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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니 시 '언젠가 가게 될 해변', 최은영 단편 '601, 602' 본심에

 <미당문학상 후보작> 
 
 이제니 - '언젠가 가게 될 해변' 등 15편  
 
 언젠가 가게 될 해변 
  
 해변은 자음과 모음으로 가득 차 있다. 모래알과 모래알 속에는 시간이 가득하다. 시간과 시간 사이로 모래알이 스며든다. 미약한 마음이 미약한 걸음으로. 미약한 걸음이 다시 미약한 마음으로. 너는 너를 잃어가고 있다. 너는 너를 잃어가면서 비밀을 걷고 있다. 노을은 점점 옅어지고 있다. 슬픔은 점점 진해지고 있다. 언젠가 가게 될 해변. 우리가 줍게 될 조약돌과 조약돌이 호주머니 속에 가득하다. 흰 돌 하나 검은 돌 하나. 다시 흰 돌 하나 검은 돌 하나. 휩쓸리고 휩쓸려갈 조약돌의 박자로. 잊어버리고 잊어버리게 될 목소리의 여운으로. 흰 돌 하나 검은 돌 하나. 다시 흰 돌 하나 검은 돌 하나. 미래의 빛은 미래의 빛으로 남겨져 있다. 언젠가 언제고 가게 될 해변. 별이 쏟아질 수도 있는 밤하늘의 저 편으로. 전날의 나무들이 줄줄이 달아나던 들판이 겹쳐 흐를 때. 비밀 없는 마음이 간신히 비밀 하나를 얻어 천천히 죽어갈 때. 물새와 그림자 사이에서. 파도와 수평선 너머로. 저녁노을은 하늘과 땅의 경계를 지우며 색색의 영혼을 우리 눈앞으로 데려온다.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에서 액체가 흘러내린다. 우리는 우리로부터 달아나면서 가까워지고 있다. 그때. 무언가 다른 눈으로 무언가 다른 풍경을 바라볼 때. 그때. 그 밤의 그 맑음을 무엇이라 불러야 했을까. 그때. 그 어둠의 그 환함을 우리의 몸 어디에다 새겨둬야 했을까. 모래 혹은 자갈 속에서. 물결 혹은 물풀 사이에서. 해변은 기억으로 가득 차 있다. 걸음과 걸음은 얼굴과 얼굴을 데려온다. 무한히 전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간이라 부를 때. 그러니까 해변은 무언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어제와 오늘의 구분 없이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음과 물음으로. 물거품과 물거품으로. 언젠가 가게 될 해변. 언제고 다시 가게 될 우리들의 해변. 
 ◆이제니 
 1972년 부산 출생. 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편운문학상 시 부문 우수상.
 
 
 #내가 읽은 이제니 - 조연정 예심위원  
 이제니 시의 변치 않는 특징 중 하나는 반복이다. 최근의 시에서도 이제니는 습관처럼 혹은 강박처럼 같은 단어를 꼭 두 번 씩 겹쳐 말한다. 그래서 이제니의 시를 읽고 있으면 꼭 노래를 흥얼거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런데 그 노래는 어쩐지 슬픈 노래처럼 들린다. 사실 슬픔이란 언어와 운명처럼 동거하는 시인들에게는 익숙한 감정인지도 모른다. 해변의 모래알처럼 수북하지만 결코 손에 쥐어지지 않는, 마침내 제 손을 스르르 빠져나가는 무수한 언어의 더미 속에서, 그 언어로는 세상의 어떤 것도 장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슬프게 인정하고 마는 이가 시인이 아니던가.  
 '한 자락'이라는 시에서 이제니는 “가장 단순한 음으로 가장 깊은 감정에 도달하기를 바랐”다고 말한다. 두 번째 시집에 실린 '나무의 나무'라는 시에서는 “순간의 감정을 대신할 또 다른 감정을 찾기를 포기하라”고 다짐하듯 말한다. 이런 문장들에 이제니 시의 비밀이 들어있는 것 같다. 어떤 말로도 정확히 표현되지 않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면, 즉 언어란 언제나 그것이 가닿아야 할 비밀의 바로 한 발짝 앞에 멈춰서는 것이라면, 가장 단순한 말을 반복해보는 것, 그러니까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해보는 것만이, 어떤 진심을 온전히 표현하기 위한 정공법이 되는 것은 아닐까. 시인은 많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같은 말을 또 하고 또 해보는 사람이다. 확신에 찬 장황한 말을 늘어놓는 사람이 아니라 “미약한 마음”과 “미약한 걸음”으로 무수한 반복의 시간을 통과한 사람만이 진짜 시인이 된다. 같은 말을 꼭 두 번씩 겹쳐 말해보는 이제니는 내가 읽은 가장 진실된 시인 중 한 명이다.   
 
 ◆조연정 
 문학평론가. 평론집 『만짐의 시간』. '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황순원문학상 후보작> 
 
 최은영 - '601, 602'(문학과사회 2017년 봄호)  
 
 엄마는 겸손의 표시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딸을 깎아내리기를 잘했다. 효진이 엄마 앞에서 효진이를 칭찬할 때면 그 칭찬의 번제물로 나의 모자람이 바쳐지곤 했다.
 “우리 주영이는 머리가 안 좋은지 수련장을 풀게 해도 80점을 못 받아요. 효진이랑 맨날 같이 노는데 타고난 머리가 달라 그런지. 벌써부터 이렇게 차이가 지면 나중에 효진이 발끝에도 못 미치겠어요.”
 “가스나가 공불 잘하면 뭐에 씁니꺼. 계집아들은 살림 밑천이라, 그저 조신하게 있다 돈이나 벌고 시집이나 잘 가면 다행 아닙니꺼. 쓸 데 없어예. 아 헛꿈꾸지 말그로 그런 말씀 마시이소.”
 엄마는 저런 엄마 밑에서 자랄 효진이가 불쌍하다고 말했다. 요즘 저런 집이 어디 있느냐고, 딸이 쓸 데 없다고 말하는 집이 어디 있느냐고.  
 나의 아빠는 첫째 아들이었고, 결혼한 지 10년이 지나서도 아들을 낳지 못한 엄마는 친인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늘 은근한 지탄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 잘난 첫째 며느리, 밖에서 일한다고 살림도 소홀히 하고 아들도 낳지 못 하는. 그것이 엄마 이름 김미자 앞에 붙은 무겁고도 끈적이는 수식이었다. 엄마의 일부는 그 수식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엄마의 일부는 그 수식을 수의처럼 입고 있었다. 아들을 낳지 않는 한 벗어버릴 수 없는 무거운 옷. 딸 아들 운운하며 효진이를 깎아내리던 효진이 엄마의 말은 사실상 아들 없는 엄마의 처지를, 아무리 잘 키워봤댔자 그저 ‘가스나’일뿐인 나를 향한 말이기도 했던 것이다.    
 ◆최은영 
 1984년 경기 광명 출생. 고려대 국문과. 2013년 작가세계로 등단. 소설집 『쇼코의 미소』.
 
  
 #내가 읽은 최은영 - 신샛별 예심위원
 많이 달라진 것 같지만 여전히 그대로인 것도 같다. 한쪽에서는 여성이 대통령도 되고 장관도 되는데, 한쪽에서는 단지 여성이기 때문에 폭력과 강간과 살해의 위협에 시달린다. 우리시대 여성이 처한 현실은 이렇게 다르다. 어쩌면 그로 인한 현실 인식의 상호 불일치가 페미니즘과 관련한 각종 오해와 갈등을 낳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성의 현실들 사이에 있는 벽, 최은영의 소설 '601, 602'가 들여다보는 것은 바로 그 벽이다.
 옆집에 살던 경상도 출신인 ‘효진’의 오빠 ‘기준’은 툭하면 여동생을 때렸는데, 효진의 부모는 “오라비가 지 동생 단도리한다”는 식으로 무심히 넘긴다. 친구 효진의 불행에 개입하고 싶었던 ‘주영’이 그 사실을 제 엄마에게 말하자 그녀는 답한다. “피하는 게 현명한 일이라는 걸 너도 알게 될 거야.” 어린 주영의 절망과 분노가 벽 너머 효진의 가족을 향한 것일 뿐 아니라 이웃 여성의 불행을 해결하는 데 무력한 엄마와 주영 자신을 향하게 될 때, 이 소설은 단순한 여성 불행 관찰기이기를 넘어선다. 주영의 어머니 역시 아들을 못 낳은 며느리로서 핍박을 받고 있었으니 이 모녀는 그들의 벽 너머에 있다고 생각한 성차별 폭력의 또 다른 피해자이기도 했다. 여성의 현실들 사이에 있다고 간주되는 벽은 실상 얼마나 허술한 것인가.
 최은영은 성차별적 환경에 적응·순응하며 살아남은 여성에게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었던 삶을 돌아보게 만들고, 살아남은 자로서의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끼도록 유도한다. 이 소설은 대한민국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는 데 성공한 여성들이 뒤늦게 시작한 용기 있는 고백의 한 모델이다.
 
 ◆신샛별
 동국대 국문과 졸업. 동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201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평론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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