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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고정된 주의가 없다”… 좌우 아닌 그들의 자리는 없었다

[배영대의 걸으며 생각하며] 박열과 아나키즘
박열의 존재 의미는 기나긴 ‘법정 투쟁’에서 빛을 발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모두 비판하는 아나키스트로서의 면모가 확인되는 것도 법정 진술을 통해서다. 오른쪽 작은 사진은 첫 공판에서 조선옷을 입고 법정에 나온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모습. [사진 박열의사기념관]

박열의 존재 의미는 기나긴 ‘법정 투쟁’에서 빛을 발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모두 비판하는 아나키스트로서의 면모가 확인되는 것도 법정 진술을 통해서다. 오른쪽 작은 사진은 첫 공판에서 조선옷을 입고 법정에 나온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모습. [사진 박열의사기념관]

역사 영화에는 대개 가공인물이나 상황이 설정되기에 ‘이 영화의 특정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다’는 자막이 깔리곤 한다. 허구(픽션)를 통해 극적 재미를 높이려는 장치인데 ‘팩션(팩트+픽션)’이란 말이 거기서 생겨나 역사극의 한 장르처럼 여겨진다. 영화 ‘박열’은 이례적이다. ‘이 영화의 인물과 배경은 사실’이라는 자막으로 시작했다. 수많은 사실 가운데 특정한 사실을 선택해 작품을 구성하는 일에 이미 해석이 들어가게 마련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그런 자막은 성립할 수 없다. 하나 박열의 삶을 추적하면서 예외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잊혀진 혁명가’ 박열(본명 박준식·1902~74), 무려 22년2개월의 감옥살이를 한 그의 삶은 사실만을 죽 열거해도 ‘아니 이런 인물이 있었어’ 하고 놀랄 만한 극적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그의 동지이자 부인이었던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1903~26)와의 ‘비극적 열애’도 그야말로 영화 같은 현실이었다.

무려 22년2개월 기록적 옥살이
아무도 기억 않는 ‘잊혀진 혁명가’
자본주의·공산주의 모두 비판
‘제3의 길’ 혹은 중도파의 원조

‘아나키즘 =무정부주의’ 번역은 문제
파괴·무질서·반체제 이미지 커
요즘 ‘무강권주의’로 쓰는 추세
‘小國寡民’ 노자·장자 사상과 닮아

 
일제강점기 아나키스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박열은 경북 문경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당대의 수재들이 모이던 경성고보(현재 경기고)에 경북도청 장학금까지 받으며 입학한다. 미래의 교사를 꿈꾸던 그의 삶은 18세 때 겪은 1919년의 3·1만세운동 이후 바뀐다. 두 달 넘게 전국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한 뒤 학교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본격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아나키스트 단체를 잇따라 만들었고 단체의 기관지 주간을 역임하면서 일왕 부자 폭살 계획을 추진하다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는다.
 
이번 영화는 주로 20대 초반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법정 투쟁에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그것은 일부다. 그 뒤의 삶도 파란만장하다. 박열은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됐지만 1945년 해방이 되고 나서야 햇볕을 볼 수 있었다. ‘재일조선거류민단’(민단)의 초대 단장을 맡아 민단이 자리를 잡는 데 기여한 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지지하며 이듬해 영구 귀국할 때만 해도 그는 단연 화제의 인물이었다. 파인 김동환이 해방 후 속간한 잡지 ‘삼천리’(1948년 9월호)는 “23년 재옥(在獄)한 옥중 영웅 박열씨”라는 제목 아래 그의 귀국 소식을 한 개 면 전체를 통해 전하고 있다. 이런 극적 인물이 왜 그동안 까마득하게 잊혀졌을까.
 
지난 12일 박열의 고향인 경북 문경을 찾아갔다. 궁금증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문경새재 톨게이트를 나와 차로 3분 정도 지나자 박열의사기념관 안내표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비게이션이 엉뚱한 논길 마을로 안내했다. 기념관에 전화를 걸어 안내받고 나서야 찾아갈 수 있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서울 쪽에서 아래로 기념관을 찾을 때마다 이런 일이 반복된다고 했다. 어쨌든 목적지에 도착한 후의 느낌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박열의 생가와 가네코의 무덤이 기념관과 함께 제법 근사하게 공원으로 조성돼 있었다. 뭔가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아나키스트와 박열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낮았던 것에 비하면 2012년 10월 개관한 기념관의 외형은 비교적 잘 갖춰져 있었다. 문경시 예산 지원으로 학예사 1명을 포함해 상근 직원 3명이 빠듯하게 운영해 나가고 있었지만 결코 초라해 보이지 않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박열의 무덤이 없는 것이라고 할까.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돼 74년 타계한 뒤 평양 교외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장됐다고 한다.
 
일본 유학 시절의 청년 박열

일본 유학 시절의 청년 박열

“마르크스나 레닌이 뭐라 하든 상관없다”
아나키즘이 궁금증을 풀 열쇠였다. 박열이 주도적으로 참여해 1921년 11월 창립된 아나키즘 단체 ‘흑도회(黑濤會)’의 선언문은 그가 지향한 사상의 특징을 보여 준다. “우리는 어떤 고정된 주의가 없다. 인간은 일정한 틀에 박혀 버리면 타락하고 멸망하게 마련이다. 마르크스나 레닌이 무엇이라고 하든 크로폿킨(아나키즘 이론가)이 무엇이라 하건 우리와는 상관없다. 우리에게는 우리로서 존중하여야 할 체험이 있고 명분이 있다.”
 
1917년 러시아 공산혁명 성공으로 탄생한 신생 국가 소련에 당시 많은 진보적 지식인이 지지를 보내던 시절에 그 권력의 맹점을 지적했다니 놀랍다. “우리는 각자의 개체적 자유를 무시하고 개성의 완전한 발전을 방해하는 모든 불합리한 인위적 통일을 하려는 데는 끝까지 반대한다”는 조항도 주목할 만하다.
 
1 아나키스트·사회주의자가 모여 만든 흑도회 기관지 ‘흑도’ 창간호. 박열이 주간을 맡았다.

1 아나키스트·사회주의자가 모여 만든 흑도회 기관지 ‘흑도’ 창간호. 박열이 주간을 맡았다.

박열은 흑도회 기관지 ‘흑도’의 주간을 맡아 가네코와 함께 잡지 발간 전 과정을 거의 떠맡다시피 했다. 흑도회에는 박열을 비롯해 일본의 아나키스트 오스키 사카에(大杉榮)의 영향을 받은 이가 많이 참여했다. 그러나 흑도회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해산되는데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의 갈등 때문이었다. 흑도회에 참여했던 김약수·조봉암 등 사회주의자들은 분화돼 나갔다.
 
2 박열이 출옥 후 민단 초대 단장을 지낼 때 들고 다닌 가방. 박열의 유일한 유품이다. [사진 박열의사기념관]

2 박열이 출옥 후 민단 초대 단장을 지낼 때 들고 다닌 가방. 박열의 유일한 유품이다. [사진 박열의사기념관]

아나키즘이 공산주의를 비판한다고 해서 자본주의를 옹호한 것은 아니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모두 비판하고 배격한 데에 아나키즘의 딜레마가 존재했다. 권력을 비판하면서 자신이 권력을 차지하지 않으려고 하는 아나키즘의 비정치성이었다. 아나키즘이 일왕 제거를 목표로 삼은 것은 인간의 자유를 말살하는 권력의 최고봉이 일왕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네 편 내 편 가르기가 일상화된 시대에 ‘원조 제3의 길’ 아나키스트가 설 자리는 없었다. 6·25전쟁까지 벌어지며 격렬하게 이념이 맞부딪친 한반도에서의 상황은 더욱 그러했다. 그동안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에 희생된 중도파 지식인이나 정치인을 재조명하는 경우에도 아나키스트는 소외됐다.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가 잊혀진 데는 ‘무정부주의’라는 번역어도 작용을 했다. 프랑스 아나키스트 프루동이 사용해 유명해진 아나키(Anarchi)라는 말의 유래는 고대 그리스로 올라가는데 호메로스와 헤로도토스는 아나키를 ‘지도자가 없는, 장수가 없는’의 의미로 사용했다. 그런데 무정부주의라는 번역에는 ‘파괴’ ‘무질서’ ‘반체제’의 이미지가 두드러졌다. 그런 연유로 요즘은 그냥 아나키즘이라고 쓰거나 굳이 번역할 경우 ‘무강권주의(無强權主義)’로 쓰는 추세다.
 
90세 이문창 옹 “박열은 얌전하고 침착했어요”
‘한국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기념사업회’ 이문창(90·『해방 공간의 아나키스트』 저자) 회장은 매년 이맘때면 문경을 찾는다. 7월 23일이 가네코 후미코가 의문의 옥사를 한 날이기 때문이다. 참배도 하고 워크숍도 연다. 박열에 대한 기억을 간직한 몇 안 되는 생존자인 그는 정정한 목소리로 회고했다. “그 양반 참 얌전하고 침착했어요. 표현하시는 것이 그렇게 떠벌리는 양반이 아니에요. 침착한 양반이에요.” 일왕 폭살을 기도하고 최장기 수감생활을 한 박열이었지만 ‘침착’과 ‘얌전’이란 수식어가 어색하게 들리지 않았다.
 
1927년생인 이 회장은 한국 아나키즘의 맥을 잇는 ‘국민문화연구소’를 이끌어 왔다. 그를 ‘최후의 아나키스트’라고 불러도 되느냐고 묻자 그렇지 않다고 했다. 요즘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중국에서 활동한 이회영(1867~1932)·신채호(1880~1936)·류자명(1894~1985) 선생 등이 해방 전 1세대 아나키스트이고, 자신은 해방 직후 활동한 2세대의 막내라고 했다.
 
국민문화연구소는 격렬한 정치투쟁이 아닌 농촌의 ‘신생활운동’에 주력해 왔지만 1960~70년대에는 그런 농촌 봉사마저도 곱지 않은 시선을 받으며 운영이 어려웠다고 한다. 단 하나의 이념으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 아나키즘의 속성이기에 아나키즘의 스펙트럼은 넓을 수밖에 없다. 요즘의 아나키즘은 권력의 분산을 중시하는 시민사회이론과 환경운동 분야에서 많이 주목받고 있다.
 
이 회장은 ‘작은 사회’를 이야기했다. “소사회, 소집단, 부모와 형제, 늙은이와 젊은이 등이 작은 지역과 집단에서 소통하며 사는 방식을 모색해야 합니다. 자꾸 거대사회를 지향하니까 인간의 자유와 생명력이 찌그러지고 문제가 발생합니다.”
 
아나키즘 연구자들은 그 기원을 서양 사상사에서 찾곤 하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소국과민(小國寡民:나라를 작게 하고 백성의 수를 적게 하라)’의 노자 사상이나 권력을 조롱하는 예화가 풍부한 장자의 사상은 아나키즘과 많이 닮았다. “공을 이뤘어도 거기에 머무르지 말라(功成而不居·공성이불거)”는 노자의 말은 굳이 아나키즘이란 말을 쓰지 않아도 정치 권력만을 지향하는 이들에게 영원한 동아시아의 경구로 내려오지 않았는가.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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