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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 굴복 강요하는 단발령 맞선 저항이 반근대적 퇴행이라고?

[대한제국 120주년] 다시 쓰는 근대사 <4> 단발령과 항일 의병
대한제국 창건 전후의 의병은 대부분 고종의 거의(擧義) 밀지를 받고 움직였다. 정규 훈련을 받은 국군과 민군(民軍)이 항일 연합 작전을 펼쳤다. 사진 속 검은 제복을 입은 인물이 국군, 무명옷을 입은 이들은 민군이다. 1906년 무렵 영국 출신 언론인 메킨지가 찍었다. [중앙포토]

대한제국 창건 전후의 의병은 대부분 고종의 거의(擧義) 밀지를 받고 움직였다. 정규 훈련을 받은 국군과 민군(民軍)이 항일 연합 작전을 펼쳤다. 사진 속 검은 제복을 입은 인물이 국군, 무명옷을 입은 이들은 민군이다. 1906년 무렵 영국 출신 언론인 메킨지가 찍었다. [중앙포토]

1895년(을미년) 10월 8일 ‘을미왜변(왜군의 왕후 시해)’을 자행한 일제는 그로부터 석 달도 채 되지 않은 12월 30일(음력 11월 15일) 단발령(斷髮令)을 발표했다. 김홍집 친일 내각을 앞세웠고 고종의 명의를 도용했다. 단발령은 조선 성인 남자의 상투를 강제로 자르라는 행정 명령이었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1894.7.23. 갑오왜란)과 을미왜변이 일제의 ‘물리적 정복’이었다면, 이제 강제 단발을 통해 조선 백성들의 ‘정신적 굴복’까지 받아내려고 나선 것이다.
 
12월 30일 단발령이 떨어지자 백성들은 분기탱천했다. 곳곳에서 거의(擧義) 모의가 일어났다. 여기에 1896년 1월 하순 ‘아관망명(俄館亡命: 고종의 러시아공관 망명·1896.2.11.)’을 위한 임금의 거의 밀지가 내려오자 백성들은 거국적으로 궐기했다. 단발령에 대한 분노가 없었다면 임금의 밀지라고 해도 그렇게 신속하게 전국적 호응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백성들은 왜 그렇게 머리 깎는 일에 분노하며 저항했을까. 안타깝게도 그 전후 맥락을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요즘의 시각으로 희화화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소위 ‘개화’에 역행하는 움직임이라는 비아냥이다. 1894년 7월 일제의 침략(갑오왜란)에 맞선 동학농민군의 재봉기를 보수적이고 반(反)근대적 저항으로 폄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1895년의 단발령에 대한 의병봉기도 반근대적 저항으로 때론 은근히, 때론 노골적으로 비웃는 시각이 우리 역사학계에 많다. 과연 단발령에 대한 저항을 그렇게 비하해도 좋은 것일까.
 
나라 전체가 물 끓는 솥같이 들끓어
고종과 왕세자의 상투부터 강제로 자르며 단발령은 실행됐다. 일본군이 궁성을 포위하고 대포까지 설치한 가운데 내부대신 유길준과 군부대신 조희연 등이 앞장서서 ‘머리를 깎지 않는 자는 모두 죽이겠다’고 선언하며 시작됐다. 정병하가 고종의 머리를, 유길준이 왕세자의 머리를 깎았다. 매천 황현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유길준은 관리들로 하여금 가위를 들고 거리와 성문을 지키고 서서 통행하는 백성들을 붙잡아 머리를 강제로 깎게 했다. 경무사 허진은 순검(경찰)들을 인솔해 칼을 들고 길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머리를 깎았다. … 서울에 손님으로 왔다가 엉겁결에 상투를 잘린 사람들은 상투를 주워 주머니에 감추고 통곡을 하며 도성을 빠져나갔다. … 나라 전체가 물 끓는 솥같이 들끓었고 의병이 사방에서 일어났다.”(황현, 『매천야록(중)』, 명문당, 2008, 105~110쪽)
 
이렇게 무단(武斷)으로 강행한 단발령은 훗날 창씨개명 강요에 버금가는 ‘정체성 말살’의 폭거였다. 일제와 친일 개화파들은 조선의 역사와 전통을 멸시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개화론’을 따르는 그들은 조선을 미개(야만) 혹은 반(半)개화 상태로 파악하며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흔히 단발령에 대한 저항을 이야기할 때 일부 위정척사파 유학자들의 사례를 들곤 한다. “내 몸의 털과 살(身體髮膚)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훼상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다”고 한 『효경』의 가르침에 따라 단발령에 저항했다는 것이다. 위정척사파 유생들 중에는 최익현·유인석 등 소수가 실제 그런 논변을 구사하며 단발에 반대했다. 하지만 『효경』의 영향을 강조하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다. 조선의 ‘상투’와 ‘망건’은 『효경』은 물론이고 어느 유교 경전에도 나오지 않는다. 고려와 조선이 섬긴 유교국가 송·명조의 전통에도 없다. 무엇보다 당시 백성들이 위정척사파 유학자처럼 서양문물 수용을 그렇게 반대한 것도 아니었다.(황태연, 『갑오왜란과 아관망명』, 548~560쪽)
 
당시 백성들은 단발 자체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친일파 윤치호가 남긴 기록에서도 그런 점이 확인된다.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의 통역인 송씨의 말이라며 윤치호는 이렇게 적어 놓았다. “나 자신이나 다른 조선인은 단발에 반대하지 않지만 일본인들이 단발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에 반대한다.”(『윤치호 일기(4)』 1895년 12월 28일자) 당시 군부대신 이도재가 단발령에 대한 서명을 거부하고 대신직을 사임하며 올린 상소문도 같은 의견이었다. “우리나라는 단군과 기자 이래로 편발(編髮)의 풍속이 상투의 풍속으로 변해 머리칼을 아끼는 것을 큰일로 여겼습니다. … 옛적에 청인(淸人)들이 북경에 침입해서 무기를 사용해 관면(冠冕)을 위압으로 훼손하니 쌓인 울분이 300년간 풀리지 않아서 발비(髮匪·머리를 길게 기른 비적)가 일어나 … 수십 년간 병력을 써서야 겨우 평정했습니다. 이것이 족히 교훈이 됩니다. 그것이 진실로 나라에 이롭다면 신(臣)은 비록 으깨져 추방된다고 해도 굳이 이 자리를 사양치 않을 것인데 하물며 스스로 감히 한 줌의 짧은 머리터럭을 아껴 국계(國計)를 위하지 않겠습니까?”(『고종실록』 1895년 음력 11월 16일) 유생 이도재는 상투를 유교의 『효경』과 연결시킨 것이 아니라 단군 이래 수천 년 우리 민족의 풍속과 연결시켰다. 그러면서 자발적 단발이라면 “한 줌의 짧은 머리터럭을 아끼지 않을 것”이지만 무력을 동원한 강제 단발은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강제 단발에 대한 반대에서는 유생이나 영어를 배운 신식 지식인이나 의견이 같았던 것이다.
 
단발령이 내려오자 백성들은 정신적 굴복까지 강요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며 저항했다. 상투를 자르느니 차라리 스님처럼 깎기도 했다고 한다. [사진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단발령이 내려오자 백성들은 정신적 굴복까지 강요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며 저항했다. 상투를 자르느니 차라리 스님처럼 깎기도 했다고 한다. [사진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1894년부터 네 차례 한국을 방문한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당시 한국의 풍속에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음에도 상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국인에 있어서 상투는 국적과 창고(彰古)한 역사(어떤 이는 5000년, 다른 이는 2000년이라고 말한다), 고결함, 전통을 의미하며, … 나는 상투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거나 존경의 표현에 밀접하게 관계된 남성용 장식품을 발견하지 못했다.”(이사벨라 버드 비숍,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살림, 1994, 414~417쪽) 이도재의 상소, 언더우드 통역인 송씨의 진술, 비숍의 관찰 등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것이 바로 일제의 무모함과 무력을 동원한 강제성이다.
 
단발에 대한 저항의 역사는 오래됐다. 고려는 몽골에 패배했음에도 단발은 거부했고, 결국 실랑이 끝에 원나라 황제의 승인을 받아냈다. 만주족이 조선과 명나라를 정복하고 심복(心服)의 표시로 치발역복(髮易服:만주식 변발과 의복)을 강요했을 때도 한족은 이를 받아들였으나 조선인은 끝내 거부해 ‘조선은 상투와 백의(白衣)를 그대로 유지해도 된다’는 청국 황제의 승인을 받아냈다.
 
관련기사
왕후 없애고 ‘조선 정복’ 종결됐다고 판단
을미왜변이 채 수습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일제는 왜 이렇게 조급하게 단발령을 밀어붙였을까. 왕후 시해의 ‘현지 행동대장’인 미우라 고로 일본공사가 우치다 사다스치 일본영사에게 했던 말에서 그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왕후 시해 직후 미우라는 우치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래, 이로써 조선도 서서히 일본의 것이 되었다. 이제 안심이다.”(김문자,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 115쪽). 왕후를 없앰으로써 ‘조선 정복’은 이제 종결되었다고 판단하고 강제 단발을 통해 신속히 조선인의 마음에 복종심을 박아 넣으려고 했던 것이다.
 
역사는 일제와 친일파들의 탐욕대로만 흘러가지 않았다. 단발령에 대한 분노에다 왕후 시해에 대한 복수심까지 더해지면서 의병 봉기는 거족적으로 전개됐다.
 
항일 의병 관련 새로운 연구를 주목해야 한다. 2000년을 전후해 고종과 의병의 밀접한 관계가 재조명받기 시작했다. 1894년 동학농민군 2차 항일봉기 이후의 의병은 대체로 고종의 거의(擧義) 밀지를 받고 움직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고종 신경망 별입시, 친일파에겐 눈엣가시
고종의 거의 밀지는 ‘별입시(別入侍)’가 전달했다. 별입시는 본래 임금을 사적으로 뵙는 것을 가리켰지만, 고종이 경복궁에 유폐된 이후에는 일종의 비공식 직함이 되어 고종을 보좌하는 신경망과 수족 같은 역할을 했다. 서울과 지방 각지에 거주하는 별입시의 신분은 대개 전·현직 고관대작이었지만, 때로 상인이나 노비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별입시는 갑오왜란 이전에 이미 400~500명에 달했다.(황현, 『오하기문』, 역사비평사, 1994, 43쪽) 거의 밀지를 전달한 대표적 별입시들은 이범진·심상훈·한규설·허위·이유인·신기선·주석면·정환직·최병주·홍재봉 등이었다. 이 고위 별입시의 휘하에 다시 시중을 드는 겸인(人)과 문객이 많았다. 따라서 직간접적으로 왕의 심부름을 맡은 별입시 총수는 줄잡아도 수천 명에 달했다. 고위 별입시들은 고종의 밀지를 전달하거나 보여주며 경향 각지의 유력자·망명가·무사(武士) 등과 연계해 의병 항전을 독려했다.
 
이런 별입시가 일제와 친일파들에게는 눈엣가시였다. 친일파 윤치호와 독립협회는 수많은 기사로 별입시를 비아냥거리고 비난하면서 퇴척을 요구했다.(『독립신문』, 1898년 7월 30일, 8월 3일, 8월 16일, 9월 17일, 9월 21일 등)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의병 봉기와 고종은 무관한 것으로 간주됐다. 의병은 대개 자발적으로 일어난 민군(民軍)으로만 여겨졌다. 이 같은 의병 개념에 큰 영향을 끼친 이는 박은식(1859~1925)이다. 박은식은 저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의병이란 민군인데, 국가가 위급할 때 의리로 일어나 조정의 징발령을 기다리지 않고 종군을 한, 적개심에 불타는 사람들이다”고 규정했다.(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소명, 2008, 71쪽)
 
박은식의 의병 개념은 이제 수정되어야 한다. 조선 말기에서 대한제국기에 이르는 의병운동은 박은식의 개념에 따른 기존 연구자들의 주장처럼 재야세력만의 자발적 민족운동이 아니라 고종세력과 재야세력의 합작품이었다.(오영섭, 『고종황제와 한말의병』, 17~61쪽) 친일파 박영효를 추종하며 고종의 무능을 비판했던 정교조차도 “이(아관망명)에 앞서 각처 의병은 모두 밀칙(密勅)을 받고 일어났다(先是各處義兵 皆受密勅而起)”고 기록하고 있다.(정교, 『대한계년사(2)』, 소명, 2004, 160쪽) 밀지를 받지 않고 봉기한 소규모 의병이 있다 해도 시간이 흐르면서 결국엔 밀지를 받은 대규모 의병부대에 통합됐다.
 
박은식, 친일파 소굴 독립협회 치켜세워
박은식 선생이 독립을 위해 애를 쓰고 우리 고대사 연구의 기초를 놓은 점 등은 인정해야 하지만 의병 개념에 대한 잘못된 서술까지 수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황해도 해주 출신의 성리학자인 박은식은 국내에서 금기시되었던 양명학을 소개하는 등 개신유학자의 면모를 보여주었고, ‘황성신문’의 논객으로 대한제국기를 보내며 비분강개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별입시의 운용, 고종의 밀지와 의병 간 비밀 연계, 익문사(대한제국 정보기관)의 운용 등 내밀한 ‘지하 정치’까지 모두 다 파악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그는 성리학적 이단론의 영향이 아직 남아 있어 일본군에 맞서 싸운 동학농민군을 홍건적과 유사한 혹세무민 집단처럼 묘사하기도 했고, ‘친일파 소굴’로 변한 독립협회를 ‘신사들의 모임’으로 치켜세우기도 했다. 이 같은 논변과 함께 그의 의병 개념은 이제 배격되어야 한다. 1894년 이래 대한제국 전후의 거의 모든 의병은 신출귀몰 의병장 이강년의 말대로 ‘천졸(天卒)’, 즉 ‘왕의 군사들’이었다.(황태연, 『갑오왜란과 아관망명』 123~125쪽)
 
고종과 백성의 ‘연합 작전’이 있었기에 아관망명이 성공할 수 있었다. 아관망명 다음날인 2월 12일 고종은 일제의 단발령을 취소시켰고, 18일 ‘두발 편의령’을 발표했다. 임금과 관리, 그리고 군인들의 이미 깎인 머리는 그대로 두었지만, 일반 백성들은 두발 형태를 각자의 편의대로 하라고 했다. 머리카락의 길고 짧음이 근대화의 기준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설사 근대화를 위해 단발이 필요했다고 치더라도 신체적 프라이버시의 자유를 말살한 ‘강제 단발령’과 개인의 자유를 존중한 ‘두발 편의령’ 가운데 어느 것이 근대적 조치인지를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자문 전문가와 기관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황태연 동국대 교수,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 덕수궁 대한제국역사관, 국립고궁박물관 대한제국관  

 
참고자료  『고종황제와 한말의병』(오영섭·선인·2007), 『갑오왜란과 아관망명』(황태연·청계·2017),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김문자·태학사·2011), 『미래를 여는 우리 근현대사』(한영우·경세원·2016),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이태진·태학사·2005), 『용연 김정규 일기』(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편·경인문화사·1994), 『매천야록』(황현·명문당·2008), 『오하기문』(황현·역사비평사·1994), 『대한계년사(2)』(정교·소명·2004),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사벨라 버드 비숍·살림·1994)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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