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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위권 금지'부터 '집단적 자위권 행사'까지…일본 헌법 9조 변천사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만난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 총사령관(왼쪽)과 일왕 히로히토. [중앙포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만난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 총사령관(왼쪽)과 일왕 히로히토. [중앙포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군 총사령부는 새로 제정되는 일본 헌법에 역사상 유례가 없던 조항을 삽입했다. 바로 '평화헌법'이라 불리는 9조다.
 
헌법 9조는 두 가지 조문으로 구성된다. "일본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망하고 추구하며, 국권의 발동을 통한 전쟁∙무력에 의한 위협 혹은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할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포기한다"는 1항과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해·공군을 비롯한 전력을 보유하지 않으며,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2항이다.
 
헌법 9조는 1946년 제정된 이래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지만, 일본 정부는 끊임없이 해석을 더해가면서 자위권의 범위를 넓혔다.
 
1946년 - 자위권은 일절 행사할 수 없다
헌법 제정 당시만 해도 일본 정부는 9조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 자위권 행사를 인정하지 않았다. 자위권을 인정하더라도 전력을 보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행사가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다.
 
46년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일본 총리는 중의원 본회의에서 헌법 9조 2항이 "군비와 교전권을 일절 인정하지 않은 결과 자위권으로 인한 전쟁 및 교전권도 포기했다고 본다"며 "정당방위권에 의한 전쟁은 정당하다는 의견이 있지만 나는 그것이 유해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때 일본은 전후 비무장 중립국으로서 새출발한다는 인식이 명확했다.
 
1950년 - 무력이 아닌 자위권은 인정된다
요시다 시게루 전 일본 총리. [중앙포토]

요시다 시게루 전 일본 총리. [중앙포토]

냉전이 심화되면서 미국과 소련의 갈등이 날로 깊어졌다. 급변하는 세태 속에서 더이상 중립국으로 남기가 어렵다는 인식이 일본 내에 퍼지기 시작했다. 요시다는 50년 1월 중의원 본회의에서 "나라가 독립을 회복한 이상 자위권이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며, 그것이 무력이 아닌 자위권임은 명료한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 새로운 해석을 바탕으로 51년 일본은 미국과 미·일 안전보장조약을 체결했다. 강대국과의 조약을 통해 무력이 아닌 자위권을 행사한 것이다. 전후 머물던 주일미군은 이 시점부터 점령군에서 동맹군으로 신분이 바뀌게 된다.  
 
1954년 - 자위를 위한 최소한의 무력은 인정된다
50년 한반도에서 6·25전쟁이 벌어지자 일본 정부의 위기감은 한층 높아졌다. 일본 내부에서 재군비의 필요성이 거론되기 시작했고, 미국측 역시 재군비를 강하게 요구해왔다. 54년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 일본 총리는 "자위를 위한 최소한의 무력 행사는 인정된다"며 자위대를 창설했다.
 
일본 정부는 전력을 보유하지 않는다는 헌법 9조를 위반하지 않기 위해 "자위대는 군대가 아니다"란 원칙 하에 자위권 발동 조건을 세웠다. 급박하고도 부정한 침해에 대해, 이를 배제할 다른 수단이 없을 때, 필요한 최소한의 무력 행사에 그쳐야 한다는 조건이다.
 
1981년 - 집단적 자위권 행사는 인정되지 않는다
스즈키 젠코(鈴木善幸) 총리는 헌법 상의 집단적 자위권에 처음으로 해석을 제시했다. 스즈키는 중의회 대정부 질의에서 "일본은 주권국인 이상 당연히 국제법에 의해 집단적 자위권을 보유하지만, 집단적 자위권은 헌법 9조가 허용하는 자위권 행사의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에 헌법상 용인할 수 없다"고 표명했다. '가지고 있지만 행사할 수 없다'는 논리는 이후 개헌파의 비판 대상이 됐다.
 
1991년 - 정전협정 이후의 평화유지활동은 무력행사가 아니다
미야자와 기이치 전 일본 총리. [중앙포토]

미야자와 기이치 전 일본 총리. [중앙포토]

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무력으로 점령하자 미국 등 34개국이 연합군을 편성해 쿠웨이트 탈환 작전을 벌였다. 이른바 걸프전이다. 교전권이 없는 일본은 작전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130억 달러(약 15조원)에 달하는 자금과 더불어 자동차, 워크맨 등의 물자를 연합군에 지원했다.
 
전쟁이 끝난 뒤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총리는 "정전협정이 성립한 뒤에 이뤄지는 평화유지활동은 무력행사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해석을 발표하면서 자위대 해외파병의 근거를 마련하고, 자위대를 페르시아만에 파견해 기뢰제거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연합군에 참여하지 못한 일본의 공헌은 세계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연합군의 승전 후 쿠웨이트측이 작성한 감사장에 일본의 이름이 포함되지 않은 사건은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과 무력감을 가져다줬다.
 
1997년 - 후방에서 미군 지원은 가능하다
90년대 동아시아 안보는 위태로웠다. 93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하고, 96년엔 중국과 대만의 갈등이 심화됐다. 미국과 일본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97년 미일 가이드라인을 개정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 측은 전투가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예상되는 후방지역에서 미군을 지원하는 것은 무력행사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해석을 추가했다.
 
2001년 - 비전투지역에서 다국적군 지원은 가능하다
9·11 테러는 일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 정부는 테러특별조치법을 통해 비전투지역에서의 다국적군 지원은 무력행사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해석을 더했다. 이로써 정전협정 후의 평화유지활동뿐 아니라 분쟁이 진행 중이더라도 비전투지역이라면 자위대의 해외 파병이 가능한 근거가 마련됐다.
 
2015년 - 집단적 자위권 행사는 가능하다
2015년 10월 자위대의 집단적 자위권을 허용하는 반대하는 일본 시민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중앙포토]

2015년 10월 자위대의 집단적 자위권을 허용하는 반대하는 일본 시민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중앙포토]

자위대의 행동을 구속하던 가장 큰 족쇄 가운데 하나는 집단적 자위권이었다. 2014년 7월 일본 정부는 "일본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나라에 무력공격이 발생해 일본의 존립이 위협받고, 국민에게 명백한 위험이 있는 경우 최소한의 실력행사는 헌법상 허용된다"는 새 헌법 해석을 도입하며 집단적 자위권 행사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듬해 9월엔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규정한 안보법제를 도입하면서 족쇄를 완전히 벗어던졌다.
 
이로써 자위대는 일본이 직접 공격을 당하지 않더라도 일본의 안전이 위협받거나 국제사회의 평화가 위태롭다고 판단될 경우엔 세계 어디서든 교전이 가능해졌다.
 
2017년 - 자위대의 적 기지 공격도 가능하다?
집단적 자위권까지 손에 넣은 일본 정부의 다음 목표는 적 기지 공격 능력 보유다. 8월 취임한 오노데라 이쓰노리(小野寺五典) 일본 신임 방위상은 자위대의 적 기지 공격 능력 보유를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오노데라는 지난 3월 자민당 안전보장조사회가 적 기지 공격능력 보유를 요청하기 위해 정부에 제출한 제언서 작성을 좌장으로서 주도하는 등 자위대의 공격 능력 필요성을 꾸준히 강조해 온 인물이다.
 
일본 정부 내에선 이미 자위대의 적 기지 공격이 특정 조건 하에선 전수방위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견해가 공유된 상태다. 이전처럼 헌법 해석 변경이나 방위계획대강 변경 등 개헌을 우회하는 수법으로 자위대에 적 기지 공격 능력을 안겨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기준 기자 foridealis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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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