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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식사 24명, 압사 9명 … 들리는가 그들의 신음소리

[배영대의 걸으며 생각하며] 징용자의 무덤이 ‘산업혁명의 유산’으로 … 군함도의 진실
군함도 혹은 지옥도라고 불리는 섬 하시마. [사진 선인출판사]

군함도 혹은 지옥도라고 불리는 섬 하시마. [사진 선인출판사]

일본 나가사키시 나가사키항에서 남서쪽으로 18㎞ 떨어진 섬 하시마(端島). 콘크리트 벽과 회색빛 건물군이 두드러진 이 섬의 다른 이름은 군함도다. 멀리서 보면 마치 군함이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은 별명인데, 군국주의 일본의 침략성을 반영하는 듯한 별명이다. 하지만 지옥도라고도 불렸던 이 섬이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강제징용의 역사’는 사라지고 ‘메이지 산업혁명의 영광’으로만 재조명되고 있다.
 
경남 의령이 고향인 고 서정우(1928~ 2001)씨가 이 섬에 강제로 끌려간 것은 14세 때였다. 도착한 첫날부터 쌀자루 같은 옷을 받아 입고 탄광 일을 해야 했다. 굴착장은 엎드려서 석탄을 파내야 할 정도로 비좁았다. 덥고 가스가 찬 데다 낙반 위험이 있어서 이대로는 살아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실제 낙반으로 한 달에 네다섯 명은 죽어 나가는 것 같았다. 죽은 사람은 하시마 옆의 나카노시마에서 화장을 했다. 콩깻묵과 현미로 된 밥에 정어리를 덩어리째 삶아 부순 반찬으로 식사를 했다. 한 사람이 다다미 한 장 넓이도 차지할 수 없는 좁은 방에 7~8명이 함께 들어가 지냈다. 좀 쉬려고 하면 감독이 관리사무소로 끌고가 “일하러 가겠습니다”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때렸다. “동료 가운데 자살한 사람이나 (하시마에서 5㎞ 거리에 있는) 다카시마(高島)로 헤엄쳐 도망가려다 익사한 사람이 사오십 명은 됩니다.”
 
서씨가 1983년에 남긴 증언이다. 하시마의 조선인 강제 징용 실태가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사실상 노예노동이었다. 서씨는 수영을 못해 바다로 뛰어내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한다. 섬에 있던 한국인이 오륙백 명은 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의 증언은 당시 『원폭과 조선인』이란 잡지 제2집에 실렸다. 일본의 시민단체 ‘나가사키 재일 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이하 나가사키 인권 모임)이 펴냈다.
 
이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오늘날 우리가 한수산의 소설 『군함도』를 읽을 수도 없을 것이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 ‘군함도’를 놓고 잘 만들었네, 못 만들었네 하면서 논란 벌일 일도 없을 것이다. 한수산은 89년 일본의 한 고서점에서 『원폭과 조선인』을 보고 충격을 받아 소설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류승완은 2015년 이 섬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것을 보면서 공분을 느껴 영화 제작에 나섰다고 한다.
 
그런데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평가는 냉정하다. 스크린 독점의 문제점은 차치하더라도 영화의 내용을 둘러싸고 많은 말이 오간다. 영화는 군함도라는 이름을 빌렸을 뿐 군함도에서 벌어진 일만을 담은 것이 아니다. 강제 징용의 여러 사례를 섞었고 거기에다 감독의 상상력과 희망을 보태어 만들었다.
 
하시마 탄광 전경. [사진 선인출판사]

하시마 탄광 전경. [사진 선인출판사]

하시마 신사. [사진 선인출판사]

하시마 신사. [사진 선인출판사]

조선인 숙소(양편)와 하시마 신사로 통하는 계단. 최근 출간된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에 실렸다. 익숙하지 않은 사진들이다. [사진 선인출판사]

조선인 숙소(양편)와 하시마 신사로 통하는 계단. 최근 출간된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에 실렸다. 익숙하지 않은 사진들이다. [사진 선인출판사]

공동 저자들 ‘하시마의 신음소리’  중시
이런 흐름 속에서 지난 2일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선인)라는 책이 번역 출간돼 주목된다. 이 역시 나가사키 인권 모임이 2011년 일본에서 낸 책이다. 그나마 이제라도 번역돼 나온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하시마에 강제 연행된 조선인과 중국인의 기록’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공동 저자들은 ‘하시마의 신음소리’라는 표현을 중시한다. 나가사키 인권 모임의 시바타 도시아키 사무국장은 “길 잃은 아이의 미세한 소리조차 놓치지 않고 찾아내려는 어머니의 마음을 떠올리면 좋겠다”고 했다. 아이가 있는 곳으로 필사적으로 당도하고자 하는 엄마의 간절한 몸부림, 영화를 만든 감독이나 그 영화의 ‘역사적 무게’를 재는 비평가들이나 그 마음의 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65년 결성된 나가사키 인권 모임은 81년 『원폭과 조선인』 제1집을 발간한 이래 지금까지 계속 이 같은 작업을 해오고 있다. 86년에는 하시마에서 1925~45년 사이에 사망한 일본인·조선인·중국인의 ‘화장매장인허증’이라는 문서를 발굴했다. 여기에는 123명의 조선인이 포함돼 있었다. 사망자의 출신지와 함께 사망 원인도 기재돼 있는데 ‘병사 60명, 사고사 63명’이었다. 사고사 중 가장 많은 것은 질식(매몰에 의한 사망 포함)으로 24명이다. 그 다음이 ‘압사’로 9명이며 뇌손상 2명, 폭상사 2명, 추락사 1명, 두부타박상 1명 등이었다. 사망자가 이보다 더 많을 수 있겠지만 이 문서의 발굴로 강제 징용이 없었다고 강변하는 일본 정부에 반박할 물증을 확보하게 됐다.
 
이들이 한참 활동을 전개하던 80년대 한국은 어땠을까. 3저 호황의 물결을 타고 60년대 이후 이뤄낸 산업화의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으론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이 격렬하게 전개됐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이념 충돌이 심각해지는 가운데 그 외의 가치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는 많지 않았다.
 
지난 3일 오후 부평공원을 찾았다. 불볕더위를 피해 서늘한 나무 밑에 모여 있는 시민들이 보였다. 인천시내 대표적인 시민공원이 된 것은 2002년부터다. 해방 이후 97년까지 한국군부대(88정비대)의 군수차량 기지로 사용됐다. 그 이전에는 무엇으로 사용됐을까. 1940년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쓰비시(三菱)중공업이 이곳에서 군수무기를 생산해 전쟁터에 공급했다. 이런 역사를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어 보였다. 공원 안내 표지판에 작은 글씨로 써 있었지만 그냥 지나칠 뿐이다.
 
부평공원의 한쪽 건너편에는 공원보다 네 배 더 큰 면적의 미군부대가 위치하고 있다. 공원의 다른 세 방향은 아파트와 빌라들로 둘러싸여 있다. 9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20년 넘게 일제의 강제 징용 문제를 연구하고 알려온 정혜경(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 박사는 부평공원 같은 일제강점기 전쟁 유적이 서울에만 300곳이 넘는다고 했다. 한반도 전역에는 8300곳이라고 한다. 한꺼풀만 벗기고 들어가면 우리 생활 공간 속에 존재하고 있지만 그런 유적을 찾아내 공개하는 데 관심을 보이는 이는 많지 않다고 했다.
 
오는 12일 부평공원에 세워질 ‘징용노동자 동상’으로 이원석 조각가의 작품. [사진 이원석]

오는 12일 부평공원에 세워질 ‘징용노동자 동상’으로 이원석 조각가의 작품. [사진 이원석]

군함도 탄광을 개발한 것도 미쓰비시였다. 나가사키 인권 모임은 조선인 강제연행의 가해 기업인 미쓰비시 석탄광업에 유골 반환을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했으나 미쓰비시로부터 단 한 번도 성의 있는 대답을 들은 적이 없다고 했다.
 
부평공원에서 차로는 3분, 걸어서는 10분 정도 지나면 부평역이 나오고 그 일대에서 가장 번화한 ‘문화의 거리’가 이어진다. 바쁘게 오가는 차량과 사람들 속에 전쟁의 기억은 사라져 가는 것 같다. 이런 가운데 오는 12일 부평공원에 ‘징용노동자 동상’이 세워질 예정이다. 인천 지역의 시민단체와 민주노총·한국노총 등이 지난해 말부터 모금을 했고 작품 공모를 거쳐 조각가 이원석의 ‘해방의 예감’이 선정돼 이날 오후 제막식을 한다.  
 
노예노동 기록 누락시키고 문화유산 등재
하시마 호안벽. 일본의 세계문화유산 적용 시한인 1910년 이전의 유적은 이 호안벽뿐이다. [사진 선인출판사]

하시마 호안벽. 일본의 세계문화유산 적용 시한인 1910년 이전의 유적은 이 호안벽뿐이다. [사진 선인출판사]

하시마 탄광의 역사는 미쓰비시가 1890년 이 섬을 매입하면서 시작됐다. 미쓰비시는 일본 2위의 재벌로 도약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일본은 이를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켰다. 한국인과 중국인의 노예노동에 대한 기록은 누락시키면서 그에 대한 반발을 피해 가기 위해 교묘한 편법을 썼다. 세계문화유산의 적용 시기를 1910년까지라고 해놓은 것이다. 한국 강제병합 시점 이후는 뺐다. 그런데 군함도에 남아 있는 1910년까지의 유적은 해안을 보호하는 ‘작은 돌벽(호안)’뿐이다. 일본이 군함도의 상징으로 자랑하는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아파트조차 1916년에 지어졌으므로 세계문화유산의 범주 밖에 놓이게 된 셈이다. 군함도 세계문화유산의 맹점이다. 이 같은 모순과 일본의 편법을 폭로한 것도 나가사키 인권 모임이다.
 
군함도의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통과될 때 조건이 있었다. 올해 11월까지 조선인과 중국인의 강제 동원을 비롯한 군함도의 모든 역사를 포함시켜야 한다는 조건이다. 그에 대한 이행 보고서를 12월 유네스코에 제출해야 한다. 이 정도 성의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자격 미달일 것이다.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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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