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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속으로] 역사학자 이덕일의 임청각 이야기 “바로잡을 역사 너무 많다”

잊혀진 석주 이상룡 독립운동 성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경북 안동 고택 임청각 안의 군자정. 문재인 대통령이 올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임청각을 “독립운동의 산실”이라고 언급했다. [프리랜서 공정식]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경북 안동 고택 임청각 안의 군자정. 문재인 대통령이 올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임청각을 “독립운동의 산실”이라고 언급했다. [프리랜서 공정식]

석주 이상룡과 임청각에 대해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광복절 경축사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으로 임청각을 꼽으면서 조금씩 알려지는 것이 늦었지만 다행이다. 임청각은 건축사상으로도 중요한 전각이다. 이상룡의 선조인 형조 좌랑 이명(李洺)이 중종 4년(1519) 지었는데, 영남산 기슭의 비탈진 경사면에 기단을 쌓고 전각들을 조성해 어느 방에서나 햇빛이 잘 들게 했다. 또한 안채, 중채, 사랑채, 행랑채 등이 각각 독립된 별당형 전각들이면서도 연결문을 통해 비를 맞지 않고 서로 오갈 수 있게 설계했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귀래정·영호루와 함께 안동의 명승”이라고 평가한 이후 여러 풍수가가 드나들던 장소이기도 하다. 18세기의 학자 대산(大山) 이상정은 “영남의 풍광 중에서도 으뜸이라고 칭한다”고 높게 평가했다. 중국 동진(東晉)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중 “맑은 시내에서 시를 읊는다(臨淸流而賦詩)”는 구절에서 ‘임청’ 두 자를 취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고향=임청각의 진정한 가치는 이상룡을 필두로 고성 이씨 일문이 수행했던 피어린 독립투쟁의 본산이라는 데 있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자 이상룡은 1911년 전 가족을 이끌고 망명했다. 이상룡과 아들 준형(1875~1942)은 물론 두 동생 상동(1865~1951)·봉희(1868~1937) 일가, 심지어 자형(姊兄)인 백하 김대락 일가까지 모두 망명했다. 만 쉰세 살의 늦은 나이였던 이상룡은 임청각과 그 부속토지 일부만 제사를 위해 남겨놓고 만석 재산을 모두 팔아 독립전쟁에 바쳤다. 일경의 눈을 피해 혼자 북상했다가 신의주에서 가족들과 합류해 2월 27일 압록강을 건너는데 ‘강을 건너며(渡江)’란 절창을 남겼다.
 
‘칼날보다 날카로운 삭풍이/ 차갑게 내 살을 도려내네…
 
이 머리는 차라리 자를 수 있지만/ 이 무릎을 꿇어 종이 될 수는 없도다…
 
누구를 위해 머뭇거릴 것인가/ 호연히 나는 가리라.’
 
안동의 이상룡 일가와 서울의 우당 이회영 6형제 일가, 강화도의 양명학자들은 만주 유하현의 횡도촌에 1차로 집결해 독립전쟁의 결의를 다졌다. 같은 해 4월 횡도촌에서 멀지 않은 대고산에 모여 군중대회를 열어 경학사를 결성하고 이상룡을 사장으로 추대했다. 경학사와 그 뒤를 이은 부민단은 만주 한인들의 자치정부였는데, 이상룡은 『만주기사(滿洲紀事)』에서 “정부의 규모는 자치를 명분 삼고/ 삼권 분립은 문명을 본떴네”라고 읊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세울 정부는 군주제가 아니라 공화제라는 지향점을 미리 실천한 것이다.
 
임청각 안의 우물방. 임청각의 독립유공자 9명이 모두 이 방에서 태어났다.

임청각 안의 우물방. 임청각의 독립유공자 9명이 모두 이 방에서 태어났다.

◆망명일기 『서사록』과 무장투쟁의 대부=이상룡이 1911년 망명길에 오르면서 남긴 『서사록(西徙錄)』이란 일기는 ‘지식인의 예언자적 소명’이 무엇인지 잘 말해주고 있다. 이상룡은 일제가 조선사편수회 따위를 만들어 역사왜곡에 나설 것을 미리 알았다는 듯이 그 주요 논리를 미리 논파했다. 한 세기 전의 조선총독부나 지금의 중국 동북공정은 모두 고대 한나라의 식민지였다는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로 비정하는 것으로 역사왜곡을 시작한다. 시진핑이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였다”고 망언한 근거도 이것이다. 그런데 이상룡은 1911년에 이미 ‘한사군=한반도 북부설’을 비판하고 “한사군의 옛터는 모두 요동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안화진에게 답하다(答安和鎭)』)”라고 갈파했다. 경학사에서 세운 신흥무관학교에서 이상룡이 집필한 『대동역사(大東歷史)』를 교재로 국사 교육에 집중한 것도 주체적 역사관이 군사훈련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919년 3·1혁명 직후 서간도 독립운동가들은 정부조직인 ‘군정부(軍政府)’를 만들어 만주 ‘무장투쟁의 대부’ 이상룡을 대표로 추대했다. 그러나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이상룡은 “한 민족에게 어찌 두 정부가 있겠는가”라면서 군정부를 군정서(軍政署)로 낮춰 개편했다. 그렇기에 1925년 임정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탄핵당하고, 2대 대통령이 된 백암 박은식이 대통령제를 내각제의 일종인 국무령제로 바꾼 후 초대 국무령에 이상룡을 추대했을 때 전 국무위원들이 만장일치로 찬성했던 것이다. 임정 기관지 『독립신문』에 만주의 삼부(참의부·정의부·신민부)가 모두 ‘국무령 각하 취임’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전했을 정도였다. 이상룡도 김동삼·오동진·김좌진 같은 군부 출신들을 국무위원으로 선임해 임정 노선을 무장투쟁으로 전환시키려 했다. 그러나 상하이는 무장투쟁의 현장인 만주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대다수 국무위원이 취임할 수 없었고, 이에 따라 이상룡도 1926년 2월 국무령을 사임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군자정 내부.

군자정 내부.

 
◆지워진 국부 이상룡=이상룡은 1932년 5월 12일 지린성 수란현 위서(寓舍)에서 향년 75세로 세상을 떠난다. 아들 준형은 이상룡이 “인생은 다할 때가 있는 것이니 무슨 개의할 것이 있겠는가. 다만 피에 맺힌 한을 풀지 못하였으니 장차 어떻게 선조의 영혼에 사죄하겠는가”(『선부군유사』)라고 한탄하며 서거했다고 전한다. 뒤이어 ‘피에 맺힌 한’, 즉 ‘국토 회복’ 전에는 “유골을 고국으로 안장하지 말라”는 유언도 남겼다. 그러나 가족들은 유해를 고향으로 운구하다가 마적들에 막혀 되돌아왔다. 이상룡의 손주 며느리 허은 여사는 유해가 되돌아온 것을 보고 “이 어른 무슨 영(靈)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고 회고했다. 해방 후 우리 역사가 제대로 흘러갔다면 모두가 존경했던 인격자이고, 임정 수반까지 역임했던 이상룡은 ‘국부(國父)’로 추앙받고, 임청각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산 교육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국부는커녕 뒤늦게 수여한 훈격은 3등급인 독립장에 불과하고, 10명의 서훈자를 배출한 임청각은 아직도 소유권자가 없다. 우리가 바로잡아야 할 역사가 너무 많다.
 
[S BOX] 일제가 철도로 반토막 내고 아직도 주인 없는 임청각
임청각도 주인 못지않은 수난을 겪고 있다. 임청각이 배출한 10명의 독립운동 서훈자들의 항일전쟁 기간을 합산하면 무려 375년이다. 이상룡·준형·병화의 조손(祖孫) 3대가 111년, 동생 이상동 3부자 116년, 봉희 3부자 105년, 종숙 이승화가 43년이다. 만주로 망명한 이상룡 일가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때 등기를 거부했고, 1932년 이상룡 서거 후 아들 준형이 귀국했지만 일제의 호적 취득을 거부했다. 이준형은 임청각을 빼앗길 것을 우려해 문중 4명의 명의를 빌려 등기했는데, 해방 후 4명의 후손이 68명으로 늘면서 문제가 복잡해졌다. 한때 고아원에서 기숙했던 석주의 증손 이항증은 종손인 조카 창수와 10여 년에 걸친 법정소송 끝에 2010년 8월 임청각은 이상룡 직계후손 소유라는 최종 승소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관련 규정이 미비하다는 핑계로 등기가 계속 거부되어 아직도 소유권자가 없는 무주(無主)건물이다. 99칸의 대저택이었던 임청각은 일제가 중앙선 철로를 놓으면서 독립운동의 맥을 끊기 위해 마당을 가로지르는 바람에 50여 칸만 남아 있다. 2019년까지 복원할 계획이 잡혀 있다지만 그 전에 주인부터 찾아주는 것으로 우리 마음속의 철로를 철거함으로써 석주와 그 일문의 한을 일부나마 풀어주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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