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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기사는 기사답게, 기자는 기자답게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 밤샘토론 앵커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 밤샘토론 앵커

체육 선생님이라 그런지 몸이 아주 날랜 분이었다고 했다. 수업을 빼먹으려고 담을 넘는 아이들이 보일 때면 ‘슝’ 소리를 내며 달려가 단숨에 잡아 왔을 만큼. 그 모습이 눈에 선한데 가라앉는 배에서 끝내 빠져나오지 못했다니 차마 믿기질 않더란다. 지난 4월 16일 세월호 3주기에 방송된 JTBC ‘톡투유’에서 한 관객이 눈물을 머금고 털어놓은 사연이다. 단원고로 부임하기 전, 그녀의 중학 시절 은사였다는 고(故) 고창석 교사는 사고 당시 객실 곳곳을 다니며 “빨리 나가라”고 목이 터져라 외쳤다 한다. 늘 그랬듯이 3년 전 그날도 그는 바람처럼 아이들에게 달려간 거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11명의 선생님 중 누구도 비겁하게 학생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교사로서의 사명감을 꿋꿋이 지켜냈다. 제 목숨 살리기에 급급해 승객 구조의 의무를 저버린 선장과 선원들, 여전히 책임 회피에 급급한 전직 대통령을 한없이 부끄럽게 만드는 투철한 직업의식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할 일을 묵묵히 해낸 이런 분들이 없었다면 과연 지금 세상은 어떤 모습이 돼 있을까. 많은 것을 빚진 우리로선 그저 고맙고 고마울 따름이다.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가장 뭉클했던 대목도 만섭과 피터가 각자 본분을 다하기 위해 분투하는 장면이었다. 요금을 받았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손님을 목적지까지 태워다 줘야 한다는 기사의 본분, 아무리 위험해도 반드시 현장에 가서 보고 들은 걸 전해야 한다는 기자의 본분을 이들이 목숨 걸고 지킨 결과 ‘광주’의 진실이 기적적으로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계엄군의 총탄이 난무하는 금남로로 떠나기 전, 혼자 서울로 돌아갈 것을 권유하는 피터에게 만섭이 서툰 영어로 이 말을 할 때 특히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이 택시 드라이버, 유 택시 손님. 위 고 투게더.”
 
피터의 실제 모델인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는 생전에 왜 광주로 갔느냐는 질문에 “기자니까 당연히 가야지”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때 이 땅의 기자들은 어땠을까. 대학살을 직접 접한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이 폭로 기사를 내려다 실패에 그친 건 영화에 그려진 대로다. 한국기자협회가 펴낸 언론자유 수호 운동 약사(略史)를 보면 다른 언론사에서도 신군부의 보도 통제에 저항하다 고문 끝에 옥고를 치르거나 해직당한 기자가 적지 않았다. 당시 언론의 침묵은 분통 터질 일이지만 적어도 기자들 모두가 비겁했던 건 아니었다.
 
내가 기자로 첫발을 내디딘 건 그로부터 꼭 10년이 흐른 1990년 말이다. 이듬해 봄,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가 학내 시위 중 경찰들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숨지고 만다. 그의 죽음이 도화선이 돼 전국에서 민주화 요구 시위가 줄을 이었고, 분신 자살까지 잇따르며 정국이 걷잡을 수 없이 요동치던 즈음이다. 수습 딱지도 채 못 뗀 신참이던 나는 사태의 큰 그림은 파악도 못한 채 서울 도심의 시위 현장을 이리저리 쫓아다니기에 바빴다. 그러던 어느 저녁 최루가스가 자욱한 종로 단성사 앞 사거리에서 보기 드문 광경을 목격하게 됐다. 시위의 막간에 학생·상인·주부·회사원 등 수백 명이 모여 앉더니 즉석 시국 토론이 펼쳐진 거다.
 
시위 진압 방식부터 치솟는 물가와 집값 문제까지 진지한 성토가 이어진 이날 토론은 나의 첫 ‘취재일기’에 담겨 다음 날 사회면 귀퉁이에 실리게 됐다. 그걸 본 모 선배가 건넨 한 마디가 지금도 생생하다. “운동권 학생 말고 평범한 시민도 시위에 참가한다는 걸 알려준 유일한 기사야.” 얼결에 쓴 기사에 의미를 실어준 그 말을 들으며 비로소 기자 일의 본질을 깨우쳤던 듯하다. 사실을 ‘본 대로 들은 대로’ 전해야 한다는 걸 말이다. 부디 기자는 기자답게, 기사는 기사답게, 교사는 교사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을 볼 수 있기를.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밤샘토론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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