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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여름, 고단했던 나에게

이영희 중앙SUNDAY 기자

이영희 중앙SUNDAY 기자

축축한 늦여름 밤 식혜를 만든다. 따뜻한 죽에 누룩을 섞어 상온에 하룻밤 보관한 후, 다음 날 아침 발효를 촉진하는 이스트를 넣는다. 그렇게 한나절만 두면 달콤한 식혜가 완성. 밥알까지 먹어도 좋지만 깔끔하게 마시려면 국물만 짜내 냉장고에 넣어 둔다. 끈적이는 퇴근길의 피로를 풀어주는 음료로 최고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모리 준이치 감독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사진)를 보며 상상으로 이런저런 음식을 만들어본다.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원작 만화를 ‘여름과 가을(2014)’ ‘겨울과 봄(2015)’ 두 편의 영화로 옮겼다. 수퍼에 가려면 자전거로 산길을 30분 내달려야 하는 시골 마을 고모리. 이치코(하시모토 아이)는 이곳에서 홀로 논밭을 갈고 추수를 해 끼니마다 1인분의 음식을 만드는 자급자족 프로 농부다.
 
영화는 더할 나위 없이 심심하다. ‘먹방’은 맞는데, 화려한 한 상 차림은 없다. 이치코는 봄이 오면 수유나무 열매로 잼을 만들고, 산에서 딴 두릅을 튀겨 상을 차린다. 여름 식혜는 전해 수확한 쌀로 지은 밥에 된장을 빚을 때 챙겨둔 누룩을 넣었다. 동물들과 경쟁하며 주운 호두를 곱게 빻아 만든 호두 주먹밥은 가을걷이 도시락용. 계절이 만들어낸 재료가 번거롭기 그지없는 과정을 거쳐 하나의 요리로 탄생하는 과정이 고요하게 그려진다.
 
매일의 노동과 밥 속에 언뜻언뜻 드러나는 사연은 이렇다. 엄마는 이치코가 고등학생 때 집을 나갔고, 이치코도 성인이 된 후 고향을 떠났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도망쳤다’는 생각에 움츠러든 그에게 고된 농사일과 정성 들여 만드는 요리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몸에 새기는 과정이다. 쨍한 여름날 낫으로 잡초를 베어내며 이치코는 생각한다. “의심은 끝이 없다. 하지만 내 몸이 직접 느낀 것이라면 믿을 수 있다.”
 
별일 없이 고단했던 여름이 간다. 조금은 나아진 줄 알았는데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것 같아 의기소침해진 밤이 있었다. 딸의 곁을 훌쩍 떠났던 이치코의 엄마는 어느 날 이런 편지를 보내온다. “인생은 ‘원’이 아니라 ‘나선’일 거야.”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 같아도, 경험이 쌓인 만큼 조금은 위를 향해 원을 그리고 있을 거라고. 그러니 가을이 오면 홀대했던 나에게 직접 만든 밥 한 끼 정성스레 대접하며, 다시 기운을 내 보라고. 
 
이영희 중앙SUNDAY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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