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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대남비서傳(2)] 김정일의 '꾀돌이' 허담

김중린 대남비서가 83년 10월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물러난 뒤 그 뒤를 이은 사람은 ‘꾀돌이’ 허담(1929~1991)이다. 그는 머리가 영리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비위를 맞추는 데 따를 사람이 없었다. 황장엽의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에 따르면 허담은 김정일의 뜻에 맞게 행동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무조건 헐뜯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머리가 영리해 김정일의 비위를 잘 맞춰
부인이 김일성과 사촌 관계로 승승장구
70~80년대 북한 외교를 대표한 주역

아웅산 테러 사건 이후 대남비서 맡아
85년 서울 방문해 전두환 대통령 예방
김영삼 ·문익환 ·임수경 등도 만나

허남 대남비서(사진 왼쪽)가 85년 5월 김정일이 경제사업에 대한 지도를 실속있게 하며 인민생활을 빨리 향상시키라는 지시를 메모하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허담 대남비서, 연형묵 비서, 강성산 총리, 김정일. [사진 우리의 지도자]

허남 대남비서(사진 왼쪽)가 85년 5월 김정일이 경제사업에 대한 지도를 실속있게 하며 인민생활을 빨리 향상시키라는 지시를 메모하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허담 대남비서, 연형묵 비서, 강성산 총리, 김정일. [사진 우리의 지도자]

허담은 김일성의 삼촌인 김형록의 딸 김정숙과 결혼했다. 그의 손윗동서는 양형섭(92)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이다. 양형섭의 부인은 김정숙의 언니 김신숙이다. 따라서 김신숙․ 김정숙 자매는 김일성과 사촌 관계가 된다. 허담은 이런 배경 속에서 김일성-김정일 시대에 ‘슈퍼 파워’를 가졌다. 장성택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허담은 70~80년대 북한 외교를 대표하는 사람이다. 48년 모스크바 대학을 졸업한 이후 외무성 참사로 외교업무를 시작했다. 55년 8월부터 노동당 지도원, 과장을 거쳐 32살이 되던 61년 외무성 부상으로 승진했다. 초고속 승진이었다. 그리고 69년 외무성 제1부상이 됐고 70년에 북한 외교의 수장인 외무상에 올랐다. 
 
허담은 외무상에 있을 때 영국의 정보기관을 본떠서 북한에도 정보기관을 설치하자고 김정일에게 제안했다. 정보기관의 목적은 김일성 유일사상체계와 김정일 후계체제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사회 각 부문에 걸쳐 주요 정보를 세밀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김정일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73년 5월 사회안전부 정치보위국을 하나의 국가기관으로 독립시켜 국가정치보위부(현 국가보위성)를 신설했다.
 
허담은 김정일을 보좌하는데 누구보다 정성을 다했다. 김정일을 찬양하는 회상기도 남겼다. 유고로 남긴 회상기는 그의 사후에 『김정일 위인상』이라는 책으로 출간됐다. 허담이 북한 외교를 담당하면서 김정일과 함께 했던 시간들을 기록했는데 찬양 일색이다.
 
허담이 대남비서를 맡은 것은 13년 동안 외무상을 마친 83년 12월부터다. 아웅산 테러 사건 이후 당 국제비서였던 김영남이 허담을 대신해 외무상으로 발령이 났고, 당 국제비서는 김용순이 부부장에서 승진해 맡았다.
 
욕심이 많고 질투심이 강했던 허담의 부인 김정숙이 이 인사에 불만이 많았다. 당시만 해도 당 국제부는 당내에서 조직지도부, 선전선동부 다음으로 힘이 셌다. 그래서 김정숙은 남편이 국제비서로 발령이 나기를 늘 바라고 있었다. 언제 통일이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대남비서는 성에 차지 않았다. 김정숙은 내각 기관지 민주조선의 책임주필, 조선대외문화연락위원장 등을 맡을 정도로 활발한 여성이었다. 하지만 김정숙의 불만은 그대로 끝났다. 김정일의 인사를 뒤집을 수 없었다. 김정일의 허담에 대한 신임은 날로 높아갔다. 허담은 김정일의 술 파티에 고정적으로 참석했으며 김정일과 찰떡궁합이 돼 갔다.
 
허담(왼쪽에서 네번째) 대남비서가 84년 5월 함경북도 청진조선소를 현지지도하는 김정일을 수행하고 있다. 오른쪽 끝은 연형묵 전 총리다. [사진 우리의 지도자]

허담(왼쪽에서 네번째) 대남비서가 84년 5월 함경북도 청진조선소를 현지지도하는 김정일을 수행하고 있다. 오른쪽 끝은 연형묵 전 총리다. [사진 우리의 지도자]

허담은 대남비서를 맡은 뒤 85년 9월 서울을 방문했다. 대남비서가 서울을 방문해 대통령을 만난 것은 처음이다. 그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에 있는 최원석 동아건설 회장의 별장에서 전두환 대통령을 만났다. 『전두환 회고록 2』에 따르면 청와대는 보안유지가 어려울 뿐 아니라 대통령의 집무장소를 특사에게 공개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에서 그곳을 대통령의 별장으로 위장하고 접견 장소로 이용했다. 허담은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하자는 내용을 담은 친서를 전달했다. 또한 허담은 통일 문제와 정상회담에 관한 ‘김일성 주석의 견해’를 담은 유인물을 일어선 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낭독했다.
 
전두환은 허담에게 “김일성의 생전에 남북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반목에서 탈피할 것”을 촉구했다. 한 달 후 답방 형식으로 장세동 안기부장이 그해 10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났다. 김일성은 “내가 전두환 대통령 각하 말씀 가운데 가장 감명 깊게 들은 것은 내가 더 늙어 죽기 전에 통일하자는 것인데, 나는 아직 건강하고 정력적으로 담화하고 통일국가를 위한 노력을 함께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무르익던 남북정상회담은 북한이 한․미합동군사훈련인 팀스피리트 훈련을 취소해 줄 것을 요청하고 그해 10월 부산 청사포 앞바다에 북한 반잠수정을 침투시키는 등 도발을 하자 중단 위기에 놓였다. 북한은 기여히 86년 1월 팀스피리트 훈련을 중단하지 않는 것을 빌미로 남한과의 모든 회담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허담이 대남비서를 맡으면서 최초로 성사될 뻔했던 남북정상회담은 이것으로 물 건너갔다. 이후 허담은 경색된 남북관계보다 김일성의 외교 업무에 동원됐다. 86년 10월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을 수행했고, 87년 5월 김일성의 중국 방문도 수행했다. 당시 허담은 전 외무상 자격으로 김영남 현 외무상과 함께 김일성을 수행했던 것이다.
 
허담(사진 왼쪽) 대남비서가 연도 미상 평양시 건설사업을 현지지도하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수행하고 있다. [사진 우리의 지도자]

허담(사진 왼쪽) 대남비서가 연도 미상 평양시 건설사업을 현지지도하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수행하고 있다. [사진 우리의 지도자]

허담은 88년 1월 당 국제비서에서 물러나는 황장엽(1923~2010)을 대신해 오매불망 기다렸던 당 국제비서를 맡았다. 당 국제부장인 김용순에게만 국제부를 맡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허담은 국제비서를 하면서 조국평화통일위원장을 겸했다. 89년 3월 방북한 문익환 목사와 공동성명을 발표했으며 같은 해 6월 김영삼 민주당 총재와 모스크바에서 회동했다. 그 해 8월에는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임수경을 만나기도 했다.
 
그의 승승장구는 계속 이어져 90년 5월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1차 회의에서 신설된 외교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하지만 건강이 문제였다. 그는 건강악화로 인해 비서업무를 수행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형식상 맡고 있던 외교위원회 위원장도 신병 치료 때문에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러다 결국 그는 91년 5월 오랜 병환 끝에 숨졌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2016년 제7차 당대회 개회사에서 허담을 “우리당의 강화발전과 사회주의 위업의 승리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한 사람”으로 제일 먼저 호명했다.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ko.soos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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