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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직면하고 역사 속으로 뛰어든 우리 시대의 얼굴

[CRITICISM] 세 번째 1000만 영화 … ‘평범한 히어로’ 송강호
송강호가 세 번째 ‘천만 영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 ‘괴물’(2006, 봉준호 감독) ‘변호인’(2013, 양우석 감독)에 이어 지난 8월 2일에 개봉된 ‘택시 운전사’(장훈 감독)도 주말이 지나면 전국 관객 1000만 명을 돌파할 듯하다. 600만 명대였던 ‘사도’(2014, 이준익 감독), 700만 명대였던 ‘밀정’(2016, 김지운 감독), 900만 명대였던 ‘관상’(2013, 한재림 감독)과 ‘설국열차’(2013, 봉준호 감독)…. ‘흥행불패’의 신화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괴물·변호인·택시운전사 초대박
사도·밀정·관상 등도 600만 이상

20년 가까이 슬럼프 없이 전성기
흥행 불패 진면목 이제 시작인 듯

우리 시대가 한동안 잃어버렸던
기초적 가치 일깨운 캐릭터 연기

 
배우의 성취를 오로지 숫자로 환산할 순 없지만, 때론 그 숫자가 많은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송강호가 최근 거두고 있는, 단 한 번의 실패도 없는 흥행의 연대기는 이 배우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20년 전 ‘넘버 3’(1997, 송능한 감독)로 얼굴을 알린 그는 2000년대 박찬욱·김지운·봉준호 등의 감독을 만나며 만개했고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가 됐다. 20년 가까이 전성기인, 슬럼프 없는 배우? 하지만 그의 진면목은 ‘쉰 즈음’이 된 요즘의 행보 아닌가 싶다.
 
시작은 ‘관상’이었다. 사실 이 시기 직전에 송강호는 잠시 주춤했다. ‘푸른 소금’(2011, 이현승 감독) ‘하울링’(2012, 유하 감독) 등 새로운 장르를 통해 변신을 꾀했지만 대중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이때 그는 계유정난 시기를 살던 관상가 김내경이 되면서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는 ‘변호인’에서 고 노무현 대통령이 모델인 송우석이 되고, ‘사도’에서 영조가 되고, ‘밀정’에서 일본 경부 이정출이 되고, ‘택시 운전사’에서 1980년 광주의 택시 운전사 김만섭이 된다.
 
 
역사·이념 관심 없던 인물의 변화 연기
‘사도’를 제외하면, 이 캐릭터들은 흥미로운 패턴을 반복한다. 첫째, 그들은 자신의 이해 관계에 충실한, 역사나 이념에 대한 이렇다 할 인식을 지니지 않은 인물들이다. ‘관상’의 김내경은 역적 집안 출신. 초야에 처박혀 있었지만, 관상 보는 재주로 집안을 일으키고 부와 명예를 누리려 한다. ‘변호인’의 세무 전문 변호사 송우석은 돈 많이 버는 게 삶의 목표이며 그런 점에서 꿈을 이루었다. 자신이 구입한 요트로 올림픽에 참가한다는 꽤 거창한 야망도 있다. 한때 임시정부 요원이었던 ‘밀정’의 이정출은 일신의 영달을 위해 변절해 일본 경찰이 되었다. ‘택시 운전사’의 김만섭이 서울에서 광주로 간 건 10만원이라는 거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 돈이 필요했던 그는 동료의 일거리를 빼앗았다.
 
둘째, 그들은 변화의 계기를 겪으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역사의 흐름 속으로 뛰어든다. 김내경은 수양대군(이정재)의 역모를 막으려 한다(계유정난). 송우석은 국밥집 아들 진우(임시완)의 변호를 맡는다(부림 사건). 이정출은 이중첩자가 되어 의열단을 돕는다. 그리고 ‘택시 운전사’의 김만섭은 서독에서 온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토마스 크레취만)와 한 팀이 되어 1980년 광주의 한복판으로 간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들은 관념이 아닌 현실의 각성을 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누군가의 말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갑자기 떠오른 영감 등에 의해 변화되는 인물이 아니다. 실제 캐릭터를 토대로 하든 허구적 창조든 송강호의 ‘역사적 인물’들은 직접 목격하고, 이것은 그들의 삶을 바꾸는 강력한 모티브가 된다.
 
변호인

변호인

관상가 김내경은 수양대군의 얼굴을 직접 본 후에 그가 왕위를 찬탈하는 걸 막아야겠다고 결심한다. 명백한 역적의 상이었기 때문이다. ‘변호인’의 송우석은 진우의 몸에 든 퍼런 멍들을 발견하고, 사실 그 결과가 모두 정해져 있는 시국 사건의 법정에 선다. 이정출은 의열단장 정채산(이병헌)을 대면한 후 마음을 정한다. 그러나 일은 틀어지고 그는 체포되는데, 풀려난 그가 폭탄 테러를 감행하게 된 건 싸늘하게 식은 연계순(한지민)의 시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데모 하려고 대학 갔냐”던 ‘택시 운전사’의 김만섭은 그들과 광주 시민들이 겪는 무자비한 폭력을 생생하게 접한 후에 사선을 넘나드는 여정에 나선다.
 
그렇다면 ‘설국열차’도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SF지만 이런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송강호가 맡은 캐릭터는 남궁민수. 열차의 보안 설계자였던 그는 꼬리칸의 혁명군에 의해 깨어난다. 그는 맨 앞의 엔진 칸까지 가려는 반란 세력의 목표엔 별 관심 없어 보인다. 대신 한 칸씩 열어 줄 때마다 크로놀을 요구한다. 화학 물질인 크로놀은 환각 작용이 있는 일종의 마약. 그러나 복안이 있었다. 크로놀 폭탄을 만들어 열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가려는 것이다. 눈이 조금씩 녹고 있다는 걸 관찰한 그는 열차 밖에서 인간이 살 수 있다고 판단한 것. 열차라는 낡은 시스템은 자신의 세대에서 멈추고, 다음 세대는 열차 밖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그는 진정한 혁명가다.
 
김내경·송우석·이정출·남궁민수 그리고 김만섭. 어쩌면 그들은 역사를 거스르는 인물들이다. ‘관상’에서 김내경은 자신을 찾아 온 한명회(김의성)에게 말한다. “난 사람의 얼굴을 봤을 뿐, 시대의 얼굴을 보지 못했소. 시시각각 변하는 파도만 본 격이지. 바람을 보아야 하는데. 파도를 만드는 건 바람인데 말이오.” 수양대군이 왕이 될 거라는 대세를 깨닫지 못한 채 그 도도한 흐름에 맞서려 했던, 그래서 수양대군의 얼굴에 점을 찍어 관상을 바꾸려 했던 어리석음에 대한 회한이다. 송우석과 이정출과 김만섭은 식민지 강점기와 정치적 혼란기에 일본 제국주의와 군부 세력과 독재 권력에 맞선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가 될 수 있는 무모한 저항과 모험. 그럼에도 그들이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글이나 말이 아닌 눈으로 직접 맞닥뜨린 현실의 힘 때문이다.
 
물론 이런 캐릭터가 송강호에게 처음은 아니다. ‘효자동 이발사’(2004, 임찬상)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효자동 이발사’의 성한모는 청와대 근처에서 이발소를 운영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각하의 이발사가 된 가상의 인물이다. 1960년 부정 선거와 4·19, 다음 해 5·16과 김신조가 북에서 내려왔던 1968년의 1·21, 10월 유신 시대와 그 끝인 10·26, 그리고 다음 대통령의 등장까지 그는 근거리에서 묵묵히 목격한다. 다른 점은 성한모라는 캐릭터의 지향점이다. 그의 아들 성낙안(이재응)은 다리를 못 쓰게 되는데, 이후 영화는 아들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한 아버지의 절절한 마음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효자동 이발사’의 성한모는 당대를 살아갔던 소시민의 전형인 셈이며, 한강에서 괴물이 나타나는 엄청난 사건을 몸소 겪는 ‘괴물’의 강두 역시 비슷한 맥락 위에 있다, 그를 움직이는 모티브는 딸 현서(고아성)에 대한 부성애이며, 직접 괴물을 처치하지만 안타깝게도 딸을 구하진 못한다.
 
 
관객들 가슴에 울림 주는 캐릭터 선택
다시 요즘 영화로 돌아오면, 송강호의 캐릭터들은 시대정신에 입각한 새로운 영웅상을 보여 준다. 역사의 주변부에서 자신과 가족만을 생각하며 그 틀 안에 갇혀 살아가던 인물은, 어떤 계기를 통해 그 울타리를 넘어 역사에 참여한다. 물론 ‘관상’의 김내경처럼 역사를 바꿀 순 없다는 좌절과 아들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한다. ‘변호인’의 송우석처럼, 인권 변호사가 된 후 자신이 피고인석에 앉기도 한다. ‘밀정’의 이정출처럼 자신이 이룬 모든 사회적 지위를 잃기도 한다. ‘택시 운전사’의 김만섭은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이런 희생을 감수하는 건, 그들의 마음속에서 싹트기 시작한 ‘인간’이라는 가치 때문이다.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란 국민입니다”라는 송우석의 사자후가 강변하듯, 진실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김만섭의 각오가 드러내듯, 송강호가 맡은 캐릭터들은 우리 시대가 한동안 잃어 버렸던 가장 기초적인 가치를 일깨운다.
 
이런 모습은 최근 우리가 경험하고 있고 진행 중인 거대한 역사적 변화를 환기시킨다. 우연인지 의도인지 알 수 없지만, 그리고 3~4년 전부터 진행된 필모그래피지만, 그가 선택한 캐릭터들은 변화에 대한 강한 의지를 품고 있으며, 이심전심이었을 수많은 관객의 가슴에 울림을 주었다. 상업영화의 주인공에겐 엔터테이너로서 관객에게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는 책임이 주어지지만, 이것만으로 임무가 완성되는 건 아니다. 좀 더 욕심을 낸다면, 배우는 감정과 의미와 가치의 전달자가 되어야 하며, 그러기에 그들을 ‘시대의 얼굴’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송강호는 지금 우리의 얼굴이다. 앞으로도 그는 수많은 역할을 맡아 수많은 얼굴이 되겠지만, 한국 현대사의 격변기 즈음에 그가 만들어낸 캐릭터들은 역사의 일부로서 그리고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서 세월이 지나도 기억될 것이다.
 
 
김형석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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