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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늦여름 텃밭에서

송호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

송호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

텃밭 가꿔 본 사람은 안다. 늦여름 텃밭이 얼마나 심란한가를. 상추와 쑥갓을 빼먹은 자리에 허락 없이 침입한 잡초들이 아우성이다. 봄에 심은 야심작들은 더위에 지치고 덩굴에 휘감겨 혼이 비정상이다. 이름도 근사한 명아주가 비닐 틈새를 뚫고 군집을 이뤘다. 가장자리에서 발진한 한삼덩굴은 고추 목을 휘감고 늙은 가지 열매를 향해 진격 중이다. 갈아엎기는 뭔가 아쉽고, 단장하기에는 품이 아까운 늦여름의 텃밭.
 

과거 보수 정권이 유기한 과제들
새 정부 인기의 8할은 반사이익
노무현 정권은 설화<舌禍> 입었다
곧 찬바람 불고 서리 내릴 것
설화<雪禍>를 견딜 지적 체력 고민해야

그랬을 거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100일 전 한국 사회의 꼴이 말이다. 잡초 밭이었다. 생장이 빠른 푸성귀는 아예 주저앉았고, 정겨운 채소류는 손길을 기다리다 시들어 죽었다. ‘국민행복 농장’이란 팻말은 뽑혔다. 정상을 비정상으로 만들어 놓은 5년 허송세월의 손실은 컸다. 잡초를 뽑고 덩굴을 제거한 그 자리에 더러 뒤늦은 파종도 했다. 새로 심을 작물 구상도 대충 마쳤다. 숨 가쁘게 달려온 문재인 정부 100일, 이렇게 빠르게 한국 사회를 정상 복구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행복이란 말을 하지 않아도 ‘이니와 쑤기’의 수수한 행보에서 국민들은 뭔가 달라졌음을 느낀다. 맹골수로와 광주의 원혼을 달래고 가습기 희생자를 품었다. 그것이 연출이라도 독립운동 지사들을 환기시켰고 수장된 연평해전 용사들을 추모했다. 영국 처칠 총리가 아닌 다음에야 통치자의 말과 행동은 거의 연출된 것이다. 트럼프의 거친 언사도 연출을 거쳐 나온다. 거기에 진정성이 실리면 통치력은 상승한다. 문재인 정부 100일이 그랬다. ‘정의와 공정’ ‘정상(正常)과 균형’에 다가서려는 노력이 ‘과거의 기억’을 부식하기에 충분했다.
 
야당이 되면 발목 잡기 본능이 발동하기 마련이지만, 멧돼지 가족이 휩쓴 듯 망쳐버린 농장 주역들이 날리는 멘트는 오히려 실소(失笑) 그 자체다. ‘역대급 안보 무능정권’이라 말할 자격이 있을까? 그럼 ‘욜로(YOLO) 정권’이 아니라서 그리 인색했는가? 아동·보육수당과 기초연금을 올리고, 의료 부담을 낮춘 복지개혁은 이른바 ‘뒤늦은 파종’이다. 땜질에 불과하다. 10년 전 좌초했던 친노그룹은 스스로 ‘폐족’을 선언하고 자중했다. 적폐 목록이 있다면 1호에 오를 친박(親朴)들이 구조 시그널을 간간이 타전하며 환절기를 고대하는 모습은 환멸이다. 그 닳고 닳은 언어 속에 보수의 가치와 철학은 익사한 지 오래다.
 
문재인 정부 100일간의 행보는 사실상 보수정권의 몫이었다. 조마조마함을 자아내는 추미애 민주당 대표가 한 말 중에 그래도 사줄 만한 ‘명예과세’ 개념은 보수 전용이다. 사회 현실이 개인 능력을 꼼짝없이 가둔다고 판단될 때 보수는 ‘자조론’에서 지배계급의 책임으로 선회한다. 자유경쟁의 원칙, 그 새무얼 스마일스(Samuel Smiles)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전환하는 것이다. 야당이 싸잡아 비난하는 5년 178조원 국책사업들은 세계 11위 경제대국이 진즉 완료했어야 할 보수의 책무였다. 청년수당은 최소한의 생존비용, 병사급여 인상은 철통안보 독려용, 실업급여 강화는 가족보호 자구책이다. 사회 안전망의 기초 다지기에 불과한 이런 조치들은 결코 혁신이 아니다. 보수정권의 미온적 변명 속에 유기된 과제다.
 
여기서 우려가 발생한다. 문재인 정부가 누리는 고공 인기의 8할은 반사이익이다. 지난 17일, 조율 없는 개방식 기자회견이 모처럼 신선했다고 자부할 때가 아니다. 기자들의 상식적 질문에 응대한 대통령의 답변 역시 그 신선함에 한참 못 미쳤다. 유일한 송곳 질문은 CNN 기자로부터 나왔다. ‘한반도 전쟁불가’를 못 박은 문 대통령의 단언과 ‘전쟁불사’를 외치는 트럼프 대통령 사이의 미묘한 갭을 ‘걱정 말아요, 그대’로 메꿨다. 이 ‘미묘한 갭’에서 춤추는 김정은을 저지할 논리를 외교 스태프들은 아직 개발하지 못했다. 어렵기는 하다. 진행 중이지만 국민을 감시하고 통제한 권력을 어떻게 바꾸는지 알지 못한다. 정권의 높은 의지는 알겠는데, 노사(勞使) 및 시민사회와의 공정한 합작은 아직 오리무중이다. 촛불 들고 외칠 권리가 언제나 신성한 것은 아니다.
 
청와대 행정관 탁현민은 단막극의 대가다. ‘대국민 보고’는 그냥 백일잔치, 광화문 1번가에 출연한 각료들이 고민할 쟁점은 큰 그림이다. 국장급이 다룰 소소한 의제 속에 미래 행보를 가늠할 지적 역량은 보이지 않았다. 정부의 질주가 돋보이는 가운데 강성노조는 활갯짓, 대기업은 침묵, 시민단체는 기회를 엿본다. 대통령은 역대급 탕평인사라고 했다. 각료 중 캠프 출신이 상당수고, 비서관 10명 이상이 전대협·운동권 배경임을 누구나 다 안다.
 
노무현 정권은 설화(舌禍)를 입었다. 계절이 바뀌면 개수한 텃밭에 찬바람 불고 서리가 내릴 것이다. 설화(雪禍)를 견딜 지적 체력을 고민해야 한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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