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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대남비서傳(1)] 대남비서만 '3수'한 김중린

북한의 대남비서는 대남정책을 총괄하는 자리다. 한 때는 당 작전부(대남 공작원 훈련 및 요인 암살), 35호실(엘리트 간첩 양성), 당 대외연락부(비밀지하조직 구축 및 간첩 관리), 통일전선부(대남공작 및 남북대화 등) 등 4개 기구를 총괄할 정도로 막강했다. 하지만 지금은 초라해졌다. 현재는 대남비서가 통일전선부만 관장하고, 나머지 조직은 2009년 총참모부 정찰국과 함께 총참모부 정찰총국으로 확대 개편됐다. 김영철 대남비서가 개편된 정찰총국장으로 있다가 김양건 대남비서가 2015년 12월 사망한 이후 현재 자리로 옮겼다.
북한은 2016년 5월 제7차 당대회를 마친 뒤 비서국을 없애고 정무국을 신설했다. 그리고 비서 대신에 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호칭하고 있다. 이 연재는 네티즌들에게 익숙한 대남비서로 표기하고자 한다. 출발은 1972년 7·4공동성명 전후로 남북 접촉이 시작될 당시 대남비서였던 김중린부터 시작한다. 그 이전 이효순-허봉학은 남북 접촉이 없었을뿐더러 그들의 대한 자료도 거의 전무하다. 이번 [대남비서傳]을 통해 남북관계사를 조명하고 문재인 정부에서 과거와 차원이 다른 남북관계를 기대해 본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비밀협상
김정일 지시로 아웅산 테러 지휘
하지만 희생양으로 좌천되기도

재일동포 북송으로 김일성에게 인정받아
노동당에서 오랫동안 중요직책 거쳐
김정은 7차 당대회에서 그의 공로 치하

 
 
김중린(1923~2010)은 대남비서를 3차례 역임했다. 첫 번째는 69년 4월~76년 9월, 두 번째는 78년 1월~83년 12월, 세 번째는 88년 11월~90년 1월이다. 대략 13년 정도를 맡았다. 북한의 대남비서 가운데 최장수다. 그는 대남 강경파로 알려진 인물이다. 아웅산 테러 사건을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지휘를 했다.
김중린

김중린

 
김중린은 자강도 우시군 빈농의 가정에서 태어나 해방 이후 46년 평안북도 벽동군 당위원회 부장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우시군은 52년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 이전까지 벽동군 우시면으로 있다가 54년 자강도에 편입됐다. 김중린은 고향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52년 노동당 지도원으로 들어가면서 중요 직책에서 오랫동안 사업을 했다. 54년 조선적십자회 중앙위윈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됐으며 제네바의 국제적십자회에 북한대표로 참석했다. 김중린이 김일성의 ‘눈도장’에 찍히는 것은 재일동포의 북한 귀환에 공을 세우면서부터다. 59년 2월 제네바에서 열린 북·일 적십자회담의 북한 대표로 참석해 성과를 올린 것이다. 김중린은 그 해 12월 재일동포 975명을 소련 선박 클리리온호와 토보르스크호에 태워 일본 니가타항에서 북한 청진항으로 데려왔다.
 
이후 김중린은 승진의 고속도로를 달렸다. 그는 69년 4월 대남공작 실패 등의 이유로 숙청된 허봉학을 대신해 항일 빨치산 장군 출신이 아닌데도 대남비서로 전격 발탁됐다. 냉전 시절에 항일 빨치산 출신이 아닌 사람이 대남비서를 맡기 어려웠다. 앞선 이효순-허봉학은 모두 항일 빨치산 출신들이었다. 김중린은 급기야 70년 11월 제5차 노동당 대회에서 권력 서열 10위로 급부상했다. 10년 전 제4차 노동당 대회의 87위에 비하면 괄목할만한 성장이었다.
 
김중린이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72년 5월 평양을 방문해 그를 만나면서다. 두 사람은 비밀협상을 가졌으며 이후락은 김일성과 그의 동생 김영주 당 조직지도부장을 만났고 두 달 뒤에 7·4공동성명이 발표됐다. 김중린이 김일성과 김영주를 도와 실무작업을 진행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보좌단이 72년 11월 김일성을 방문한 뒤 북한 내각 청사에서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요인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왼쪽부터 한응식, 김덕현, 강인덕 국장, 김중린, 최규하 특별보좌관, 김일, 이후락 부장, 김일성, 장기영 부총리, 박성철, 정홍진 국장, 유장식, 이경석. [중앙포토]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보좌단이 72년 11월 김일성을 방문한 뒤 북한 내각 청사에서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요인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왼쪽부터 한응식, 김덕현, 강인덕 국장, 김중린, 최규하 특별보좌관, 김일, 이후락 부장, 김일성, 장기영 부총리, 박성철, 정홍진 국장, 유장식, 이경석. [중앙포토]

승승장구하던 김중린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김정일이 74년 후계자로 확정되면서 모든 권력기관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두려고 했다. 김정일은 76년 6월 대남 공작부문을 대상으로 집중 사찰을 시작했다. 사찰은 5개월간 지속됐고 김정일은 진행 상황을 하나씩 확인했다. 대남사업을 총괄했던 김중린도 자기비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김정일은 “50년대 이래의 대남공작은 한 마디로 0점”이라고 질책했다. 아울러 김정일은 “과거의 공작 활동은 모두 백지화해야 한다. 새로운 전략 전술적 방침을 가지고 새로운 각오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몰아붙였다.
 
사찰은 다음 해 4월까지 계속됐고 그 결과 김중린 76년 9월 노동당 산하단체인 ‘남조선연구소’의 소장으로 좌천됐다. 김정일이 대남서기를 겸하며 대남공작기관을 지휘했다. 남조선연구소에서 찌그려져 있던 김중린은 78년 1월 다시 대남비서에 복귀했다. 북한은 사람을 한 번 버렸다가 능력에 따라 복귀시키는 경우가 많다.  
 
두 번째 대남비서 시절에는 ‘악역’을 맡았다. 그 악역은 83년 10월 버마 아웅산 테러 사건이었다. 서석준 부총리 등 한국 각료 4명을 포함해 17명이 사망해 세계를 놀라게 한 참극이었다. 아웅산 테러는 감독 김정일, 각본 김중린, 기술감독 김격식 등이 진행됐다. 김격식은 2010년 연평도 포격을 지휘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로 당시 총참모부 정찰국 소속으로 테러를 직접 지휘했다.
 
김중린은 아웅산 테러 사건을 또 다시 ‘물’을 먹었다. 북한은 입을 다문 채 늘 하던 대로 오리발을 내밀었지만 체포된 공작원이 범행을 털어놓으면서 탄로가 났다. 버마 정부가 테러는 ‘북한 부대에 의한 범행’이라고 발표했고 69개국이 북한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북한 내부에서도 아웅산 테러가 자신들의 소행이라는 것이 퍼지면서 누군가 희생양이 필요했다.
 
김중린은 또 다시 정치적 시련을 겪어야 했다. 83년 12월 대남비서를 허담(1929~1991)에게 물려주었으며 84년 3월 정치국 위원에서 후보위원으로 강등됐다. 85년 1월에는 정치국 후보위원마저 탈락됐다. 김정일의 미움이 그 만큼 컸다. 김정일은 아웅산 테러범들이 붙잡혀 범행을 털어놓는 바람에 국제적 망신을 당한 책임을 김중린에게 돌렸던 것이다.  
 
그러나 김중린은 86년 8월 조선중앙통신사 사장으로 복귀했다. 조금 엉뚱했던 임명이었다. 김중린이 대남비서를 ‘3수’를 하게 된 것은 88년 11월이다. 이번에는 고작 1년 2개월 정도였다. 그 이후 그는 90년 1월부터 당 근로단체비서를 맡았다. 근로단체비서는 김일성-김정일주의청년동맹·조선직업총동맹(직총)·조선민주여성동맹(여맹) 등을 지도한다. 노동당 내에서 비중이 떨어지는 부서다. 김중린이 근로단체비서로 언제까지 있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당에서 중요직책을 맡았던 그는 2010년 4월 28일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2016년 5월 제7차 당대회 개회사에서 노동당의 강화발전과 사회주의 위업의 승리를 위해 헌신한 인물로 허담, 연형묵 등과 함께 김중린을 언급했다.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ko.soos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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