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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차·코코아 소비 확산이 근면혁명을 이끌어

[비주얼 경제사] 기호음료의 세계화
그림 1 필립 실베스트르 뒤포, '커피·차·초콜릿의 새롭고 신기한 이야기', 1685년

그림 1 필립 실베스트르 뒤포, '커피·차·초콜릿의 새롭고 신기한 이야기', 1685년

그림1은 17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출간된 책의 표지 그림이다. 저자는 무역업자인 필립 실베스트르 뒤포라는 인물이다. 그는 유럽에서 수입하는 상품들 가운데 특히 기호음료에 관심이 많았다. 지적 호기심도 컸던 뒤포는 해외경험이 풍부한 네덜란드 외교관과 예수회 신부들이 기호음료에 관해 쓴 글들을 꼼꼼히 찾아 읽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시 유럽에서 인기가 높은 세 가지 수입품목에 대한 책을 출간했다.
 
그림1을 자세히 보자. 왼쪽 인물은 머리에 터번을 두르고 온몸을 긴 옷으로 가린 모습이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음료는 커피다. 가운데 인물은 중국 청나라 사람이다. 그는 차를 마시고 있다. 오른쪽 인물은 깃털로 만든 옷과 머리장식으로 신체의 일부를 가리고 있다. 아메리카의 원주민이다. 그가 마시는 음료는 코코아다. 뒤포의 책은 다양한 지역에서 수입한 기호음료를 소개하고 각 음료가 지닌 고유한 맛과 향기, 그리고 제조 방법과 건강상의 효능을 설명하고 있다.
 
세 기호음료는 각기 독특한 역사를 품고 있다. 먼저 커피를 살펴보자. 커피는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 지역에서 자생하던 식물이 기원이다. 사람들이 커피를 본격적으로 수요하기 시작한 것은 중세에 이르러서였다. 이슬람 문화권으로 소개된 커피는 15세기에 예멘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 갔다. 특히 이슬람 수피 성직자들은 신에게 기도를 드리고 밤샘 수행을 할 때 커피의 각성효과가 유용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커피는 곧 예멘을 벗어나 메카와 메디나로 전파됐고 다시 카이로·바그다드·콘스탄티노플로 확산됐다. 16세기에 커피는 이슬람권 전역에서 무슬림들의 신앙생활을 도왔다. 종교적으로 술이 금지됐기 때문에 커피는 사람들의 사회관계를 풍성하게 하는 역할도 했다.
 
 
아프리카산 커피, 이슬람 통해 유럽으로
그림 2 윌리엄 홀랜드, '로이즈 커피하우스, 런던', 1789년

그림 2 윌리엄 홀랜드, '로이즈 커피하우스, 런던', 1789년

16세기 말에는 유럽에도 커피가 소개됐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례가 오스트리아에서 발생했다. 오스만제국의 군대와 유럽의 연합군 간에 벌어진 1683년 빈 전투가 계기였다. 유럽군에 속한 폴란드 장교 예르지 쿨치츠키가 전장에 남겨진 이슬람 커피콩을 획득하고서는 이를 이용해 빈에 유럽 최초의 커피하우스를 열었던 것이다. 한편 서유럽에는 영국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들의 무역망을 통해 커피가 전해졌다. 17세기 말 영국에만 3000개가 넘는 커피하우스가 손님들을 유혹했다. 이후 커피는 유럽에서 중산층의 음료로 자리를 잡았다. 금융업자들은 하루 일과가 끝나면 커피하우스에 모여 새 정보를 교환하고 새 사업을 구상했다. 세계적 보험사가 된 로이즈보험사도 런던 시내의 로이즈 커피하우스에서 시작됐다(그림2). 지식인들이 논쟁을 벌이고 사상을 공유하는 데에도 커피하우스가 제격이었다. 계몽주의 사조는 커피향기와 더불어 유럽 전역으로, 그리고 대서양 너머 아메리카로 퍼져 갔다.
 
차의 역사는 커피보다 훨씬 길다. 차는 중국 남서부지역이 원산지인데 이미 한나라 사람들이 즐겨 마셨다는 증거가 있다. 수와 당 시기에는 우리나라와 일본에도 전파될 만큼 차의 인기가 폭넓었다. 당의 육우가 쓴 『다경(茶經)』은 차의 재배, 가공, 품질 평가, 음용법 등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상세했는가를 잘 보여 준다. 이후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차의 생산지가 확대됐고 다양한 가공법이 개발됐다.
 
차가 유럽에 전해진 것은 장거리 무역 덕분이었다. 우선 아시아 항로를 개척하고 마카오에 무역기지를 건설한 포르투갈 상인들이 차의 존재를 널리 알렸다. 이어서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최초로 중국 녹차를 수입해 암스테르담 시장에 풀었다. 이를 계기로 많은 유럽인들이 차의 은은한 맛과 향기에 빠지게 됐다. 특히 영국에서는 동인도회사가 수입한 막대한 물량의 차가 사람들을 대중을 도취시켰다. 18세기 중반에는 수입가격 인하에 힘입어 차가 영국인들 사이에 국민음료로 자리를 잡았다.
 
그림 3 코코아를 바치는 장면, 『주시-너틀 코덱스』, 14세기

그림 3 코코아를 바치는 장면, 『주시-너틀 코덱스』, 14세기

코코아는 중앙아메리카가 원산인 음료다. 약 3000년 전부터 멕시코 유카탄 반도와 과테말라 지역에서 올멕인과 마야인이 카카오를 재배했다. 여기서 나오는 카카오 콩을 가공해 초콜릿과 코코아 음료를 얻게 된다. 그림3은 14세기에 미스텍 족이 제작한 그림문자다. 왕좌에 앉은 군왕(오른쪽)이 신에게 코코아 음료를 바치는 모습이다. 오늘날에는 주로 단단한 고체 형태의 초콜릿을 만들어 먹지만, 초콜릿이 개발된 19세기 초 이전에 전 세계 사람들은 늘 따뜻한 음료로 카카오 콩을 소비해 왔다. 중앙아메리카 인들도 코코아를 즐겼는데 특히 그림에 나오는 것처럼 거품이 가득한 형태를 최상이라 여겼다. 코코아 잔을 높이 들고서 바닥에 놓인 잔에 따르기를 반복함으로써 이런 코코아를 얻었다고 한다.
 
코코아를 처음 접한 유럽인은 다름 아닌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였다. 1502년 그와 선원들이 온두라스 해안에 상륙했을 때 아스텍 부족장이 가져온 선물 중에 카카오 콩이 있었다. 그들은 코코아 음료를 만들어 콜럼버스에게 건넸지만 콜럼버스는 이 ‘쓰디쓴 물’에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이 일화가 말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코코아가 아스텍 제국에서 높은 가치를 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국가적 의례와 종교적 예식에서 코코아는 빠져서는 안 되는 구성요소였다. 권력자와 엘리트층의 권력과 권위를 상징하는 음료였기 때문이다. 황제 목테수마는 거대한 창고를 두고서 자신이 정복한 사람들에게 카카오 콩을 조공으로 바치도록 강요했다. 아스텍인들은 카카오 콩을 화폐로 사용하기도 했다. 콜럼버스는 이런 가치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17년 후 아스텍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을 점령한 코르테스는 달랐다. 이 눈치 빠른 정복자는 코코아를 스페인으로 가져갔고, 곧 값비싼 음료로서 유럽인들의 입맛을 사로잡게 됐다. 커피와 차가 북유럽 신교도 중산층의 음료라면 코코아는 남유럽 구교도 귀족층의 음료였다.
 
 
중국산 차, 중남미 코코아도 중상주의 부채질
이제 그림1로 돌아가 보자. 17~18세기에 경제적으로 넉넉한 유럽인들은 세계적 음료 중에서 무엇을 마실지 선택할 수 있었다. 아프리카 원산으로 중동에서 건너온 커피를 마실까? 중국에서 수입한 차를 마실까? 아니면 중앙아메리카 인디오들이 아꼈던 코코아를 마실까? 15세기 말에 시작된 대항해시대 그리고 이후에 전개된 중상주의 경쟁의 시대를 거친 후 적어도 부유한 유럽인들은 세계화된 기호음료를 골라 마실 자유를 얻었다. 뒤포의 책은 이런 선택의 자유를 획득한 돈 많은 유럽인들에게 글로벌한 신제품을 소개하고 소비를 부추길 목적으로 기획된 출간물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선택의 자유가 가난한 노동자들에게까지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중에 하나도 사서 마실 수 없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기회가 완전히 봉쇄된 것은 아니었다. 다행히 기호음료의 수입이 증가함에 따라 가격이 점차 낮아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노동자는 구매력을 키우기 위해 어떻게 대응했을까? 하나는 노동시간을 늘리는 것이었다. 적게 일하고 적게 버는 것보다 많이 일하고 많이 버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또 하나는 자급자족적 생산을 그만두고 시장에 판매할 수 있는 물품 위주로 생산하는 것이었다.
 
이런 변화들은 실제로 유럽의 산업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18세기에 영국이 세계 최초로 산업혁명에 들어서게 된 데에는 기술진보나 자본증가 같은 공급요인도 작용했지만 소비욕구의 증대라는 수요요인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경제사학자들은 산업(industrial)혁명과 대비해 근면(industrious)혁명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수요 변화가 경제발전에 끼치는 영향을 강조했다. 세계화된 커피·차·코코아에 대한 소비 욕망은 바로 근면혁명이라는 역사적 변화를 이끈 핵심 원동력이었다.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bks21@skku.edu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학·석사 학위를 마친 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경제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비주얼 경제사』『세계경제사 들어서기』『경제사: 세계화와 세계경제의 역사』 등 다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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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