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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황제 동상 철거하라" 순종황제어가길 유적 친일논란 이유

1909년 1월7일 순종황제가 대구역에 온다는 소식에 3만명의 인파가 몰렸다. 백경서 기자

1909년 1월7일 순종황제가 대구역에 온다는 소식에 3만명의 인파가 몰렸다. 백경서 기자

1909년 1월7일 오후 3시25분 대구역. 3만명의 인파가 역 근처로 모여들었다. 8시간가량 궁정열차를 타고 도착한 순종황제(純宗皇帝)를 보기 위한 사람들이었다. 순종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다. 
당시 대구사람들은 순종이 지나는 길 앞에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각자 이불이며 옷 등 자신의 집에 제일 좋은 것들을 갖고 나와 순종이 지나는 길바닥에 깔았다고 한다. 순종은 이날 하루 일본 제복을 입고 대구역에서부터 달성토성까지 2.1㎞를 행차했다. 태극기가 집집마다 게양됐고, 야간에는 시가지에서 밤이 늦도록 사람들이 등을 들고 걷는 제등행렬이 이어졌다. 

1909년 순종의 남순행길을 대구 중구청이 순종황제어가길로 유적 복원
민족문제연구소 "남순행은 반일감정 무마 위해 일제가 연출…역사 바로잡아야"

29일 경순국치일, 순종동상 철거를 요구하는 기자회견 열려
경북대 교수 "전문가들과 역사적 논란 여부 충분히 의논했어야"


이토 히로부미가 순종을 모시고 서북순행을 하던 모습. 순종은 남순행 후 약 한달 뒤 서북순행을 했다.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이토 히로부미가 순종을 모시고 서북순행을 하던 모습. 순종은 남순행 후 약 한달 뒤 서북순행을 했다.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당시 순종은 7일 대구를 시작으로 부산·마산을 차례로 남순행(南巡幸)한 뒤 12일 다시 대구역으로 와서 서울로 돌아갔다. 역사적으로 순행의 의미는 지방의 사정을 감찰하고, 백성의 고통을 살피기 위함으로 알려진다. 
당시 궁내부 내각기록과에서 기록한 남순행일기에는 순종이 마지막 날 13일 대구에서 발표한 칙유(勅諭·임금이 몸소 이름)가 기록돼 있다. 순종은 "짐이 지방을 순행함은 첫 번째도 곧 백성을 위함이요, 두 번째도 곧 백성을 위함이다. 현재 백성을 구제하는 방책과 이끌어 나아가게 하는 방법이 허다하나 오직 유신(維新·낡은 제도를 고침)과 무실(務實·참되기를 힘씀)을 역행(力行·꾸준히 실천)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대구 달성공원에 세워진 순종황제 동상. 백경서 기자

대구 달성공원에 세워진 순종황제 동상. 백경서 기자

108년 뒤인 2017년 4월, 순종의 남순행이 순종황제어가길로 탄생했다. 대구 중구청은 2013년부터 2017년 4월까지 70억원을 들여 대구 중구 수창동·인교동 일대를 순종황제어가길로 조성했다. 거리벽화·남순역사공간을 만들고 달성공원에는 순종 동상을 건립했다. 
 
하지만 이를 놓고 시민단체와 중구청의 시각이 엇갈리고 있다. 시민단체는 친일 관련 유적이니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중구청은 아픈 역사도 역사라고 반박한다.
당시 순종이 대구를 방문하게 된 배경이 그 이유다.
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에 따르면 남순행은 일반적인 황제의 순행이 아닌, 반일 감정을 무마하고 일본에 의해 열차 등 경제발전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실제 순종의 남순행길은 조선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동행했다. 민심을 다스리되, 결국 일본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선전해야했던 비극적인 여행이며 반역사적 행위었다는 것이다. 

대구 중구 수창초등학교 앞 순종황제어가길의 남순행로. 백경서 기자

대구 중구 수창초등학교 앞 순종황제어가길의 남순행로. 백경서 기자

이에 따라 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는 달성공원에 있는 높이 5.5m의 순종동상 철거를 요구하고 있다. 29일 경술국치일을 맞아 기자회견도 연다. 경술국치일은 1910년 8월29일 한일합병조약에 의해 일본에 주권을 빼앗긴 날이다. 
이정찬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은 "중구청은 기간 여러 학자들 및 시민사회의 우려와 지적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해 달성공원 앞에 순종동상을 세웠다"며 이를 내버려두면 청소년과 시민들의 역사의식에도 지대한 부작용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덕수궁 석조전 앞에서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축하하며 나라를 판 우리 위정자와 일본 침략자들이 함께 찍은 기념사진. 앞줄 중앙이 고종 황제, 오른쪽이 순종, 왼쪽은 영친왕, 그 옆이 데라우치 통감이다. [사진 한일병합사 : 사진으로 보는 굴욕과 저항의 근대사, 눈빛, 2009 ]

덕수궁 석조전 앞에서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축하하며 나라를 판 우리 위정자와 일본 침략자들이 함께 찍은 기념사진. 앞줄 중앙이 고종 황제, 오른쪽이 순종, 왼쪽은 영친왕, 그 옆이 데라우치 통감이다. [사진 한일병합사 : 사진으로 보는 굴욕과 저항의 근대사, 눈빛, 2009 ]

일각에서는 순종 당시 태도를 비판하는 시각도 있다. 
자신을 독립투사 이명균 선생의 손자라고 밝힌 영남대 이동순 명예교수는 "순종은 대구에 와서 먼저 달성공원의 일본 신사를 참배하고 일본군 헌병대장, 경찰서장 등을 만나 격려했다"며 "순종은 일본이 마음대로 조종하던 부끄러운 인형"이라고 말했다. 또 "세종대왕 이외에 동상으로 세워진 왕이 어디있느냐"며 "수치스러운 시대의 왕 동상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고 주장했다. 
 
반면 중구청은 순종어가길 조성사업이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이라는 입장이다. 다크투어리즘은 재난이나 비극적 사건이 일어났던 곳을 찾아 체험함으로써 교훈을 얻는 여행이다. 중구청 측은 치욕적인 역사도 우리의 역사이기에 항일정신을 다크투어리즘으로 승화시켰다고 설명했다. 아픈 기억들을 반성과 교훈으로 삼아 역사를 재인식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순종친필교지인 한일합병조약 문서. [중앙포토]

순종친필교지인 한일합병조약 문서. [중앙포토]

또 순종에 대해서는 남순행을 마친 이듬해 1910년 한일병합조약에 서명날인을 강요받았지만, 순행에서 만난 백성들의 광복에 대한 염원을 실행하고 일본에 복종할 수 없다는 왕의 자존심을 지키며 끝내 서명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역사적 해석 논란에 대해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는 "양쪽의 입장 중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말하긴 어렵다"면서도 "다만 역사적 인물을 복원하거나 대중화할 때는 전문가들과 역사적 논란 여부를 충분히 의논해야 했는데, 신중하게 접근하지 못 한것 같다"라고 말했다. 
 
대구=백경서 기자 baek.kyungse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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