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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90페이지 보고서’ 읽고 계란 구매하라는 대형마트

전영선 산업부 기자

전영선 산업부 기자

일부러 골탕을 먹이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살충제 계란 파동 시작 이후 계속 드는 생각이다. 15일 사태 시작 이후 어떤 계란이 문제가 되는지에 대한 정부 입장은 수시로 변했다. 적합 판정을 받은 뒤 유통을 재개한 계란을 다시 검사하니 살충제 성분이 나오기도 했다. 결국 불안감이 크다면 달걀을 끊거나, 진짜 괜찮은지 소비자가 직접 알아보는 수밖에 없다.
 
유통업체도 제대로 된 정보를 알릴 의지가 없어 보인다. 문제가 생기면 쉬쉬하기에 바쁘다. 초기 경기도 계란에서 성분이 검출되자, “대형 농장과 협력하고 있고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어 다르다”고 장담했던 대형마트 3사의 계란에서도 기준치를 초과한 살충제 계란이 줄줄이 확인됐다.
 
특히 이마트는 광주 일대에서 팔린 전남 나주의 ‘가남 청정농장(13 SCK)’의 계란을 환불해주고 있다. 안내문에는 ‘살충제 잔류조사에서 부적합 판정을 받은 계란’이라고 돼 있지만, 무엇이 검출됐는지 자세한 설명은 생략돼 있다. 이 농장의 계란에서는 피프로닐 성분이 검출됐다.
 
피프로닐은 닭 등 식용 가축에 쓸 수 없는 맹독성 살충제다. 계란 판매가 중단되었을 당시 이마트는 전국 매장에 ‘이마트 협력 농장은 대규모 농장으로 피프로닐 살충제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안내문이나 현수막을 설치했다. 며칠 뒤 협력 농장에서 이 성분이 검출돼 부적합 판정을 받자 안내문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살충제 계란 파문이 일고 있는 가운데 지난 16일 서울 서초구 농협하나로마트 양재점을 찾은 소비자가 정부의 검사결과 적합판정을 받고 판매를 재개한 계란에 대한 안내문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뉴시스]

살충제 계란 파문이 일고 있는 가운데 지난 16일 서울 서초구 농협하나로마트 양재점을 찾은 소비자가 정부의 검사결과 적합판정을 받고 판매를 재개한 계란에 대한 안내문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뉴시스]

각 온라인 사이트에서도 제대로 된 정보를 얻기 힘들다. 21일 이마트 온라인 주문 사이트에 ‘국내산 일판란 30’이라는 제품의 사진 밑엔 A4 용지 90여장 분량의 ‘식용란 살충제 검사보고서’가 올라와 있다. 이마트 측이 팩스 등으로 받은 각 농장의 검사 결과를 스캔하거나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은 것으로 보인다. 매장마다 비축하고 있는 계란의 ‘출생지’가 다르다는 이유에서 거래하는 모든 농가의 보고서를 찍어 올린 것이다.
 
소비자가 농장 이름을 직접 파악해 배달된 계란과 대조해 보라는 얘기라 한숨이 나온다. 인내심이 필요한 작업인 것은 둘째치고, 보고서의 이미지를 확대할 수도 없는데 글자가 흐릿해 읽기도 힘들다. 한마디로 있으나마나한 정보다.
 
적합 판정을 받은 검사 보고서를 공개했으니 떳떳하다고 여길 수 있다. 진짜 소비자에게 알릴 의지가 있다면, 좀 더 알아보기 쉬운 형태로 가공해 전달해야 했다. 또 적합판정을 받은 협력 농가의 검사 보고서가 아닌, 부적합 판정을 받은 계란에 대한 정보를 공개했어야 한다. 이런 형태의 정보 제공은 책임을 면하기 위한 제스추어로 밖에 보이질 않는다.
 
롯데마트에는 그나마 이런 정보조차 없다. ‘롯데마트 계란 안심하고 드세요’라는 제목의 3줄짜리 안내문이 전부다. 어느 농장 계란인지는 생략했다. 각 매장마다 보유하고 있는 계란이 다르기 때문에 무엇이 배송될 지 알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항생제 유무와 같은 정보를 담은 스티커 샘플은 저해상도 사진으로 찍어올렸다. 소비자가 깨알 같은 크기의 글씨를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 놀라울 따름이다.
 
살충제 계란 파동과 수습 단계에서의 혼란은 정부 잘못이 크다. 검사를 엉터리로 한 것도 모자라 살충제 계란 유통과 이력 관리에도 실패했다. 하지만 불리한 정보를 숨기기에 급급했던 유통업체도 면책 대상은 아니다. 
 
전영선 산업부 기자 az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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