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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일의 시시각각] 공론화는 죄가 없다

홍승일 수석논설위원

홍승일 수석논설위원

신고리 원전 5, 6호기 건설 중단에 관한 공론화위원회가 시민배심원단을 꾸리지 않을 수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 27일, 문득 ‘12인의 성난 사람들’이라는 옛 미국 영화를 떠올렸다. 1957년 개봉된 시드니 루멧 감독의 이 흑백영화는 꼭 60년 지난 오늘날에도 배심원 법정 드라마의 걸작 소리를 듣는다. 내용은 슬럼가 10대 청소년의 존속살해 사건 재판이다. 검찰의 명백한 증거는 차고 넘치는데 건축가인 배심원(헨리 폰다 분)이 ‘합리적 의심’을 갖고 치밀한 고증과 논리를 동원해 다른 배심원 11명을 한 사람씩 끈질기게 설득해 나간다. 코웃음치거나 짜증부터 내던 이들이 차례로 흔들리면서 마침내 12명 만장일치 무죄를 끌어내는 과정이 숨 가쁜 밀도로 이어진다.
 

민간의 원전 중단 결정은 어불성설
국론 분열 통합의 장으로 거듭나야

공사가 중단된 울산 신고리 원전 주변에도 ‘성난 사람’이 우글우글하다. 설득이 어려워 보인다. 이해가 첨예하게 달린 현지 주민과 공사 관계자들이 그럴 것이고, 좀 떨어져서 결연한 눈빛으로 응원하거나 경원하는 ‘원전 마피아’와 ‘환경·탈핵 탈레반’도 있다. 이런 살벌한 분위기에서 영화처럼 12대0의 똑 부러진 무죄 평결을 내놓아야 할 시민배심원단을 꾸리기 힘들었을지 모른다. 직접 매몰 비용만 2조6000억원에 달하는 건설 중단 결정의 당사자로서, 언젠가 돌아올지 모를 법적 책임의 부메랑도 신경 쓰였을 것이다.
 
대법관 출신 공론화위원장을 비롯해 민간 위원들은 이토록 ‘손에 흙 묻히길 싫어하는’ 기색인데 홍남기 국무조정실장은 여전히 “정부는 위원회의 결정에 따른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입장을 되뇌었다. 민간인들은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에 따른 공론조사를 참고자료로 넘기고 싶은데 정부와 청와대는 건설 중단 결정문을 주문하는 희한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동상이몽이다.
 
공론화위원회가 신고리 원전 건설 중단에 관한 ‘배심’을 하지 않기로 한 건 잘했다. 그런 중대 국사를 민간이 결정하도록 하면 정부와 국회는 왜 있는가. 하지만 민간 주도 공론화 작업까지 흐지부지돼선 곤란하다. 에너지 민주주의에 입각한 공론화위원회는 시민 주도 촛불정치의 유산이라는 논란을 낳고 있다. 하지만 그 덕에 나라를 두 쪽 낼 듯한 원전 갈등을 둘러싸고 건국 이래 처음 공론의 장이 섰다. “신뢰하기 힘든 여론조사를 시민들의 학습과 토론으로 정제하는 숙의(熟議)민주주의의 실험장으로 삼아야 한다”(한국행정연구원 은재호 선임연구위원).
 
공론조사는 대의민주주의의 쇠락을 보완해 현장 주민의 염원, 비전문가 계층의 집단지성을 반영한다. “전쟁은 군인에게만 맡기기엔 너무 중요하다”(클레망소 전 프랑스 총리). 탈핵 진영이 자주 인용하는 이 문구처럼 원전을 원자력 전문가에게만 맡길 수 없다면 향후 에너지 전환 정책의 주체를 어떻게 구성할지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원전·에너지 전문가들도 원전과 석탄을 포기하면 전기값이 얼마쯤 오를지 공론조사 과정에서 국민 앞에 제시했으면 좋겠다. 진영별로, 입장에 따라 너무 많은 수치들이 중구난방 난무하고 있다. “전력 공급 과잉인 상태에서 전기요금이 절대 올라갈 수 없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는 안이한 정부 시각에도 경종을 울려줘야 한다.
 
공론조사 과정에서 ‘12인의 성난 사람들’처럼 처음엔 성내다가도 헤아리고 공감하는 경청과, 옳고 그름을 초월하는 개시개비(皆是皆非)의 자세가 긴요하다. 공론화에 빠듯하게 석 달을 잡아놨지만 부족하면 반 년, 1년의 끝장토론이라도 해서 원전 대타협에 다가가야 한다. 그 정도 뜸 들일 가치가 있을 만큼 원전과 에너지 전환 문제는 21세기 국가대계다. 
 
홍승일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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