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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한넨, 난징정부 주석 만난 것 실토했다 잡혀가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40>
1 젊은 시절 판한넨은 문학청년이었다. 1930년 봄, 상하이.

1 젊은 시절 판한넨은 문학청년이었다. 1930년 봄, 상하이.

인치(人治)가 왕성하던 시절, 법치(法治)는 설 땅이 없었다. 재판은 형식이었다. 당(黨)에서 몇 년 때리라고 법원에 지시하면, 법관들은 그대로 따랐다. 중앙도 그랬고, 지방도 그랬다.
 
1990년대 중반, 중국 TV가 ‘판한넨(潘漢年·반한년)’이라는 드라마를 방영했다.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시절 중공 지하조직을 이끌던 실존인물이 주인공이었다. 시청자들은 혹평을 쏟아 냈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재미도 없다. 만든 이유를 모르겠다.”
 
문화인들의 반응은 달랐다. 판한넨에 관한 글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융숭한 추도회가 열리고 동상과 흉상이 세워졌다. 명함이 필요 없는 대가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 판한넨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40년 전인 1955년 3월 15일 상하이, 중국주재 소련 대사 초청 만찬이 성대하게 열렸다. 부시장 판한넨은 간단한 축사를 마치고 연회장을 떴다. 평소처럼 부인 둥후이(董慧·동혜)의 등을 툭 치고 역으로 향했다. 베이징에서 열리는 중공전국대표자대회에 상하이 대표로 참석할 시장 천이(陳毅·진의), 문화국장 샤옌(夏衍·하연)등과 합류했다.
 
2 1952년 가을 마오쩌둥(뒷줄 오른쪽 넷째), 뤄루이칭(왼쪽 다섯째), 천이(마오쩌둥 오른쪽) 등과 베이징 교외에 산책나온 판한넨(뒷줄 오른쪽 둘째). [사진 김명호 제공]

2 1952년 가을 마오쩌둥(뒷줄 오른쪽 넷째), 뤄루이칭(왼쪽 다섯째), 천이(마오쩌둥 오른쪽) 등과 베이징 교외에 산책나온 판한넨(뒷줄 오른쪽 둘째). [사진 김명호 제공]

베이징에 도착한 판한넨은 베이징반점(北京飯店) 303호에 여장을 풀었다. 마오쩌둥의 부름을 받고 베이징에 올 때마다 묵었던, 바로 그 방이었다.
 
회의는 열흘간 열렸다. 조직부장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이 지방 실력자 가오강(高崗·고강)과 랴오수스(饒漱石·요수석)의 반당연맹(反黨聯盟) 결성에 관한 보고를 했다. 마오쩌둥도 발언대에 올랐다. “고급간부들에게 한마디 하겠다. 사람은 누구나 개인의 역사가 있다. 지난 날들을 되돌아보기 바란다. 그간 보고하지 않고 얼버무린 일이 있으면 주동적으로 해명하기 바란다. 회의 기간 동안 말하기 싫은 사람은 끝난 후에 제출해도 상관없다.” 판한넨은 식은 땀이 났다. 항일전쟁이 한참이던 1943년, 일본의 꼭두각시였던 난징정부 주석 왕징웨이(汪精衛·왕정위)를 만난 적이 있었다.
 
회의 마지막 날 밤, 샤옌의 방을 노크했다. 극작가로 현대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샤옌은 판한넨의 오랜 동료였다. 고충을 털어놨다. “그간 조직에 털어놓지 못한 일이 있다. 말하지 않으면 잠을 못 잘 것 같다.” 샤옌은 심상치 않은 일이라고 직감했다. “천이에게 가서 사실 그대로 얘기하라”며 판한넨을 안심시켰다.
 
4월 1일, 천이를 찾아간 판한넨은 12년 전에 있었던 일을 실토했다. 그간 숨겨왔던 이유도 빠뜨리지 않았다. 대신 중앙에 전달해 달라며 밤새 작성한 문건을 건넸다. 천이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중요한 문제지만 염려하지 마라. 당과 마오 주석은 너의 공로를 인정한 지 오래다. 조직과 당을 믿어라.”
 
다음날, 천이는 직접 중난하이(中南海)로 달려갔다. 마오쩌둥에게 간밤의 일을 보고하며 문건을 전달했다. 문건을 꼼꼼히 읽은 마오는 “이 인간 믿을 수 없는 놈”이라며 불같이 화를 냈다. 붓을 들고 문건 위에 몇 자 끄적거렸다. “즉각 판한넨을 체포해라. 공안부장 뤄루이칭(羅瑞卿·나서경)이 직접 집행해라.”
 
판한넨은 진단 결과 기다리는 환자처럼 중앙의 결정을 기다렸다. 천이가 마오쩌둥에게 판한넨 문제를 설명할 무렵 판한넨은 민주동맹 주석과 점심을 했다.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하루가 그냥 지나갔다.
 
마오쩌둥의 명을 받은 공안부장 뤄루이칭은 최고인민 검찰원에 판한넨 체포영장을 청구했다. 검찰원은 영장 청구서를 읽지도 않고 발부했다.
 
4월 3일은 운명의 날이었다. 황혼 무렵, 우주광(吳祖光·오조광)이 부인과 함께 판한넨과 샤옌을 찾아왔다. 판한넨은 항일전쟁 시절, 일류 문화 예술인의 집결지로 명성이 자자했던 이류당(二流堂) 당주(堂主) 우주광의 오랜 친구이며 후원자였다. 우주광의 회상을 소개한다. “우리는 새로 개업한 작은 식당에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깔끔한 복장에 단정한 머리, 판한넨의 모습은 평소 그대로였지만 뭔가 이상했다. 말수도 적고 우울해 보였다. 음식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일찍 쉬고 싶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베이징반점으로 돌아온 판한넨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저녁 8시 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일층 로비에 손님이 와 있다. 내려오기 바란다.” 손님은 공안부장 뤄루이칭이었다. 전쟁시절, 한솥밥 먹던 뤄루이칭은 딴사람 같았다. 꼿꼿이 선채 체포영장을 내밀었다. 사복한 사람들이 판한넨을 에워쌌다.
 
판한넨의 실종에 상하이 대표단은 경악했다. 여기저기 전화 걸다 보니 이상한 소문이 퍼졌다. “반둥회의에 참석 예정인 총리가 판한넨에게 특수 임무를 부여했다. 판한넨은 원래 바람처럼 나타났다 안개처럼 사라지던 사람이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 총리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샤옌은 소문을 믿지 않았다. 시장 천이에게 무슨 일이냐고 떠졌다. 입맛만 다시던 천이가 입을 열었다. “조급해 하지 마라. 판한넨은 잠시 베이징을 떠났다. 어디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샤옌은 판한넨의 인생은 끝났다는 예감이 들었다. 판한넨은 복잡한 사람이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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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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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