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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랩 리포트]북한, 중국 혈맹 아니다! 북중관계 전문가 션즈화 교수 강연

중국이 유엔 안보리 결의에서 대북제재에 찬성표를 던졌다. 단, 대북 원유 공급 중단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 이를 두고 중국이 입장을 급선회한 것인지 아니면 중국이 북한에 의리를 지켰는지, 그 평가가 분분하다. 과연 중국과 북한은 정말 '혈맹' 관계일까.  
북한 식당 벽에 부착된 중국 오성홍기와 북한 인공기 [출처: 이매진 차이나]

북한 식당 벽에 부착된 중국 오성홍기와 북한 인공기 [출처: 이매진 차이나]

이 문제에 대해 "중국과 북한은 혈맹관계가 아니다"면서 기존의 통념을 깨는 학자가 있다. 북한 문제 연구에 있어 1인자로 불리는 션즈화(沈志華) 중국 화동사범대학 국제냉전사(冷戰史)센터 주임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션 교수는 지난 7일~9일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에서 주최한 HK평화학 세미나에서 3일간의 특별강연을 가졌다. 다음은 강연 주요 내용이다. 

중국 입장에서는 북한이 마지막 친구라는 최악의 외교 상황에서 북한을 놓칠 수 없어

션즈화 교수. 션 교수는 중국이 한반도의 통일에 어떤 태도를 지녔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은 한반도 통일을 지지하는 입장을 가졌다. 그런데 그 결이 변화한 것이다. 과거 중국은 북한 주도의 무력통일도 지지했지만 이제는 한반도 평화 자주 통일 지지라는 입장으로 변화한 것이다. 중국은 '일국양제'식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 즉, 중국과 대만을 보는 시각을 다른 나라(남북을 지칭) 문제에서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출처: 차이나랩]

션즈화 교수. 션 교수는 중국이 한반도의 통일에 어떤 태도를 지녔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은 한반도 통일을 지지하는 입장을 가졌다. 그런데 그 결이 변화한 것이다. 과거 중국은 북한 주도의 무력통일도 지지했지만 이제는 한반도 평화 자주 통일 지지라는 입장으로 변화한 것이다. 중국은 '일국양제'식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 즉, 중국과 대만을 보는 시각을 다른 나라(남북을 지칭) 문제에서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출처: 차이나랩]

 
북중관계(중국식 표현으로는 중조, 중국+조선 관계)는 여러 가지 단계를 거쳤다. 우선 마오쩌둥 시기를 거쳤다. 저의 책 <최후의 천조>에서도 소개되지만 당시 북중은 대단히 특수한 관계였다. 김일성-마오쩌둥 두 지도자 간에 개인적인 인식과 혁명적인 색채가 더해졌다. 김일성과 마오쩌둥은 특수 관계였다. 이 특수 관계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1. 지원군 철수 2. 동북 관련 문제

이 두 가지는 마오쩌둥 시대에 핵심 기반이 마련되었다.

 
40만 중국 군이 북한에서 철군을 했다는 것. 이것이 중조관계를 바꿨다. 40만 군이 북한에 있다는 게 김일성에게는 부담이었다. 그런데 이걸 마오쩌둥이 철수시켰다. 김일성에게 주권과 자유를 준다라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일은 소련은 하지 못했다.  
 
마오쩌둥은 흐루시초프에게 "왜 소련은 군대를 북한에서 철군을 못 시키냐, 북한을 조이게 되면 관계가 나빠지고 풀어주면 관계가 좋아진다"라고 했으나 흐루시초프는 북한에서 군대를 빼지 않았다.  
이런 점을 볼 때, 결국 김일성이 북한 내에서 권력을 장악하도록 일조한 것은 마오쩌둥이라 할 수도 있겠다. 또 하나의 밀월 계기는 중조관계가 냉각될 뻔 할 때 마오쩌둥이 백두산(장백산)과 천지를 김일성에게 준 것이다. 김일성은 여기에 감동을 받게 된다. 결국 중국 동북지방을 김일성에게 내주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런 관념이 워낙 확고하다보니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백두산 천지. 과거 김정일이 장쩌민 주석을 만나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가 동북 지방에 가서 시찰하고 싶다"고 한다. 그러면서 시찰이란 단어를 쓴다. 그런데 시찰이라는 단어는 자국 지도자가 관할지역을 돌아보는 것이다. 놀란 장쩌민에게 김정일은 이렇게 말한다. "동북 지방은 북한 것이라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근데 사실 이건 마오쩌둥 주석이 이야기한 것이기도 하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출처: 이매진차이나]

백두산 천지. 과거 김정일이 장쩌민 주석을 만나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가 동북 지방에 가서 시찰하고 싶다"고 한다. 그러면서 시찰이란 단어를 쓴다. 그런데 시찰이라는 단어는 자국 지도자가 관할지역을 돌아보는 것이다. 놀란 장쩌민에게 김정일은 이렇게 말한다. "동북 지방은 북한 것이라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근데 사실 이건 마오쩌둥 주석이 이야기한 것이기도 하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출처: 이매진차이나]

(사실 마오쩌둥은 자신의 '천조' 관념에 의해 이렇게 결정한 것이다. 마오의 관념 속에서 마오 자기자신은 아시아의 지도자이자 곧 세계 지도자가 될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김일성에게는 그저 선양 군구의 사령관 직을 넘겨준 것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특수한 북중 관계는 변화를 맞는다. 마오쩌둥이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서면서다. 사실 마오는 늘 세계 공산당 혁명의 중심이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내 주먹이 두 개 있다면 하나는 미국을 치고 하나는 소련을 친다. 그리고 내 발은 세계 반동정권을 찬다"

 
그러나 결국 마오가 알게 된 건 이렇게 해선 누구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머리가 좋은 마오는 이제 소련에 대항하는데 온 힘을 집중하기로 한다. '연미항소(미국과 연합하고 소련에는 저항한다)'의 개념도 여기서 나왔다. 그런데 북한은 과거와 마찬가지 정책을 취했다. 북한이 의존하는 것은 소련이었고 미국과는 계속 대립 구도였다. 그래서 중국과 북한의 대외정책 방향이 다른 노선을 취하게 된다.  

 
그러나 중국과 북한 모두 이런 상황이 밖으로 표출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오는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생각을 가지자 마자 김일성에게 일단 말을 해놔야겠다고 생각했고 북한의 이익을 수호해주려고 노력했다. 김일성도 사실 중미 관계 개선이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김일성은 "중미 관계 개선 과정에서 북한의 이익을 최대로 하자"고 생각했다. 중국에게는 그동안 친구가 세 나라 밖에 없었다. 알바니아, 베트남 그리고 북한이었다. 그래서 저우언라이는 키신저와 회담을 하자마자 하노이를 방문해 베트남에게 "미국과 관계개선을 할거야"라고 알려줬다. 베트남의 태도는 강경했다. 베트남이냐 미국이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심지어 중국과 베트남 간에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알바니아 역시 냉담했다. "미 제국주의와 손을 잡는다니 어이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이제 중국에게 남은 마지막 친구는 북한이었다. 김일성은 "중국은 누구와 친해도 된다"며 실용주의적 태도를 취했다.  
사실 중국 입장에서는 북한이 마지막 친구라는 최악의 외교 상황에서 북한을 놓칠 수 없었다. 중소 관계도 갈등 고조 국면이었다. 그 사이에 있는 북한이 완충지대였다. 여기에 더해서 중국은 북한에 대한 원조를 확대했다. 1971~76년 중국의 대외경제 원조 항목을 보면 북한이나 베트남이 늘 1, 2위를 했다. 소련에 비해서는 중국 무기가 기술적으로 부족했지만 대신 공짜로 주기도 했다.  
 

탁구 시합 에피소드가 대표적이다. 중국이 북에게 제안을 한다. "우리 중국 탁구 실력이 좋으니 우리 국가대표가 다른 국가를 다 이긴 뒤에 북한에게 챔피언 자리를 넘기겠다" 그런데 8강에서 북한 선수가 중국 선수에게 져서 탈락하는 일이 일어난다. 중국 선수가 세계 1위를 한 것이다. 저우언라이가 이 소식을 듣고는 격노해 체육계 간부들을 다 불러서 2번이나 야단을 쳤다. 국장도 해임했다. 심지어 중국은 사과 대표단을 북한으로 파견하기도 했다. "특히 1위한 선수는 북한 상대 선수에게 직접 사과하라"라는 명령까지 했다.

두 번째 덩샤오핑 시기는 '중조 동맹 해체'의 시기였다. 80년대~1992년까지 마오쩌둥과 김일성이 다져놓은 관계가 해체되었다.
세 번째 시기는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92년 중국과 한국이 수교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중조 동맹'은 이미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고 본다. 북중관계에서 '동맹'은 사라졌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중미 관계 바뀌며 북중 관계도 큰 변화  

유엔 가입 등으로 중국, 북한과 선긋기 나서

 
72년 이른바 핑퐁외교로 중미 관계가 큰 변화를 맞으며 북중관계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중국이 유엔에 가입한 이후 상황이 달라지면서 북한과는 선 긋기에 나선 것이다. 중국은 많은 나라와 수교를 맺으며 북한 일변도의 정책에 변화를 준다. 과거에 중국은 각국 공산당 무장 세력을 훈련시키는 기지를 두고 수 천 명의 외국 공산당이 여기 와서 훈련을 받았다. 1975년에 덩샤오핑 집권 이후에는 여기는 폐쇄됐다. 북한은 오히려 군사기지를 건설해서 중국이 과거에 하던 일을 했다. 중미 관계가 변화를 맞은 근본적인 이유는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였다. 덩샤오핑이 이것을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 따라간 국가는 다 가난해지고 미국을 추종하면 부자가 되었다”
개혁개방 추진 과정에서 중국의 외교 정책도 그래서 바뀐 것이다. 마오의 시대가 혁명과 전쟁의 시대였다면 덩샤오핑은 평화와 발전의 시대를 열었다. 1985~1992년까지 대북 정책과 대(對)한국정책도 조정기를 겪는다.  
 
개혁개방 정책을 펼치면서 한국으로부터는 경제 발전에 도움을 얻었다. 중한 관계가 좋아지고 중소관계도 좋아지며 중국에게 북한의 중요성은 더 낮아지게 된다. 중국은 이제 북한이라는 부담을 덜어내고 한국과의 관계를 급속 발전시킨다. 북한은 불안했다. 1980년대 후기에 사회주의 진영 국가들, 헝가리, 체코, 심지어 러시아까지 한국과 수교를 맺었기 때문이다.
 
1990년 김일성이 선양을 방문해 중국 지도자들을 만난다. "소련까지 배반했다. 중국 너희는 절대 배신하지 마라"라고 하자 덩샤오핑은 “무역 대표처만 설치한 것 뿐이다”고 안심을 시켰다. 1991년 김일성은 불안해서 "지난해 약속을 잊지 않았죠?"라고 묻자 장쩌민은 “기억한다”고 답했지만 덩샤오핑은 그냥 가 버렸다. 그리고 1992년에 한국과 중국은 수교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한중 수교가 사실 북중의 동맹 관계를 깨뜨린 결정적 계기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때부터 장쩌민-후진타오에 이르기까지 중조 관계는 사실상 일반적인 국가 관계로 가고 있다.  
 
북한 지도자들은 모두 다음과 같은 사실을 느꼈을 것이다.  
첫째, 중국은 이미 사회주의를 하지 않는다. 중국은 이제 '자본주의'를 하고 있다.
둘째, 중국은 이미 세계 공산혁명을 하지 않는다. 대신 중국은 돈이 필요하고 돈이 벌리는 일을 한다.
외교적 차원에서도 중국은 북한보다는 유엔과 더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원래는 북한 편에 가깝다고 느껴졌지만 이제는 중국이 유엔과 같이 가는 상황이 되었다. 북한은 중국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배신당했다는 기분을 많이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북한은 비판하거나 지명 저격을 하지 않고 다만 간접적으로 '이웃의 대국'이라는 식으로 말했다.  
결코 중국을 공개적으로 저격하지 않는다. 왜냐면 북한 내부적으로 고민이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북중관계가 깨지지 않도록은 해야한다는 것이다. 또 외교적인 문제에 있어 북한이 중국의 힘을 빌릴 수 있을 거라는 일말의 기대 때문이다.  
 
중국의 상황은 좀 특이하다. 중국 지도자의 의중을 제가 알기란 어렵다. 하지만 중조 관계가 악화된 일련의 과정과 상황을 모두 다 인지하고 있었다고는 생각한다. 과거에 중난하이에서 장쩌민 전 주석과 제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제가 물어 본 적이 있다. "김정일에 대해 무슨 인상을 받으셨나요" 장쩌민 전 주석은 한참을 생각하다가..."김정일은 얄밉다(这个人狡猾)"라고 평가했다. 또 제가 중국 지방 지도자들을 만나 북한 지도자에 대한 인상을 물은 적이 있었다. 이들은 선전, 주하이의 지도자들이었는데 이 지역은 모두 김정일이 방문했던 지역이다. 그들은 제게 "김정일에 대한 인상이 안 좋았다"고 말했다. 중요한 점은 중국은 이런 상황을 절대 밖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번도 자기 입으로 공식적으로 말한 적이 없다.  
 
덩샤오핑이 북중 관계와 동맹을 하나하나 와해했는데  
이것은 중국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할 수 밖에 없던 일이다.
그래서 한 마디로 북한에 대해서 중국의 입장은 "일을 할 수는 있어도 말할 수는 없다(可以做, 不可以說)"고 표현된다.  
 
중국 공산당 역시 대북 정책에 변화를 줬지만 공개적으로 하지도 않고 당내에서도 말하지 않는다. 1985년은 중국에서 대북정책 조정기였는데 당내에서 이에 대한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다. 사실상 장쩌민과 후진타오 시대의 북한 정책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고 스스로도 자가당착적인 모습을 많이 보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시진핑 시대의 대북 정책은 과거와는 다르다. 게다가 중국과 북한의 이해관계가 맞질 않는다. 중국은 시장경제인데 북한은 아직도 폐쇄적인 경제다. 또한 현재의 중국은 미국과 완전히 배척관계에 놓일 수도 없다. 북한과는 입장이 다르다. 시진핑 주석은 이를 잘 이해하고 있다.  
한국전쟁을 중국에선 항미원조 전쟁이라고 한다. 미국에 저항하고 조선(북한)을 돕자는 구호였다. 그러나 '원조'는 절반의 진실만을 담았다는 게 션즈화 교수의 주장이다. [출처: 이매진 차이나]

한국전쟁을 중국에선 항미원조 전쟁이라고 한다. 미국에 저항하고 조선(북한)을 돕자는 구호였다. 그러나 '원조'는 절반의 진실만을 담았다는 게 션즈화 교수의 주장이다. [출처: 이매진 차이나]

1950년 벌어진 한국전쟁을 들어 중국과 북한이 혈맹이라는 데 이것도 허구다. 중국의 전쟁 구호는 항미원조(抗美援朝), 보가위국(保家衛国)이었다.

 
여기서 '항미'는 거짓이 아니다. 항미는 진실이다. 미국이 대만해협에서 영향력을 뻗치는 것에 중국은 반대할 수 밖에 없었다. 대만 문제를 두고 중국은 미국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원조'라는 구호는 표면 그대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 이건 결과적 진실이지 중국의 의도와는 관련이 없다. 조선(북한)과 중국은 원래 별로 관계가 없었다. 역사를 보자. 2차 세계 대전 이후 사실상 북방 즉 북한은 소련의 위성국이었다. 모든 것은 소련이 결정하는 것이었다. 소련은 북한을 통제했고 인사 문제도 소련이 결정했다. 이 때문에 마오쩌둥은 이렇게 이야기한 적도 있다.

"김일성은 스탈린이 심은 나무와도 같다. (마오쩌둥)"

중국 공산당 중앙정부와 북한 역시 연관이 없었다. 오죽했으면 류샤오치(유소기)가 모스크바에 갔을 때 스탈린이 이렇게 말했다. "아시아의 혁명은 너희 중국이 해라. 그러나 북한과 몽골만은 제외해라".
 
스탈린(왼쪽)과 마오쩌둥의 포스터. [출처: 이매진차이나]

스탈린(왼쪽)과 마오쩌둥의 포스터. [출처: 이매진차이나]

 
두 국가는 소련이 알아서 할테니 중국이 통제할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1949년에 각국 공산당에서 중국 베이징에 가서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무장투쟁, 노동자 운동 등에 대해 중국 공산당 고위 간부가 수업해주는 방식이었는데 북한과 몽골에선 한 명도 안 왔다. 그 정도로 관련이 없었다. 원래 김일성과 중국 공산당 사이의 연락책은 김일성과 함께 동북 연합군을 이룬 유격대대의 동지들 뿐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중국 공산당 사이에서 가장 신뢰받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은 스탈린의 의견을 존중하기 위해서였다. "사회주의 국가들에 문제가 생기면 누가 나설 것이냐, 그게 바로 나 마오쩌둥이다"라는 것이다. 즉, 파병을 결심한 것은 북한을 돕기 위해서라기 보다 그저 스탈린 의견을 존중하기 위함이 더 컸다.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책임있는 구성원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그런 것이다. 당시에 미국은 중국 공산당에 등을 돌렸다. 그런 상황에서 소련이 도움을 주지 않으면 중국 공산당은 위태로웠을 것이다. 스탈린의 신뢰를 얻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런 상황속에서 중국이 국민들에게 "소련을 위해서 전쟁하자"라고 어떻게 말하겠나. 그래서 '원조'라는 건 일종의 핑계였다. "공산당 사회주의 혁명국가로서 이웃 혁명국가가 미 제국주의에게 무시당하고 전쟁 포화속에서 살아가는데 중국이 도와야 한다"는 핑계였다.
그런데 정말로 결과적으로 중국이 북한을 돕는 꼴이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야 북한을 위협 속에서 구하긴 했다. 그렇기 때문에 결과가 그렇게 나왔다 해서 원인도 같다고는 봐선 안 된다.  
특히 국가 지도부 차원에서 중조 우의는 어불성설이었다. 군대 지휘권을 놓고도 김일성과 펑더화이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결국 스탈린이 나서서 북한군까지 중국이 컨트롤하라고 해서 중조 연합군사령부가 생기기도 했다.  
전쟁이 지난 이후 김일성은 중국에 먼저 안 갔고 소련에 먼저 갔다. 원조를 구하기 위해 소련, 유럽으로 가고 중국은 건너뛰었다. 마오쩌둥이 북한과의 관계를 좀 좋게 하려고 했다. 혜택이나 도움을 줌으로써 중조 관계를 회복하려고 했다.  
흐루시초프 [출처: Countrystudies.us]

흐루시초프 [출처: Countrystudies.us]

흐루시초프가 전쟁 기간 북한의 부채를 50% 감면해준다고 하니 마오는 "전체를 감면해주겠다"고 하기도 했다. 중국이 1953년 북한에 제공했던 무상원조는 소련과 동유럽 6개 국가가 준 합을 넘어기도 했다. 그래도 중조 관계는 냉담했다.  

북한에는 11개의 전쟁기념관이 있는데 여기에는 중국 지원군에 대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고 한다. 기록물만 보면 마치 북한군이 혼자서 치러낸 분위기다. 전쟁이 끝난 이후 주중 북한 대사가 2년간 공석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북중 관계는 "피로 맺어진 우의", 이런 것이 아니었다. 신문 지면상에, 양국 국경일마다 찬사가 오고 갔어도 실상은 그렇게 아름다운 관계는 아니었다.  
 
여러번 강조하지만 북중관계를 혈맹이라고 지칭하는 건 굉장한 오해라고 생각한다. 혈맹을 강조하는 건 중국과 북한이 취한 일종의 '선전'이라고 봐야 한다.
인민화보 1967년 표지. 알바니아 공산당 지도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마오쩌둥의 모습 [출처: 이매진 차이나]

인민화보 1967년 표지. 알바니아 공산당 지도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마오쩌둥의 모습 [출처: 이매진 차이나]

션즈화 교수=1950년 베이징 출생으로 원래 역사학과 교수였다. 화동사범대 국제냉전사 센터에 '주변국가' 연구소도 만들어 북한을 비롯, 몽골, 미얀마 등을 연구하는 소모임을 만들었다. 3년간 군대 생활, 6년간 노동자 생활을 했던 이색 경력도 있다. 1990년대 이후 연구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40세 이후에 내놓은 저서가 많다. 러시아와 미국에서 해금된 문서들을 정리하고 역사적 의미를 발굴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최후의 천조(天朝)>, <김일성 시대의 중국과 북한>등을 저술했다.  

 
차이나랩 서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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