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의 결정적 순간들
2017년 러시아 혁명 100주년 … 흐루쇼프의 1956년 비밀연설
2017년 러시아 혁명 100주년 … 흐루쇼프의 1956년 비밀연설
![미국 대통령 케네디(왼쪽)·재클린(오른쪽) 부부와 소련 공산당 제1서기 흐루쇼프(오른쪽 둘째)· 니나(왼쪽 둘째) 부부(1961년 6월 오스트리아 빈). [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709/09/98849670-a425-4a20-b1a0-ea0a41828b40.jpg)
미국 대통령 케네디(왼쪽)·재클린(오른쪽) 부부와 소련 공산당 제1서기 흐루쇼프(오른쪽 둘째)· 니나(왼쪽 둘째) 부부(1961년 6월 오스트리아 빈). [중앙포토]
올해 5월 나는 러시아(옛소련) 수도 모스크바에 갔다. 흐루쇼프(1894~1971)는 잊혀진 인물이다. 러시아 지방언론 보도에 단서가 있었다. “2015년 6월 흐루쇼프 기념판 제막식이 있었다. 그가 권력 하야부터 죽을 때까지(1965~71년) 살던 모스크바의 스타로코니우쉐니 19번지 아파트 벽에 붙여졌다.” 아파트는 8층 석조의 고급이다. 나는 그곳에서 주민 빅토르 살렌코를 소개받았다. 그는 은퇴한 미술가다. 빅토르는 내게 관련 기사를 보여줬다.
![1990년 11월 모스크바 붉은 광장.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오른쪽 둘째)가 옐친(오른쪽)등 당 간부와 레닌 묘소로 걸어가고 있다. 굼 백화점에 레닌의 초상화가 걸렸다. [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709/09/2ebbc23f-7a9a-4a6d-8dac-c3d96ee6cad9.jpg)
1990년 11월 모스크바 붉은 광장.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오른쪽 둘째)가 옐친(오른쪽)등 당 간부와 레닌 묘소로 걸어가고 있다. 굼 백화점에 레닌의 초상화가 걸렸다. [중앙포토]

흐루쇼프 동판이 걸린 아파트와 박보균 대기자.

흐루쇼프의 기념 동판. 권력 퇴장 뒤 그가 살았던 모스크바의 아파트 돌벽에 2015년 붙여졌다. 동판에 ‘저명한 국가적·정치적 인물’이라고 써 있다.
연설은 4시간에 걸쳤다. 연설 직전까지 스탈린은 우상(偶像)이었다. 거역할 수 없는 지도자, 신과 같은 존재였다. 연설 뒤 스탈린 신화는 망가졌다. 스탈린은 철권 통치자, 피의 독재자로 규정됐다. 대의원들은 망치에 맞은 듯했다. "우리는 발코니에서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했다. 부끄럼인지, 충격인지, 뜻밖의 사태 때문인지 서로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윌리엄 타우브먼 『흐루쇼프: 인간과 그의 시대』)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고르바초프는 이렇게 정리했다. "연설은 스탈린이 남긴 전체주의 체제에 결정타를 날렸다.”(가디언지 2007년 4월 26일) 2017년 캐슬린 스미스 교수(조지타운대)는 "그 연설은 35년 후 소련의 붕괴를 이끈 연속된 사건의 출발점이었다”고 했다.(『모스크바 1956: 침묵당한 봄』)
![1951년 5월 1일 메이데이 기념식 뒤. 왼쪽부터 흐루쇼프, 스탈린, 말렌코프, 베리야, 몰로토프. 스탈린 사망 뒤 흐루쇼프는 사진 속 인물을 단계적으로 퇴진시키고 권력 정상에 오른다. [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709/09/9fe7df5e-9d67-4467-9dfe-97549d557c19.jpg)
1951년 5월 1일 메이데이 기념식 뒤. 왼쪽부터 흐루쇼프, 스탈린, 말렌코프, 베리야, 몰로토프. 스탈린 사망 뒤 흐루쇼프는 사진 속 인물을 단계적으로 퇴진시키고 권력 정상에 오른다. [중앙포토]
흐루쇼프는 자수성가했다. 그는 러시아 남부 쿠르스크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금속노동자였고 정규 교육은 제대로 받지 못했다. 1918년 그는 볼셰비키가 되었다. 현장 경험을 통해 세상살이를 단련했다. 그는 어깨가 벌어진 작은 키에 투박한 인상이다. 그는 영리했다. 말이 많았지만 격식을 싫어했다. 스탈린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권력 공백을 낳았다. 유력 후계자는 말렌코프, 베리야, 흐루쇼프 3인이었다. 흐루쇼프는 경쟁자를 물리쳤다. 스탈린 사후 3개월 뒤 비밀경찰 두목 베리야는 체포됐다. 그리고 처형됐다.
![흐루쇼프(왼쪽 둘째)는 우주과학의 성취를 자랑했다. 최초 우주 비행사 가가린(왼쪽), 흐루쇼프 하야를 주도했던 브레즈네프(오른쪽), 1961년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대통령(오른쪽 둘째)의 소련 방문 때다. [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709/09/a4b918fe-b401-4c77-a23b-ebe41535d20c.jpg)
흐루쇼프(왼쪽 둘째)는 우주과학의 성취를 자랑했다. 최초 우주 비행사 가가린(왼쪽), 흐루쇼프 하야를 주도했던 브레즈네프(오른쪽), 1961년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대통령(오른쪽 둘째)의 소련 방문 때다. [중앙포토]
스탈린 격하 연설은 거대한 모험이었다. 퇴로가 없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그 결단은 권력 장악의 요소를 갖는다. 하지만 그런 동기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는 과거와 타협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정면승부를 택했다. 그는 스탈린 폭정의 공모자이기도 했다. 그는 죄의식을 가졌다. 그의 팔꿈치에도 숙청의 피가 묻혀 있다. 20차 전당대회는 체제의 정화(淨化), 흐루쇼프 자신의 정화의 제단이었다. "비밀연설은 참회의 행동이다.”(타우브먼, 뉴욕타임스 2006년 2월 25일) 그것은 진실을 향한 의지의 장엄한 폭발이기도 했다. "(연설 결심은) 인간성의 미스터리다. 악을 누른 선(善), 노예보다 자유, 거짓 대신 진실을 선택하려는 거부할 수 없는 인간 성향에 불을 지른 ‘소멸하지 않는 불꽃’(inextinguishable spark)이다.”(레온 아론, 뉴욕타임스 2003년 3월 16일)
![1956년 2월 크렘린 궁에서 열린 20차 공산당 대회, 앞쪽 연단에 흐루쇼프, 레닌의 조각상이 보인다. [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709/09/8c8dab10-de09-46f5-af09-4bbe4b2ecb8d.jpg)
1956년 2월 크렘린 궁에서 열린 20차 공산당 대회, 앞쪽 연단에 흐루쇼프, 레닌의 조각상이 보인다. [중앙포토]
타우브먼 교수(애머스트대)는 "흐루쇼프는 20세기 지도자 중 가장 복잡하고 중요한 인물이다. 소련과 전 세계에 모순되는 흔적(contradictory stamp)을 남겼다”(저서 『흐루쇼프』)고 했다. 그의 집권 때 변혁의 흐름은 격렬했다. 하지만 불연속선이었다. 전진과 후퇴, 반전과 역전, 해빙과 결빙이 교차했다. 비밀연설은 예술에 활력을 넣었다. 영화 『학(鶴)이 난다』(감독 칼라토조프),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나왔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는 출판이 금지됐다. 해빙의 한계다. 흐루쇼프의 소련은 우주 경쟁에서 미국을 압도했다. 1957년 스푸트니크가 발사됐다.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이다. 1961년 가가린은 우주를 여행했다.
비밀연설은 동유럽에 파문을 던졌다. 1956년 10월 헝가리에서 자유 봉기가 일어났다. 소련은 탱크로 유혈진압했다. 흐루쇼프의 평판은 험악해졌다. 그는 냉전의 거친 흐름을 완화하려 했다. 하지만 외교 도발을 강행했다. 베를린 봉쇄, 쿠바 미사일 위기(1962년 10월)다. 소련은 쿠바에 설치한 미사일을 철수했다. 미국 대통령 케네디의 승리인 듯했다. 공산권 여론은 흐루쇼프의 양보를 비난했다. 내막은 달랐다. 빅딜이 있었다. 미국도 터키에서 미사일을 비밀리에 빼갔다.

흐루쇼프의 묘비석.
모스크바=글·사진 박보균 대기자 bgpar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