노동당과 자유당이 체임벌린이 주도하는 전시내각에는 참여할 수 없다며 이를 거부했다. 유화정책으로 전쟁을 막을 역사적인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체임벌린과 같은 보수당 소속인 리오 애머리 의원은 하원에서 체임벌린의 리더십 한계를 지적하는 따끔한 연설을 했다. “전시 상황이 됐으므로 이제 과거의 평화체제를 더 이상 지속할 수는 없다. 토론 재능, 상황 파악 능력, 정책의 인기를 내다보는 통찰력, 타협 능력, 심사숙고는 평화시기 지도자에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품성이다. 하지만 이는 전시에는 치명적이다. 승리의 핵심은 비전·대담함·신속함, 그리고 결정의 지속성이다. 전시에는 이젠 덕목을 갖춘 지도자가 필요하다.”  
 
대화를 위해 히틀러와 만나고 있는 네빌 체임벌림 영국 총리(왼쪽).

대화를 위해 히틀러와 만나고 있는 네빌 체임벌림 영국 총리(왼쪽).

 
 
체임벌린은 그 연설 직후 총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체임벌린에게 “전체주의 정권에 대한 굴복과 물질 제공으로 평화를 지킬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이 총리가 지향하는 새로운 국제질서인가”라고 쏘아붙였던 윈스턴 처칠이 후임을 맡아 전시 거국내각을 꾸렸다. 처칠은 초지일관 독일에 대한 강경 대응을 주장하는 바람에 의회에서 뒷전으로 밀렸으나 전쟁이 발발하자 가장 먼저 부름을 받았다.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병합해도 유화정책을 앞세워 아무런 조치를 취하치 않는 체임벌린에 반발해 외무장관을 사임했던 앤서니 이든도 정치의 중심으로 복귀했다. 그는 뮌헨협정 이후 하원에서 "영국이 불명예스럽게 행동했다"라고 비난했다. 그나마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인물이 있었기에 영국은 신속하게 전시 거국내각을 꾸려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냉전시기 서방세계는 뮌헨의 교훈을 금과옥조로 삼았다. 평화는 평화의지가 아닌 전쟁의지로 지킬 수 있다는 교훈이다. 싸울 태세가 된 상대에겐 누구도 쉽게 달려들지 못한다. 이런 상대에겐 협상장에서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 48년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자 서방진영은 신속하게 공동방어기구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를 결성해 집단으로 대응했다. 그결과 소련은 약소국을 하나씩 야금야금 먹어가는 살라미 전술을 더 이상 써먹을 수 없게 됐다. 소련에 양보하거나 도발을 방관해 ‘제2의 체임벌린’으로 비난받고 싶어하는 서방 정치인은 어디에도 없었던 덕분이다. 적대국가에 둘러싸인 이스라엘도 이 교훈을 되새기다. 적에게 유약하게 보이는 순간 안보를 보장할 수 없다며 언제나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체임벌린의 리더십 실패는 ‘뮌헨의 교훈(Lesson of Munich)’으로 남았다. 북핵 도발로 얼룩진 2017년 9월, 절실하게 되새겨야 할 역사적 교훈이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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