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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구의 NEAR 와치] 촛불신탁의 자기암시와 고르디우스의 매듭

정덕구 NEAR재단 이사장

정덕구 NEAR재단 이사장

노무현 대통령 사후, 그의 지지자들은 그에 대한 부채 의식에 몸을 떨었다. 그러기를 9년, 그들은 다시 환희에 찬 승자 파티를 즐기고 있다. 파티의 헤드테이블에는 수많은 대선 승리의 공신과 함께 노무현 시대 이후 잊혀진 진보적 인물들이 대거 등장했다. 승자의 파티는 구름 위에서 열렸다. 그들을 구름 위로 올려놓는 부양력은 바로 촛불 민심의 높은 지지율이다. 그리고 승자가 구름 위에 오르면 지상의 엄중한 일들이 작게 보이고 위험과 비용 계산능력이 약화되어 어려운 일도 쉽게 결정한다. 더욱이 지금 야당들이 지리멸렬 상태여서 집권세력이 더 대담해지고 마음 놓고 오만해지는지 모르겠다.
 
석 달 가까이 문재인 정부와 집권 여당은 그동안 준비해 온 혁명적 국정운영 방안을 쾌도난마처럼 밀어붙이고 있다. 그동안 소수파 논자들이 주장해 온 내용들이 대거 채택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면서 도처에서 파열음을 내고 있다. 무엇보다 크게 우려되는 것은 그 추진 방식과 태도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운영 방식을 보고 있노라면 아시아 제패의 신탁을 받았다는 자기암시(自己暗示)에 빠진 알렉산더 대왕의 과속 스캔들을 연상하게 한다. 알렉산더 대왕(BC 356~323)은 전설적인 ‘고르디우스 매듭’을 하나하나 풀어내는 대신 단칼에 잘라버린 후 약관 20세에 마케도니아의 왕이 됐다. 그는 자신의 등극이 “이 매듭을 푼 자가 아시아를 제패할 것이다”라는 고르디우스의 신탁에 따랐다는 자기암시에 빠졌다. 이것이 자기 확신으로 굳어지면서 그는 속도전으로 세계 정복을 밀어붙이다가 3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프톨레마이오스와 같은 절친들의 속도 조절 충고마저 물리치고.
 
자고로 역사에 길이 남을 국가의 중대사를 짧게 논의한 후 단칼에 결정하는 것은 그 주체가 어떤 신탁 의식과 자기암시에 빠졌을 때 그렇다. 우리는 집권 후 석 달 가까이 문재인 정부가 휘몰아가는 정책실험들을 보면서 촛불신탁의 자기암시에 빠져 있지 않나 하는 두려움이 생긴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문재인 대통령은 촛불의 위력이 살아 있을 때 모든 대선공약을 밀어붙여야 한다는 강박관념, 그리고 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부채감과 조급한 과업 의식에 사로잡힌 것 같다.
 

사실 촛불은 박근혜 정부의 국정 농단과 민생피폐에 대한 군중들의 분노 표출이었다. 그로 인해 탄핵과 조기대선 국면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이러한 여건에 힘입어 문 대통령이 탄생했다. 그러나 문 대통령 스스로가 촛불신탁을 받아 대통령이 됐거나, 그 힘으로 그동안의 축적과 궤적을 모두 부수고 지워도 된다는 역사의 위임을 받은 것은 절대 아니다. 같은 이치로 문 대통령의 대선공약들을 모두 촛불과 연결시키는 것은 촛불의 진정한 뜻과 거리가 있다. 그리고 촛불의 힘을 바탕으로 공약을 이행하려는 의도로 숙의(熟議) 민주주의를 앞세우기보다 여야 간 협치를 통해 정면승부 하는 것이 옳은 자세다.
 
특히 탈원전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정책 모험심, 최저임금 1만원의 달고도 쓰디쓴 목표, 비정규직의 무분별한 철폐, 고소득자 중과세 추진 등 국정의 근본을 흔드는 중대사를 충분한 공론이나 국회 협조 없이 쾌도난마식으로 밀어붙이는 국정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다. 창조적 파괴는 시간을 두고 새로운 것을 생성시켜 옛것을 밀어내며 서서히 진행된다. 마찬가지로 문 대통령 정부가 풀어내야 할 매듭들도 생태계의 변화가 반영된 오랜 축적이기 때문에 새로운 대체안 없이 단칼에 잘라낼 수는 없는 것이다.
 
세상에 어떤 변화도 비용을 수반한다. 그러나 진보 사회주의의 특징은 비용 개념이 약하다는 것이다. 부자나 주류 세력에 떠넘겨 보았자 결국 그 비용 대부분은 시장에 환류돼 시장 참여자인 국민과 다음 세대에 전가된다. 과거 실패한 5년 단임 대통령들 대부분은 스스로 단임 대통령이라는 한계 의식에 갇히길 거부했다. 그리고 나름의 자기암시 속에서 과거 부정과 단절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려는 유혹에 빠졌다. 이렇게 5년 단임 정치의 회전목마 위에서 우리는 축적의 시간을 갖지 못했다. 그러면서 나라는 정체에 빠졌다.
 
이제 문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들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촛불신탁 의식과 노무현 시대 향수에서 벗어나 미래를 위한 축적의 시대를 일궈야 한다. 무엇보다도 개헌, 안보위기 극복, 경제회생 등을 중심으로 국정 우선순위를 재조정하고, 과속 추진 중인 국가 중대사의 결정을 좀 더 신중하게 하여 하나하나 매듭을 잘 풀어나가기 바란다.
 
정덕구 NEAR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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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