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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의 현장 속으로] '스탈린 공포통치' 진실 폭로 … 지도자의 용기가 세상을 바꾼다

리더십의 결정적 순간들
2017년 러시아 혁명 100주년 … 흐루쇼프의 1956년 비밀연설
 
미국 대통령 케네디(왼쪽)·재클린(오른쪽) 부부와 소련 공산당 제1서기 흐루쇼프(오른쪽 둘째)· 니나(왼쪽 둘째) 부부(1961년 6월 오스트리아 빈). [중앙포토]

미국 대통령 케네디(왼쪽)·재클린(오른쪽) 부부와 소련 공산당 제1서기 흐루쇼프(오른쪽 둘째)· 니나(왼쪽 둘째) 부부(1961년 6월 오스트리아 빈). [중앙포토]

2017년은 러시아 혁명 100주년이다. 1917년 레닌의 혁명은 세상을 뒤집었다. 공산주의 국가 소련이 등장했다. 1991년 12월 소련은 붕괴됐다. 1917~91년까지 그 역사는 격동과 격랑이다. 소용돌이의 비극적 절정은 스탈린의 공포 독재다. 그 속은 고문과 숙청, 음모와 학살, 증오와 유혈로 차 있었다. 1953년 3월 스탈린이 숨졌다. 권력 계승의 승자는 니키타 흐루쇼프(옛 표기는 흐루시초프)였다. 그는 스탈린 시대를 응징했다. 그 무대가 1956년 소련공산당 20차 전당대회 연설이다. 스탈린의 잔혹한 폭정이 폭로됐다. 연설 장면은 러시아 혁명 이후 가장 비장하고 긴박한 순간이었다. 흐루쇼프는 진실의 힘을 알았다. 진실은 역사를 바꾼다. 진실은 리더십의 용기로 드러난다.
 
올해 5월 나는 러시아(옛소련) 수도 모스크바에 갔다. 흐루쇼프(1894~1971)는 잊혀진 인물이다. 러시아 지방언론 보도에 단서가 있었다. “2015년 6월 흐루쇼프 기념판 제막식이 있었다. 그가 권력 하야부터 죽을 때까지(1965~71년) 살던 모스크바의 스타로코니우쉐니 19번지 아파트 벽에 붙여졌다.” 아파트는 8층 석조의 고급이다. 나는 그곳에서 주민 빅토르 살렌코를 소개받았다. 그는 은퇴한 미술가다. 빅토르는 내게 관련 기사를 보여줬다.
 
1990년 11월 모스크바 붉은 광장.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오른쪽 둘째)가 옐친(오른쪽)등 당 간부와 레닌 묘소로 걸어가고 있다. 굼 백화점에 레닌의 초상화가 걸렸다. [중앙포토]

1990년 11월 모스크바 붉은 광장.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오른쪽 둘째)가 옐친(오른쪽)등 당 간부와 레닌 묘소로 걸어가고 있다. 굼 백화점에 레닌의 초상화가 걸렸다. [중앙포토]

“기념판 제막식은 차분했고 150여 명이 참석했다. 흐루쇼프의 아들 세르게이(1991년 미국 귀화)도 있었다. 모스크바시의 부(副)시장(페차트니코프)은 축사에서 ‘이 기념물은 역사적 정의의 부활’이라고 했다.” 그 기사엔 다른 참석자의 발언도 게재되었다. “흐루쇼프의 삶은 모순투성이다. 하지만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그의 집권 때 강제수용소(굴락)가 열리고 억압이 풀리면서 수만 명이 목숨을 구했다.”
 
흐루쇼프 동판이 걸린 아파트와 박보균 대기자.

흐루쇼프 동판이 걸린 아파트와 박보균 대기자.

나는 아파트 벽에 붙은 기념판을 살펴보았다. 정장 차림의 흐루쇼프 표정은 단호하면서 여유 있다. 그 옆은 그의 시대 상징물로 장식했다. 그것은 우주와 해빙(解氷·оттепель·오테펠)이다.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 크렘린과 그 앞 모스크바 강의 갈라진 얼음, 새싹이 돋는 나뭇가지를 새겼다. 흐루쇼프는 아파트 은둔 생활을 했다. 그는 회고록을 썼다. 구술 녹음을 서방에 밀반출했다. 빅토르는 이렇게 추억했다. “노년기의 우리 아버지는 같은 아파트에 살았던 흐루쇼프를 기억하곤 하셨다. 해빙 덕분에 젊은 시절 아버지는 시낭송회에 다니셨고 그때 들었던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의 시를 외우셨다.” 흐루쇼프가 다짐한 ‘역사적 정의’는 무엇인가. 그는 왜 ‘모순적’인가. 나는 소련 역사가 깃든 붉은 광장에 갔다. 그곳에서 비밀연설문을 다시 읽었다. 연설 제목은 ‘개인숭배와 그 결과들에 대하여’(О культе личности и его последствиях).
 
흐루쇼프의 기념 동판. 권력 퇴장 뒤 그가 살았던 모스크바의 아파트 돌벽에 2015년 붙여졌다. 동판에 ‘저명한 국가적·정치적 인물’이라고 써 있다.

흐루쇼프의 기념 동판. 권력 퇴장 뒤 그가 살았던 모스크바의 아파트 돌벽에 2015년 붙여졌다. 동판에 ‘저명한 국가적·정치적 인물’이라고 써 있다.

1956년 2월 14일 모스크바 크렘린궁 대회의장. 공산당 제20차 대회가 개막됐다. 회의장에는 레닌 조각상만 보였다. 스탈린 상징물은 없었다. 마지막 날인 2월 25일, 외국 초청인사는 출입 금지됐다. ‘비밀연설’이 됐다. 자정 무렵 당 제1서기 흐루쇼프가 연단에 섰다. 그는 “동무들! 지금 이야기는 스탈린에 대한 개인숭배”라고 입을 열었다. 연설은 처음부터 대담한 직설이었다. “혁명의 천재 레닌은 개인숭배 현상을 가차 없이 비난했다. ···스탈린의 개인숭배는 소름 끼칠 정도다.” 스탈린은 레닌의 배신자로 바꿨다. 흐루쇼프는 고문과 처형의 섬뜩한 내막을 폭로했다. “스탈린은 ‘인민의 적(敵)’(브라크 나로다·враг народа)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국가보안기관의 베리야 일당은 자백을 증거로 삼으려고 했다. 사람이 짓지도 않은 죄를 어떻게 지었다고 시인할 수 있는가. 방법은 한 가지다. 물리적 압박, 고문, 무의식 상태, 판단력 상실, 인간적 존엄성의 파괴다. ···1934년 17차 대회에서 선출된 당 중앙위원 139명 중 98명이 체포 총살되었다.” 분노가 넘쳐났다. 참석자들은 경악했다. 놀라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폭로는 절정에 이른다. “의사 음모 사건 때 스탈린은 조사 방법을 지시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비티 비티 이 비티’(бить, бить и бить·때리고 때리고 또 때려라)였다. 흐루쇼프는 ‘대 조국 전쟁’(제2차 세계대전)을 거론했다. "스탈린은 전선의 어떤 곳도 가보지 않았다. 승리 주역은 스탈린이 아니다. 당과 영웅적 군대, 뛰어난 지휘관, 용감한 병사가 승리를 가져왔다.” 열렬한 박수가 터졌다.
 
연설은 4시간에 걸쳤다. 연설 직전까지 스탈린은 우상(偶像)이었다. 거역할 수 없는 지도자, 신과 같은 존재였다. 연설 뒤 스탈린 신화는 망가졌다. 스탈린은 철권 통치자, 피의 독재자로 규정됐다. 대의원들은 망치에 맞은 듯했다. "우리는 발코니에서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했다. 부끄럼인지, 충격인지, 뜻밖의 사태 때문인지 서로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윌리엄 타우브먼 『흐루쇼프: 인간과 그의 시대』)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고르바초프는 이렇게 정리했다. "연설은 스탈린이 남긴 전체주의 체제에 결정타를 날렸다.”(가디언지 2007년 4월 26일) 2017년 캐슬린 스미스 교수(조지타운대)는 "그 연설은 35년 후 소련의 붕괴를 이끈 연속된 사건의 출발점이었다”고 했다.(『모스크바 1956: 침묵당한 봄』)
 
1951년 5월 1일 메이데이 기념식 뒤. 왼쪽부터 흐루쇼프, 스탈린, 말렌코프, 베리야, 몰로토프. 스탈린 사망 뒤 흐루쇼프는 사진 속 인물을 단계적으로 퇴진시키고 권력 정상에 오른다. [중앙포토]

1951년 5월 1일 메이데이 기념식 뒤. 왼쪽부터 흐루쇼프, 스탈린, 말렌코프, 베리야, 몰로토프. 스탈린 사망 뒤 흐루쇼프는 사진 속 인물을 단계적으로 퇴진시키고 권력 정상에 오른다. [중앙포토]

고르바초프는 "1985년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는 1956년 당 대회에서 시작한 것들을 계속한 것”이라고 자평했다. 그 말은 흐루쇼프의 유산 상속자를 자처한 것이다. 비밀연설은 젊은 시절 고르바초프의 정치적 감수성에 자극을 주었다.
 
흐루쇼프는 자수성가했다. 그는 러시아 남부 쿠르스크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금속노동자였고 정규 교육은 제대로 받지 못했다. 1918년 그는 볼셰비키가 되었다. 현장 경험을 통해 세상살이를 단련했다. 그는 어깨가 벌어진 작은 키에 투박한 인상이다. 그는 영리했다. 말이 많았지만 격식을 싫어했다. 스탈린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권력 공백을 낳았다. 유력 후계자는 말렌코프, 베리야, 흐루쇼프 3인이었다. 흐루쇼프는 경쟁자를 물리쳤다. 스탈린 사후 3개월 뒤 비밀경찰 두목 베리야는 체포됐다. 그리고 처형됐다.
 
흐루쇼프(왼쪽 둘째)는 우주과학의 성취를 자랑했다. 최초 우주 비행사 가가린(왼쪽), 흐루쇼프 하야를 주도했던 브레즈네프(오른쪽), 1961년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대통령(오른쪽 둘째)의 소련 방문 때다. [중앙포토]

흐루쇼프(왼쪽 둘째)는 우주과학의 성취를 자랑했다. 최초 우주 비행사 가가린(왼쪽), 흐루쇼프 하야를 주도했던 브레즈네프(오른쪽), 1961년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대통령(오른쪽 둘째)의 소련 방문 때다. [중앙포토]

흐루쇼프는 집단지도체제의 1인자가 됐다. 그는 진정한 공산주의 시대의 개막을 결심했다. 그 조건은 스탈린 공포정치와 결별하는 것이다. 포스펠로프 조사위원회는 대숙청기(1934~38년)의 참상을 보고했다.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지도자로서의 파탄상이 드러났다. 우리는 진실을 증언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했다. 스탈린주의 수구파의 원로 보로실로프가 반박했다. "스탈린 치하의 일들이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 당과 국가의 체면이 어떻게 될지 상상해 보았느냐. 사람들은 우리에게 손가락질을 할 것이다.” 흐루쇼프는 집요했다. "우리가 침묵을 지키면 미래 언젠가 인민들에 의해 우리가 진실을 말하게끔 심판대에 올라갈 것이다.”(『흐루쇼프 회고록』)
 
스탈린 격하 연설은 거대한 모험이었다. 퇴로가 없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그 결단은 권력 장악의 요소를 갖는다. 하지만 그런 동기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는 과거와 타협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정면승부를 택했다. 그는 스탈린 폭정의 공모자이기도 했다. 그는 죄의식을 가졌다. 그의 팔꿈치에도 숙청의 피가 묻혀 있다. 20차 전당대회는 체제의 정화(淨化), 흐루쇼프 자신의 정화의 제단이었다. "비밀연설은 참회의 행동이다.”(타우브먼, 뉴욕타임스 2006년 2월 25일) 그것은 진실을 향한 의지의 장엄한 폭발이기도 했다. "(연설 결심은) 인간성의 미스터리다. 악을 누른 선(善), 노예보다 자유, 거짓 대신 진실을 선택하려는 거부할 수 없는 인간 성향에 불을 지른 ‘소멸하지 않는 불꽃’(inextinguishable spark)이다.”(레온 아론, 뉴욕타임스 2003년 3월 16일)
 
1956년 2월 크렘린 궁에서 열린 20차 공산당 대회, 앞쪽 연단에 흐루쇼프, 레닌의 조각상이 보인다. [중앙포토]

1956년 2월 크렘린 궁에서 열린 20차 공산당 대회, 앞쪽 연단에 흐루쇼프, 레닌의 조각상이 보인다. [중앙포토]

1957년 6월 스탈린주의 수구파의 반격이 있었다. 당 중앙위 상임위(정치국)에서 흐루쇼프 퇴진 요구가 나왔다. 주도자는 말렌코프·카가노비치·몰로토프였다. 하지만 흐루쇼프는 중앙위 전체회의에서 재역전에 성공했다. 그것으로 주동 3인은 반당(反黨)분자로 밀려났다. 흐루쇼프는 1958년 각료회의 의장(총리) 자리를 차지한다. 전임 총리 불가닌은 퇴진했다.
 
타우브먼 교수(애머스트대)는 "흐루쇼프는 20세기 지도자 중 가장 복잡하고 중요한 인물이다. 소련과 전 세계에 모순되는 흔적(contradictory stamp)을 남겼다”(저서 『흐루쇼프』)고 했다. 그의 집권 때 변혁의 흐름은 격렬했다. 하지만 불연속선이었다. 전진과 후퇴, 반전과 역전, 해빙과 결빙이 교차했다. 비밀연설은 예술에 활력을 넣었다. 영화 『학(鶴)이 난다』(감독 칼라토조프),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나왔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는 출판이 금지됐다. 해빙의 한계다. 흐루쇼프의 소련은 우주 경쟁에서 미국을 압도했다. 1957년 스푸트니크가 발사됐다.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이다. 1961년 가가린은 우주를 여행했다.
 
비밀연설은 동유럽에 파문을 던졌다. 1956년 10월 헝가리에서 자유 봉기가 일어났다. 소련은 탱크로 유혈진압했다. 흐루쇼프의 평판은 험악해졌다. 그는 냉전의 거친 흐름을 완화하려 했다. 하지만 외교 도발을 강행했다. 베를린 봉쇄, 쿠바 미사일 위기(1962년 10월)다. 소련은 쿠바에 설치한 미사일을 철수했다. 미국 대통령 케네디의 승리인 듯했다. 공산권 여론은 흐루쇼프의 양보를 비난했다. 내막은 달랐다. 빅딜이 있었다. 미국도 터키에서 미사일을 비밀리에 빼갔다.
 
흐루쇼프의 묘비석.

흐루쇼프의 묘비석.

나는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역에 갔다. 모스크바 강변의 그 공동묘지에는 흐루쇼프의 무덤이 있다. 그의 추모비석은 독특하다. 조형미는 논란투성이의 그의 시대를 드러낸다. 1964년 10월 흐루쇼프는 기습을 당했다. 당 중앙위는 그를 권좌에서 몰아냈다. 권력 패배의 뿌리는 비밀연설이었다. 타우브먼 교수는 정리한다.(『흐루쇼프』) "그 연설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용감하면서 가장 무모한 행동이었다.”
 
모스크바=글·사진 박보균 대기자 bg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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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