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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평화는 이미지가 없다

이건용 작곡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이건용 작곡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전쟁과 관련된 이미지는 많다. 오렌지빛으로 솟아오르는 핵 구름, 건물들이 무너져 내린 거리, 독재자의 주먹 쥔 손과 그 밑에 나무 인형들처럼 행진하는 군대, 불타는 집과 공포에 떠는 아이, 철조망과 탱크와 총칼, 구멍 뚫린 철모···.
 
전쟁을 그린 음악도 쉽게 떠오른다. 차이콥스키가 나폴레옹의 침공과 러시아의 승리를 묘사한 ‘1812년 서곡’, 900일 동안 나치 독일에 포위되었던 도시 레닌그라드에서 쇼스타코비치가 작곡한 ‘교향곡 7번’, 벤저민 브리튼이 쓴 ‘전쟁 레퀴엠’ 등이 먼저 손꼽힌다. 전쟁을 쉽게 연상시키는 음악 소재들도 있다. 긴장감이 도는 타악기의 리듬, 강렬한 금관악기의 소리, 날카로운 불협화음, 온갖 주제와 동기들이 뒤섞이며 충돌하는 짜임새 등. 위의 곡들은 이러한 음악의 이미지들을 십분 활용해 전쟁을 묘사한다.
 
평화의 이미지는 어떤가? 올리브 가지를 입에 문 비둘기? 그 상징을 보고 평화를 연상하는 이가 얼마나 될는지 모르겠다. 어떤 이는 밀레의 ‘만종’이 평화를 잘 보여준다고 하는데 그 종이 저녁기도 시간을 알리는 것이고 보면 오히려 기도·묵상·감사 등의 이미지가 더 많지 않나 싶다. 어머니 품에 잠든 아기 모습? 숲과 호수가 있는 풍경? 부분적으로는 맞지만 각각 모성애, 깨끗한 자연이 같이 연상된다. 평화가 주된 테마 중의 하나인 세계 종교집회에 스태프로 참가한 적이 있었는데 여기서도 평화를 나타내는 이미지가 무엇인가를 놓고 길게 토론했다. 마지막에 야생화가 가득한 들판으로 이미지를 정했는데 온갖 생물이 아무런 제약 없이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모습이 평화에 제일 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평화’라는 말은 음악 작품에서 비교적 자주 나온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는 구절이나 “주여, 평화를 주소서”라는 구절은 기독교나 미사곡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친숙하다. 그 단어를 표현하는 상투적 표현도 있다. 많은 작곡가가 ‘영광’을 표현할 때는 높은 음, 강한 소리, 빠르고 장식적인 움직임을 동원하는 반면 ‘평화’를 표현할 때는 긴 음표, 여린 소리, 부드러운 움직임을 선호한다. 그러나 역시 작곡가마다 들쭉날쭉해서 어떤 이들은 미사곡의 마지막 단어 ‘평화(pacem)’를 웅장하게 표현해 곡의 대미를 장식하기도 한다.
 
나에게 평화의 이미지를 자유롭게 연상하라고 맡긴다면? 아이들이 뛰노는 초등학교 운동장, 강변 풀밭에 나와 앉은 가족이나 사람들을 떠올린다. 마당의 평상 위에 앉아 나누는 뜬금 없는 담소, 그때 올려다 보이는 별들, 평상 옆의 모깃불에서 타는 쑥 냄새, 셀카를 찍는 연인들···. 이렇게 열거하다 보면 끝이 없다. 아마 다른 이에게 맡기면 그 역시 수없이 열거하리라. 나와는 다른 이미지들을.
 
왜 야생화의 들판뿐이겠는가? 유채꽃이 한창인 남녘의 들판이나 튤립 가득한 원예농장은 어떤가? 사람의 손길이 닿은 인위적 경작이라고 평화의 이미지가 못 되는가? 밀밭과 논은? 농부의 구슬땀을 상기시키긴 하지만 그것이 왜 평화의 그림이 아니란 말인가? 추수 때의 황금 들판을 생각해 보라.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모습이 실은 평화가 허락해준 것이다. 아이들이 있는 초등학교의 그림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끼리의 한가로운 시간뿐 아니라, 머리 깎은 아들을 군대에 보내면서 눈물짓는 어머니도, 전쟁을 묘사한 음악 작품도, 심지어 병영에서 보내는 병사들의 일상도 평화의 그림일 수 있다. 전쟁이 이를 무너뜨리고 짓밟고 학대하기 전까지는.
 
평화의 이미지는 따로 없다. 전쟁이 없는 모습이 평화의 그림이다. 유럽으로 가려다가 길이 막히자 시리아에서 온 한 난민 소년이 외쳤다. “저도 유럽에 가기 싫어요. 시리아에서 살고 싶어요. 그저 전쟁만 그쳐 주세요.” 그러고 보면 60여 년 동안 일촉즉발 휴전 상태를 지켜온 한반도의 비무장지대(DMZ)야말로 가장 절박하게 평화를 보여주는 이미지겠다.
 
이건용 작곡가·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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