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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위기설과 두 편의 영화

유주열 전 베이징 총영사·㈔한중투자교역협회자문대사

유주열 전 베이징 총영사·㈔한중투자교역협회자문대사

-  김정은의 선택-
 중국은 쌍중단(雙中斷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과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을 주장하고 있지만 을지프리덤가디언(UFG) 연습이8월 21일부터 시작되었다. 미국은 “강력한 대북군사력”을 언급하며 “김정은이 옳은 선택을 하기를 바란다”고 경고했다.  
 북한은 기다렸다는 듯이 “올바른 선택을 하라는 우리의 경고를 무시하고” “군사적 도발을 걸어 와 징벌의 소나기를 퍼부을 수 있게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대기상태”라고 위협하고 있다.
 8월의 위기설은 8월의 폭염을 더욱 뜨겁게 한다. 극장가에도 8월의 열기처럼 뜨거운 두 편의 영화가 화제다. 40대 젊은 감독의 미영 합작 영화 ‘됭케르크’와 한국 영화 ‘군함도’이다.  
 크리스토퍼 놀런(47) 감독의 ‘됭케르크’는 1940년 5월 됭케르크의 철수의 역사 현장을 1억불의 제작비로 실감 나게 보여주고 있다. 아이맥스 스크린은 관객을 현장에 끌어넣어 실감을 더 하고 있다.  
 류승완(43) 감독의 ‘군함도’는 220억 원의 제작비 중 70억 원을 군함도 실물과 비슷한 세트장 만드는 데 사용될 정도로 현장감이 뛰어났다. 영화를 통해 군함도 내 탄광의 열악한 환경을 사실적으로 보여 주어 징용된 조선인 노역자의 고통이 관객에게 그대로 와 닿는다. 후반에는 독립군 출신의 영웅이 나타나 실제 없었던 징용된 조선인을 집단 탈출시키는 액션 영화로 바뀌었는데 이것이 역사 왜곡의 논란을 불러왔다.
 
 ‘모래언덕 위의 교회’
됭케르크 철수는 2차 세계대전 초기 서부전선에서의 다이너모 작전(Operation Dynamo)으로 1940년 5월 26일 시작하여 6월 4일 끝난 전쟁이다. 다이너모(발전기) 작전은 도버 성 지하의 발전실에서 작전이 보고되었다고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됭케르크는 칼레와 가까운 프랑스 최북단 해안으로 벨기에 국경과 인접해 있다. 현지어로 ‘모래언덕(dune)위의 교회(kerke)’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4년 후인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있었던 노르망디는 됭케르크보다 훨씬 남쪽 해안으로의 파리와 가깝다. 노르망디는 영국 해안에서는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파리 탈환을 목표로 한 상륙작전이었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2차 세계대전은 1940년 5월 독일이 서부전선을 돌파하자 영국은 원정군을 파견 프랑스군을 지원하지만 오히려 독일군의 측면 공격을 받아 연합군이 양분된다. 프랑스 육군은 북부에서 포위되고 영국 원정군과 일부 프랑스군은 도버 해협의 됭케르크 쪽으로 밀린다.
 
 윈스턴 처칠과 ‘됭케르크 정신’  
 네빌 체임벌린이 사임으로 국왕 조지 6세로부터 1940년 5월10일 수상으로 임명된 윈스톤 처칠은 됭케르크 철수를 명령한다. 독일군은 영국군이 탈출하기 전에 항구를 점령 영국과 프랑스군을 포위하여 항복을 받거나 섬멸코자 하였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났다. 태풍처럼 몰아붙이던 독일군의 전차대가 진격을 정지한 것이다.  
 미스터리 같은 기적이 2차 세계대전의 향방을 갈랐다. 독일군이 계속해서 진격했다면 연합군은 괴멸하였을지도 모른다. 왜 진격이 정지 되었을까? 이에 대한 역사가들의 해석이 분분하다. 히틀러가 다음해 계획하고 있는 동부전선(소련침공)에 대비 전차 부대를 아끼기 위해 괴링 공군장관의 호언장담을 받아들여 공군력에 의존했다는 설도 있다.
 처칠 수상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의 호소에 수백 척의 민간선박이 자발적으로 동원되어 33만 명의 영국군의 철수가 성공하였다. 영국인은 단합을 호소할 때는 ‘됭케르크 정신’을 말한다. 지난해 영국의 브렉시트(EU 탈퇴)도 ‘됭케르크 정신’을 믿고 있었는지 모른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됭케르크 인연  
  영국인의 아버지와 미국인의 어머니 사이에서 런던에서 태어나 장성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영국 해안에서 40km 가까이 떨어진 됭케르크 해안을 아내와 함께 가끔 요트를 타고 놀러 가면서 기적의 됭케르크 철수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놀란 감독은 노르망디 작전과 달리 됭케르크 철수에 대해서는 허리우드 대작이 없는 것은 미국 사람들의 무관심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됭케르크 철수작전 당시 미국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전이었기에 미국 사람들에게는 모르는 전쟁이었다. ‘인셉션’ ‘인터스텔라’ 등 많은 영화에 성공한 놀란 감독은 허리우드 영화사를 움직여 영화 ‘됭케르크’를 만들었다.
됭케르크는 전쟁 영화라기보다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더라고 다른 사람을 살리겠다는 휴머니즘이 물씬 풍기는 영화이다. 당시 상황을 지상에서 바다에서 공중에서 에피소드 스타일로 단편적으로 소개하였기 때문에 전체 그림을 알 수 없는 것이 흠이다. 영화만 보아서는 33만의 군인들이 철수되었다고 믿기지 않는다. 인도에서는 철수 당시 인도 군인 2만 명이 철수 작전에 참여했는데 영화에는 인도 배우 한사람 안 나왔다고 항의마저 있었다.
 
 영화 ‘군함도’의 양면성
 류승완 감독은 영화 군함도를 통해 조선인이 강제 징용된 군함도의 역사를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제작비를 아끼지 않고 군함도 세트장을 만든 것도 열악한 환경을 영상을 통해 고발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스펙타클한 영상으로 집단 탈출극이 나온다. 강제 징용의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징용자를 말살하려는 일본 측의 기도를 미리 알고 총격전을 통해 일본 경비병을 죽이고 징용자들을 석탄 운반선에 태워 집단탈출 시킨다.  
 역사 왜곡이며 ‘상상적 한풀이’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역사를 다루는 영화가 기록대로 그려진다면 다큐멘터리를 보면 되지 굳이 영화를 볼 필요가 있겠느냐며 영화는 영화로 즐기면 된다면 의견도 있다. 영화는 투자자를 고려한 상업성이 있어야 한다고도 말한다.
 
 군함도 역사 탐방
 군함도는 2차 세계대전 중 최대 800명의 한국인(조선인)이 강제 징용되어 해저 1000m의 심해탄광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고 희생된 곳이다. 일본은 중일전쟁 발발 후 1939년 강제징용령을 내렸다. 1939년부터 전쟁이 끝나는 1945년까지 140만의 젊은 한국인이  일본 전역에 강제 징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지난 해 군함도를 탐방할 기회가 있었다. 군함도는 1890년 일본의 재벌회사 미쓰비시(三菱)가 채광을 시작하였고 1916년경에는 콩크리트 방파제를 만들고 광부는 물론 석탄 채광 관련 사무인력과 그 가족을 거주시키기 위해 일본 최초의 철근 콩크리트 고층 아파트를 지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 채광하였으나 기름과 가스가 에너지 공급원으로 대체되자 1974년부터 완전히 폐광되면서 지금은 무인도로 남아있다. 일본 규슈의 나가사키에서 18.5 km 떨어진 군함도를 관광선을 타고 가까이서 보았을 때 미국 샌프란시스코 앞 바다에 떠 있는 감옥섬 알카트라즈가 연상되었다. 군함도 근처는 파도가 심해 탈출하였다 해도 살아남기 어려워 한번 들어가면 나오기 어려운 실제 감옥섬이었다.
 관광 선박으로 섬 가까이 가도 파도가 높아 상륙을 못할 때도 많다고 한다. 우리 일행이 갔을 때는 다행히 날씨가 좋았다. 다년간 폐허로 방치되어 건물 붕괴의 위험으로 극히 일부만 관람이 허용되었다.
 군함도는 본래 지금의 섬보다 1/3 정도의 작은 섬이었다. 이름 그대로 나가사키 반도의 작은 끝섬(端島 하시마)이었다. 그러나 석탄이 발견되자 인근 바다를 매립하여 3배로 키웠다고 한다. 철근 콩크리트 고층 건물에 방파제가 휘둘러 싸고 있어 멀리서 보면 일본 군함의 실루엣을 보여주어 1930년대에 군함도(軍艦島 군칸지마)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섬 전체는 20만평 정도로 여의도의 1/5 정도 밖에 안 된다. 군함도는 식물이 살지 않은 섬으로 풀포기 하나 찾아 볼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1960년대까지 탄광도시로 사람이 많이 살았으나 가스 석유가 일반화 되면서 석탄수요가 줄어들자 폐광이 되었다. 지금은 사람이 모두 떠나고 버려진 아파트 건물만 남아 있다.
 2년 전 일본 정부가 신청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목록에 일본 근대산업유산의 하나로 버려진 상태(abandoned)의 군함도가 포함되면서 세계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열악한 해저탄광의 실태와 함께 조선인의 강제 징용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됭케르크 정신과 군함도의 징용자  
 “저는 오늘 비극적인 사실을 말하려고 합니다. 유럽은 히틀러에게 굴복되고 다음 차례는 영국입니다. 저는 국민에게 해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국민에게 요구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영국인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입니다. 앞으로 기나긴 투쟁의 시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어려운 대가를 치루더라도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독일이 영국과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서부전선이 돌파되자 대독 유화론(appeasement)을 고수하던 체임벌린 수상이 사임하고 뒤를 이은 윈스턴 처칠의 취임 후 3일 만인 1940년 5월13일에 나온 연설문 요약이다.  
 핵과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개발을 성공시켰다고 주장하는  북한 김정은에 의해 촉발된 8월의 위기설 속에서 영화 됭케르크와 군함도를 보면 처칠의 ‘됭케르크 정신’과 ‘군함도의 징용자’ 모습이 오버랩 된다. “나라를 잃으면 ‘군함도의 징용자’가 되는 것이야!“ 어느 관객의 말이 귀에 맴 돈다.  
 ‘됭케르크의 정신’은 영국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많은 희생을 각오하면서 항복을 거부하고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정신이다. 영국과 달리 독일에게 항복한 프랑스는 배상금 지불은 물론 150만 명의 프랑스인이 나치 독일에 강제 징용되어 희생된 치욕을 겪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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