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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시대상 만석꾼 초상화에 난만히 꽃피었네

정재숙의 '新 名品流轉' 
채용신 작, 곽동원 초상화, 비단에 채색, 53.2×99.5㎝, 1918. [사진 서울옥션]

채용신 작, 곽동원 초상화, 비단에 채색, 53.2×99.5㎝, 1918. [사진 서울옥션]

정면을 응시하는 이 남정네, 위세가 당당하다. 몸매 좋고 차림새 윤기 난다. 구한말 만경(전북 김제 지역) 일대의 대지주였던 곽동원의 초상이다. 만석꾼으로 이름났던 이 부호는 당시 쌀 100석을 주고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그림을 의뢰받은 이는 조선 말기의 화가 석지(石芝) 채용신(1850~1941)이다. 여러 임금의 초상화, 즉 어진(御眞)을 그려 이름났던 초상화 전문화가다. 고종이 석강(石江)이란 호를 내렸을 정도라니 그 지위를 짐작할 수 있다. 대대로 무관(武官)을 지낸 집안의 장남으로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는데 무과에 급제해 벼슬이 종2품까지 올랐고 칠곡과 정산 군수를 지냈다. 1900년 고종 황제의 어진을 그리며 본격 초상화가로 나서 100여 점 작품을 남겼다. 1905년 정산 군수 시절에 위정척사파 선비인 면암(勉庵) 최익현(1833~1906)의 기개에 감동해 그로부터 우국 선열의 초상을 남기는 데 매진했고, 매천(梅泉) 황현(1855~1910)의 초상화는 보물 제1494호로 지정됐다.
 
석지 초상화의 매력은 살아 있는 얼굴보다 더 강력한 실물감에 있다. 만져보고 싶을 지경으로 촉각적인 현실감이 도드라져 사진이 표현하지 못하는 피사체의 생생함을 살려 낸다. 대상 인물의 마음을 깊이 읽어 낸 듯 사심(寫心)의 경지가 특징이다. 벼슬에서 물러나 정읍으로 낙향한 뒤 고종이 내린 호를 따 ‘채석강 도화소(圖畵所)’를 열고 주변 고을을 돌며 사람들 모습과 이야기를 채집한 공력이 배어 있어서일까. 초상화 주문이 밀려들어 아들, 손자 3대가 함께 작업했다는데 군수 출신 전업화가라는 이력도 큰 밑천이었을 것이다.  
 
지난달 28일 서울 평창동 서울옥션에서 열린 경매에서 채용신의 ‘곽동원 초상화’는 시작가 4600만원의 5배에 달하는 2억 2000만원에 낙찰됐다. 자신의 저서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3』(눌와 펴냄)에 이 초상화를 소개했던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화가 이름이 아니라 미술사 서술과 평가가 작품가에 영향을 미친 드문 경우”라고 말했다. 1980년대 후반에 서울 연희동 곽동원의 손자며느리 집에서 실물을 조사했다는 이태호 명지대 초빙교수는 “박물관에서 샀으면 했는데 2억원이 넘다 보니 적은 예산이 감당을 못해 개인 컬렉터 수중에 들어갔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곽동원의 초상화는 인물의 존재감이 뛰어난 정면 전신상이란 점 외에도 화문석과 옥색 복식의 화려한 장식, 손에 든 부채와 안경 등 채용신 그림 특유의 장점이 잘 나타나 있어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잡티·수두·주름 등 섬세한 피부 묘사의 사실주의, 면으로 입체성을 구성한 점을 보면 재료만 동양화의 것이지 기법과 효과에서는 서양화에 다름없다. 중인층을 중심으로 한 신흥 부호의 세력이 커지면서 민간에도 초상화를 모시는 풍조가 일어나는 구한말 사회상의 변동을 증거하는 귀한 작품이다.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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