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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기의 시시각각] 벌꿀오소리<스티브 배넌>의 최후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벌꿀오소리. ‘지구상에 가장 겁 없는 동물’로 기네스북에도 올라 있다. 길이 60cm, 무게 10kg의 자그마한 체구지만 성질이 포악해 웬만한 맹수들도 피한다. 코브라 머리를 물어뜯다 독이 퍼져 기절했다가도 한두 시간 후에 다시 일어나 남은 몸통을 아무렇지 않게 먹는다. 이빨이 강하고 턱이 억세서 거북이까지 잡아먹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포유류다. ‘개념 없는 초원의 깡패’로 불린다.
벌꿀오소리

벌꿀오소리

 
백악관 수석전략가 스티브 배넌의 신조가 바로 “벌꿀오소리는 개의치 않는다”였다. 배넌 추적기 『악마의 협상』을 쓴 조슈아 그린 블룸버그 기자는 “어떤 권력이나 압력에도 맞서겠다는 불굴의 의지를 벌꿀오소리에 빗댄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런 배넌이 18일 전격 경질됐다. 인터뷰에서 “수전 손턴 국무부 동아태차관보 대행을 국무부에서 쫓아낼 것이다. 그들은 지금 두려움에 오줌을 지리고 있다” “대북 군사 해법은 없다”고 호언장담한 지 정확히 43시간 만이다.
 
경질 하루 전 미 국무부에서 열린 미·일 외교·국방장관 회담은 ‘내전’의 결말을 예고하는 자리였다. 회담장에 들어선 틸러슨 국무장관은 의자에 앉으려다 누군가를 발견하곤 단숨에 다가가더니 활짝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무뚝뚝하기로 소문난 틸러슨의 깜짝 행동에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상대방은 손턴 대행. ‘벌꿀오소리’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기쁨을 나누는 순간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그가 경질한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 [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그가 경질한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 [AP=연합뉴스]

 
국수주의자 배넌은 국무부·국방부의 ‘반(反)아메리카 퍼스트’ 노선이 맘에 들지 않았다. 석유회사 엑손 출신인 틸러슨은 장관 취임 후 정통 외교관 중 손턴을 가장 높게 평가했다. 그래서 지난 3월 그녀를 핵심 보직인 동아태차관보로 천거했다. 하지만 배넌은 손턴이 ‘글로벌 경제’의 상징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5개월 넘게 결제를 막았다. 대신 보수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의 올린 웨싱턴(전 재무부 관료)을 밀었다. 주한 대사로 물망에 오른 빅터 차 CSIS 한국석좌에 대해 이렇다 할 발표가 나지 않고 있는 배경에도 배넌이 거론된다. 빅터가 대선 전 힐러리의 최측근 참모 제이크 설리번과 워싱턴포스트에 공동기고를 했던 사실을 문제 삼고 있다는 말도 있지만 단지 배넌이 “틸러슨 추천 인사는 안 된다”며 시간을 끌었다는 분석도 만만치 않다.
 
그런 점에서 배넌의 퇴장은 외교 및 백악관 질서의 정상화를 가져올 전환점이 될 것이란 기대가 나온다. ‘차관보 대행’ ‘주한 대사대리’의 꼬리표도 곧 사라질 공산이 크다. 켈리 비서실장-맥매스터 국가안보보좌관의 온건합리파가 백악관을 장악하고, 국무·국방장관의 활동 영역이 넓어지면 우리로선 나쁠 게 없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배넌이 트럼프를 만든 게 아니란 점이다. 트럼프가 고용했다 해고했을 뿐이다. 앞으로도 ‘트럼프의 미국’은 큰 변화가 없을 것이란 얘기다. 앞뒤 가리지 않는 무개념 벌꿀오소리를 자처한 배넌은 결국 상위 먹이사슬이자 천적인 표범(트럼프)에 의해 최후를 맞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트럼프와 앞으로 계속 머리를 맞대고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트럼프조차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 대북한 ‘레드라인’을 돌연 우리 대통령이 특정해 선언했으니 ‘대사건’이다.
 
묻고 싶다. 북한이 조만간 핵탄두 미사일을 실전배치한 뒤 “자, 우리 이제 레드라인을 넘었는데 어떻게 할래”라고 물어온다면 뭐라 답할 것인지. 즉흥적 답변 과정의 실수로 생각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준비된 답변 같아 더 불안하고 더 불길하다. 혹시 우리 정권에도 ‘개의치 않는’ 벌꿀오소리가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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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