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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를 던져 한은법 개정 막아낸 김유택 총재

[중앙은행 오디세이] 김유택 총재 사퇴 
1 1956년 5월 제3대 정·부통령 선거 개표 장면. 대통령은 자유당의 이승만 후보가, 부통령에는 민주당의 장면 후보가 각각 당선됐다.

1 1956년 5월 제3대 정·부통령 선거 개표 장면. 대통령은 자유당의 이승만 후보가, 부통령에는 민주당의 장면 후보가 각각 당선됐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선관위원으로 이기붕 낙선 불러
자유당계 인태식 장관과 대립
56년 한은법 파동의 원인이 돼
이승만 “잠시 쉬라”며 사퇴 종용

맥아더 전 유엔군사령관이 1951년 4월 19일 미 의회에서 행한 고별연설의 한 대목이다. 오랜 군 생활을 마치고 낙향하는 노장의 의연한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우리는 이형기 시인의 ‘낙화’를 떠올린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아름다움을 비장미라 부른다.
 
평범한 월급쟁이에게는 비장미라고 부를 만한 순간이 거의 없다. 은행원에게는 비장미가 어울리지도 않는다. 사교적인 성격에 술을 좋아하는 김유택 한국은행 총재도 비장미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해방 직후 가족들과 재회를 약속하며 소련군 치하의 고향 해주를 단신으로 탈출하던 것이 거의 유일하게 비장한 순간이었다.
 
그러던 그가 1955년 위기를 맞았다. 그해 9월 국제기구(IMF·IBRD) 가입 절차를 모두 마치고 한참 기분이 좋을 때 김현철 재무장관이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김현철 장관은 예고 없이 총재실을 찾아와서 한은의 은행감독 기능을 재무부가 회수하겠다고 통보했다. 때마침 김유택 총재의 임기만료일이 다가오는데, 은행감독권을 순순히 포기하면 그 대가로 연임을 고려하겠다는 회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김유택은 자기보다 열 살이나 많은 김현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재무장관께서는 국회가 제정한 한은법을 행정조치로 변경하려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대통령께서 혹시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도 재무장관으로서 만류하셔야지, 어떻게 그런 위법행위로 평지풍파를 일으키려고 하십니까?”라고 꾸짖듯 대꾸했다.
 
김유택이 장관에게 강공을 퍼부은 것은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유택은 이승만 대통령과 고향이 같았다. 화폐 개혁과 국제기구 가입 등의 혁혁한 공로도 있었다. 그러므로 ‘장관은 나의 연임 문제에 끼어 들 구석이 없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실제로 경무대는 한 달 뒤 그의 연임을 공표했다.
 
그날 위법이라는 말 앞에서 김현철은 후퇴했지만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총재가 연임된 뒤에도 한은법 개정안을 들고 이기붕 국회의장을 찾아가 협조를 구했다. 김유택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기붕을 쫓아가서 “재무부가 그런 일을 떠들고 다니는데, 세상 사람들은 자유당이 법을 위반했다고 할 것이며 이는 당의 명예를 위해서도 절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고 설득했다. 이기붕은 금융계 출신 최순주 국회부의장과 상의한 뒤 김유택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리고 김현철에게는 포기하라고 설득했다. 김유택의 완벽한 판정승이었다.
 
 
“중앙은행 총재는 압력과 유혹 이겨야”
2 재무부는 한은법 개정의 이유부터 밝히라는 동아일보 사설(1956년 12월 11일). '조선총독부 중추원 식'의 절대 복종만을 능사로 삼는 정부를 질타했다

2 재무부는 한은법 개정의 이유부터 밝히라는 동아일보 사설(1956년 12월 11일). '조선총독부 중추원 식'의 절대 복종만을 능사로 삼는 정부를 질타했다

하지만 김현철도 뒤끝이 있었다. 금융통화위원들의 임기만료로 4인이 공석이 될 때까지 후임자 임명사무(한은법시행령 제4조)를 외면해서 금통위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중 1956년 5월 김현철이 물러나고 재무차관에는 천병규(훗날 재무장관) 한은 조사부장이 임명됐다. 바야흐로 재무부와 한은의 관계는 개선되는 듯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김현철의 뒤를 이은 인태식 장관은 그해 가을 갑자기 기자회견을 열어 전임자가 시작한 한은법 개정을 마무리하겠다고 선언했다. 사세국장(오늘날 세제국장)이던 인태식과 이재국장이던 김유택은 한때 재무부 동료였다. 하지만 일제 때 세무서장을 지낸 인태식이 김유택보다 금융전문가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한은법을 물고 늘어진 데는 이유가 있었다.
 
1954년 총선을 앞두고 여당은 김유택을 자유당 상임위원으로 임명하려고 했다. 국민의 신망을 받는 한은 총재의 이미지를 선거에 이용하려던 것이다. 하지만 김유택은 한은법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자유당 상임위원 직과 입당 제의를 모두 거절했다. 1956년 대선 때는 중앙선거관리위원 직 제의가 있었는데, 이것은 수락했다. 정치적 중립은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탈이었다. 1956년 대통령 선거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1960년 부정선거의 예고편이었다. 여당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낙선이 분명해지자 자유당은 유일하게 남은 대구 지역의 개표를 중단시키고 결과를 뒤집으려 했다. 그러자 선관위원 김유택이 개표중단 사태에 이의를 제기했다. 결국 사흘 만에 개표가 속개되어 야당의 장면 후보가 당선됐다. 그때 이기붕 계파는 김유택을 비협조적인 인물로 찍었다. 자유당 인태식 의원은 재무장관이 되자 김유택을 솎아 낼 방법부터 찾았다. 이미 한 번 홍역을 치른 한은법이 빌미였다.
김유택 총재의 결단에 영향을 미친 빌헬름 포케. 라이히스방크 이사였던 그는 히틀러 정권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 해임됐다가 종전 후 9년 간 도이치란더방크(서독 중앙은행)의 총재로 근무했으며, 1957년에는 분데스방크의 초대 총재가 됐다. 신·구 중앙은행의 가교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김유택과 같았다.

김유택 총재의 결단에 영향을 미친 빌헬름 포케. 라이히스방크 이사였던 그는 히틀러 정권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 해임됐다가 종전 후 9년 간 도이치란더방크(서독 중앙은행)의 총재로 근무했으며, 1957년에는 분데스방크의 초대 총재가 됐다. 신·구 중앙은행의 가교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김유택과 같았다.

 
김유택은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가 서독 중앙은행의 빌헬름 포케 총재의 말을 떠올렸다. 히틀러 정권시절 통화정책의 중립성을 지키려다가 해임된 적이 있던 포케는 국제통화기금(IMF) 연차총회장에서 김유택을 만났을 때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줬다. 그리고 “중앙은행 총재는 남들보다 지식이 더 많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킬 의지와 용기가 더 필요합니다. 정치적 압력과 유혹을 이겨나갈 수 있는 담력과 건전한 상식을 갖춘 사람이어야 하지요”라고 충고했다. 김유택은 그 충고를 떠올리며 기자들을 불렀다.
 
“한국은행법을 온전히 실행해 본 적도 없는 이 마당에 무슨 결점이 있는지 파악하지 않고, 제시도 못하면서 무조건 개정만 하겠다는 저의를 모르겠습니다. 저의 견해로는 한은법을 개정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완전히 시행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로써 재무부와 한은의 대결은 루비콘강을 건넜다. 여론은 한은과 김유택을 지지했다. 하지만 여권 핵심부는 김유택이 평지풍파를 일으켰다고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언론을 통해서는 김유택의 수뢰 의혹도 흘렸다. 김유택은 연일 ‘가짜뉴스’를 읽으면서 자신의 입지가 줄어드는 것을 직감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사람을 교체할 때는 보통 당사자를 불러 거두절미하고 “자네 좀 쉬지”라고 했다. 그러나 김유택에게는 아주 조심스럽게 상황을 설명했다. “국무회의에서 여러 장관이 모두 그러는데, 한은이 대출을 많이 해서 인플레가 일어났고, 한은 해외지점 직원 봉급이 외교관보다 많아 외화를 낭비한다는 거야.” 특별히 잘못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에둘러 말한 것이다. 그 자리에서 김유택이 동의하지 않자 이틀 뒤 다시 불러서 “여러 사람들이 자네를 찍어 넘기려고 해. 백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으니 젊은 자네가 사표를 내고 좀 기다려 봐”라며 최후통첩 겸 위로의 말을 전했다.
 
 
재무부, 한은 권한축소 꾸준히 시도
며칠 뒤인 1956년 12월 12일 김유택은 사임했다. 언론에서는 한은 총재의 이유 없는 중도사퇴를 1면으로 보도하거나 사설로 다뤘다. 여당지인 서울신문도 그의 이임사를 생생히 전하면서 그를 동정했다. “한은법 개정은 국가의 주축을 좌우하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애초부터 저의 진퇴를 도외시하고 명백히 시비를 가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역부족으로 이 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과 작별하게 됐습니다. 이제 떠나는 마당에서 나는 아무런 후회나 여한이 없습니다. 내가 만들고 오늘날까지 지켜 온 한은법의 정신을 후임 총재와 직원 여러분들께서 일층 발전시켜 주실 것을 믿는 바입니다.” 김유택의 귀거래사를 듣는 직원들은 똑같이 낙화를 떠올렸다.
 
1956년의 한은법 파동은 대선 이후 위기를 맞은 이기붕 계파가 피아(彼我)를 가르는 과정에서 불거진 해프닝이었다. 정치문제를 경제문제로 포장하다 보니 싸움은 엉성하고 유치했다. 재무부는 아무 관심도 없고 지식도 없는 주한 유엔군사령부의 윌리엄 원 경제조정관에게 지지를 호소했고, 한은은 6년 전 한은법을 만든 미 연준의 블룸필드 조사부 과장을 불러들여 개정 반대를 부탁했다. 후진국 특유의 사대주의였다.
 
김유택의 퇴임 후 대통령은 그의 공적을 기리는 성명 발표를 통해 미안함을 표시했다. 이후 한은법 개정 추진이 중단됐고, 한은 직원들은 “총재가 자리를 던져 한은법을 지켰다”며 고마워했다. 그러나 재무부는 그때 만든 한은법 개정안을 포기하지 않았다. 금통위를 한은에서 분리하거나, 금통위의 적용을 받지 않는 다수의 특수은행을 설립하거나, 재무장관이 금통위 의결에 대해 거부권을 갖거나, 부총재(오늘날 부총재보)에게 임기를 두거나(1962년 이전 부총재는 임기가 없는 직원이었다), 한은에서 은행감독과 외국환업무 기능을 축소하는 카드들을 기회가 될 때마다 하나씩 꺼내 들어 한은을 압박했다.
 
한편, 한은법 파동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기붕은 김유택의 후임자를 점지해 두고 있었다. 그런데 김유택이 사퇴한 뒤 그에게 총재직을 제안하자 뜻밖에도 당사자가 정중히 제안을 거절했다. 일이 뒤틀렸다. 이것이 다음 이야기의 주제다.
 
 

차현진 서울대 사회과학대학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올해로 33년째 한국은행에 근무 중이다. 『애고니스트의 중앙은행론』, 『숫자없는 경제학』, 『금융 오디세이』 등 금융 관련 다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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