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박보균의 현장 속으로] 폴란드 기자, 공산당 사무실 연인 통해 입수 … 이스라엘 모사드가 CIA에 제공, NYT 보도

리더십의 결정적 순간들 
흐루쇼프 연설의 비밀 시한은 짧았다. 그는 “적들에게 탄약을 주어선 안 되고, 우리의 환부를 보여선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연설 99일 뒤(1956년 6월 4일) 미국 뉴욕타임스가 특종 보도했다. 출처와 입수 과정은 007 드라마다. 사연은 이렇게 전개됐다.
 
모스크바 중앙당은 연설문을 지방에 보냈다. 3월초 동유럽의 공산당도 극비 열람용으로 받았다. 폴란드 공산당은 소수 간부들에게 돌렸다. 1956년 4월 초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젊은 미남자가 공산당 건물에 들어섰다. 31세의 빅토르 그라예프스키(Wiktor Grajewski, 1925~2007). PAP 통신사 기자다.
 
그라예프스키는 취재 겸 연인을 만나러 왔다. 연인은 공산당 제1서기 사무실의 여비서(루시아 바라노프스키)다. 루시아는 연상(35세)의 유부녀. 남편(폴란드 부총리)과 별거 중이었다. 루시아는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기자의 눈길이 우연히 책상 위로 쏠렸다. 붉은색 표지로 장정된 책이다. 일급비밀 도장에 번호가 매겨졌다. 책 표지는 ‘흐루쇼프 동지의 연설문’. 기자는 내심 놀랐다. 흐루쇼프 연설에 대한 소문은 퍼졌다. 그라예프스키도 그 소문을 듣고 있었다. 기자는 직감적으로 책자의 가치와 정체를 파악했다. 그는 당돌하게 부탁했다. “집에 가서 조용히 읽겠다. 몇 시간만 빌려 달라.” 루시아는 연인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그라예프스키는 집중해서 읽었다. 그는 전율스러운 충격을 받았다. 그는 유대인이다. 가족은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 때 러시아로 피난했다. 종전 후 가족들은 신생 이스라엘로 옮겼다. 그는 스탈린주의자였다. 1955년 그는 가족을 만나러 이스라엘에 갔다. 공산주의와 다른 세계를 만났다. 책자를 돌려줄 시간이 다가왔다. 하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의미 있는 돌출행동을 했다. 그는 바르샤바 주재 이스라엘 대사관에 들렀다. 코트 속에 붉은색 책자를 숨겼다. 그곳에서 이스라엘 첩보기관 샤바크(신베트) 요원을 만났다. 그는 책자를 건넸다. 요원은 대어를 낚았다. 책자를 사진복사했다. 그라예프스키는 모른 척했다. 그는 책자를 루시아 책상에 갖다놓았다. 반환 약속시간 이전이었다.(선데이타임스 2007년 11월 5일)
 
샤바크 요원은 복사본을 이스라엘 본부에 보냈다. 본부는 흥분에 빠졌다. 4월 13일 샤바크 책임자(아모스 마노르)는 벤구리온 총리에게 달려갔다. 문서는 최고 정보기관 모사드로 넘어갔다. 모사드 책임자(이세르 하렐)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에 제공하기로 했다. 모사드와 CIA와의 관계는 격상됐다. 4월 17일 모사드는 CIA 본부로 전달 요원을 보냈다. CIA 국장 앨런 덜레스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극비 정보로 보고했다. 덜레스는 연설문 획득을 ‘첩보 세계의 쿠데타’라고 했다. CIA는 연설문을 진짜로 최종 판정했다. 뉴욕타임스에 흘렸다. 서방의 친소·좌파 지식인들은 경악했다. 소련은 누설 내막을 끝내 파악하지 못했다. 이스라엘은 특급 비밀로 관리했다.
 
그라예프스키는 1957년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그는 노년기에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영웅이 아니다. 역사를 만든 사람은 흐루쇼프다. 나는 잠시 그 역사와 만난 행운아다.” 연설문은 33년 뒤 소련에서 공식 간행된다. 고르바초프 집권 시절인 89년 4월이다.
 
나는 특별한 기억을 갖고 있다. 89년 6월 옛소련 시절, 김영삼 야당 총재는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나는 현장을 따라갔다. 소련의 ‘세계경제·국제문제연구소’의 연구원들과 만남이 있었다. 연구원의 발표 내용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흐루쇼프의 연설문이 드디어 간행됐다. 페레스트로이카의 의미있는 진전이다.” 연구원의 득의에 찬 표정은 강렬했다.
 
[S BOX] 검은색·흰색 돌 맞물린 무덤 조각상, 두 영혼의 흐루쇼프 형상화
흐루쇼프의 묘비석.

흐루쇼프의 묘비석.

흐루쇼프의 무덤은 노보데비치 공동묘지에 있다. 그는 크렘린 성벽 묘역에 묻히지 못했다. 권좌 하야 뒤 숨졌기 때문이다. 그의 사망도 프라우다의 한 줄 기사로 다뤄졌다. 그의 역정은 전진과 후퇴다. 묘지의 추모비도 그런 대비를 드러낸다. 1975년, 사망 4년 뒤 유족들은 기념비석을 세웠다. 사전에 코시긴 총리로부터 허가를 받았다. 유족들은 러시아 조각가 에른스트 네이즈베스트니(1925~2016)를 찾아갔다. 묘지를 디자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조각가와 흐루쇼프는 악연이 있었다. 1962년 흐루쇼프는 네이즈베스트니의 미술전에 갔다. 그는 험담을 퍼붓었다. “당나귀가 꼬리를 캔버스에 흔든 것 같다. 퇴폐예술이다.” 그런 속에서 흐루쇼프는 조각가와 어울렸다. 조각가는 그 소통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유족의 요청에 응했다. 그는 흐루쇼프의 삶을 극적으로 묘사했다. 흐루쇼프의 영혼 속에서 다투던 진보와 반동을 형상화했다. 검은색과 흰색 돌이 요철로 맞물려졌다. 그 사이에 청동 얼굴상을 앉혔다. 표정은 애매하다. 우울한 듯하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띤 듯하다. 흰색은 해빙, 검정은 결빙이다. 조각상은 격렬하지만 이중적이다. 네이즈베스트니는 1976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는 말년에 조국과 화해했다. 러시아 대통령 푸틴은 그를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조각가”라고 기렸다.
 
 
박보균 대기자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 군사안보연구소

군사안보연구소는 중앙일보의 군사안보분야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군사안보연구소는 2016년 10월 1일 중앙일보 홈페이지 조인스(https://news.joins.com)에 문을 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https://news.joins.com/mm)를 운영하며 디지털 환경에 특화된 군사ㆍ안보ㆍ무기에 관한 콘텐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연구소 사람들
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