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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캉스, 비움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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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트인 바다 바람을 쐬며 걷노라니 마음도 탁 트인다. 영화 시사 후 관객과의 대화를 위해 제주도를 찾아 주말 휴가 덕까지 누리게 됐다. 반복적 일상을 벗어나 어디론가 떠나는 여름 휴가, 그것을 굳이 ‘바캉스’라고 부르는 이유를 바다 바람이 가르쳐 준다. “비어 있거나 무심한 상태를 말하는 바캉(vacant)의 명사형인 바캉스(vacances)에서 여러 날들을 뜻하는 복수형 ‘s’가 붙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해 주시던 프랑스어 선생님의 말씀도 떠오른다. 그런 점에서 바캉스는 무위자연의 경지를 체감하는 또 다른 언어적 표현이란 생각도 든다. 비움은 밀물과 썰물 움직임으로 모든 것을 쓸어 가는 바다의 행위 양식이기도 하다.
 

바다 생각날 때 보는 영화'투 라이프'
아우슈비츠 죽음의 행군서 살아남아
15년 만에 기적적으로 만난 세 여성
바캉스 떠나 어둡고 아픈 상처 치유

육지로 돌아와 연일 폭염을 견디노라니 바다 바람이 더욱 그리워진다. 그 대체효과로 바다로 떠나는 세 여성이 등장하는 실화영화 ‘투 라이프’(To Life, 장 자크 질베르만)를 다시 보았다. 1945년 1월 17일, 눈부시게 하얀 눈길에서 항복한 독일군이 아우슈비츠 수용자들에게 시키는 죽음의 행군 장면이 칙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세 여성이 아픔을 비워 내는 화사한 프랑스 북부 베르크 해변에서의 바캉스 풍광이 펼쳐진다.
 
1960년대 어느 여름, 15년 만에 기적적으로 만난 엘렌, 릴리, 로즈는 자매애를 만끽하며 바캉스 즐기기에 합의한다. 수용소 트라우마를 공유하며 다져진 자매애지만, 로즈는 그 시절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라는 다짐까지 받아 낼 정도로 마음이 멍들었다. 그래도 죽음의 행군까지 이겨 내며 살아나 현재 다시 만난 것은 기적이다. 이 기적에 감사하며 세 여성은 같이 요리하고 먹고 와인잔을 부딪히며 ‘삶에 건배!’(To Life)를 외친다. 건배사가 영화 제목이 된 셈이다. 현재(present)란 말도 영어로 ‘선물’이란 또 다른 뜻을 갖는 이유가 와닿는 장면이다.
 
낮에는 해변에서 활기차게 즐기지만, 이들의 과거 트라우마는 현재에도 그림자를 드리운다. 로즈가 자려고 방에 들어가면 엘렌과 릴리는 과거 기억을 소근대며 털어놓는다. 낌새를 눈치챈 로즈가 나타나 수면방해라며 신경을 곤두세우지만 그래도 엘렌과 릴리는 멈추지 않는다. 이 둘은 밤바다가 열리는 발코니로 나가 대화를 지속한다. 바로 이런 풀이를 하려고 15년 만에 기적적 해후를 한 것이 아니던가? 그런 인연과 만남의 이유 자체를 거부하려는 로즈의 이중적 도피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매애 연대로 풀려나간다. 아픈 과거를 공유하는 한편으로 이들은 각자 저마다의 트라우마를 슬슬 꺼내놓는다. 그 와중에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해 홀로 바다로 나가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 이렇게 ‘같이 또 홀로’ 가는 인생길에서 이들은 과거 기억을 풀어내는 우정의 연대로 현재진행형 삶에 건배한다. 겉으로는 화사해도 속으로는 어둡고 아픈 상처, 그것을 치유하는 바캉스의 미덕이 발휘된다. 이런 비움의 축제는 이들에게 또 다른 선물로 이어진다. 이 세 여성은 일 년에 한 번 이 바다에서, 양팔 둘러 겹어깨동무를 하고 같이 이야기하며 산책한 베르크에서 며칠간 함께 바캉스를 보내기로 약속하고 헤어진다. 30년 세월이 흘러, 노년의 세 여성이 고통스러울 때 불렀던 동요를 함께 부르는 마지막 장면은 실화 영화의 힘을 보여 준다. 세상을 떠난 세 여성의 삶을 추모하며 만들어진 이 영화는 기억의 복원과 바캉스의 비움을 이렇게 선물해 준다.
 
바다를 주 무대로 펼쳐지는 영화보기는 좋은 피서감이다. 영화 전공생들에게 ‘내 인생의 영화’하면 반드시 꼽히는 ‘400번의 구타’의 마지막 장면도 바다 장면이다. 관습과 편견으로부터의 탈주를 시도하는 자신의 소년시절을 기억하며 영화를 만든 트뤼포가 왜 바다 앞에 선 소년을 마지막에 방점처럼 찍어 냈는지 감이 잡힌다. 뇌종양으로 시한부에 직면한 한 남성이 죽기 전에 꼭 해 보고 싶은 것이 바다로 가는 것이다. 바로 그 바다로 가는 길을 시원한 탈주 드라마로 그려낸 ‘노킹 온 헤븐스 도어’도 떠오른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 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라고 시작해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삼등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라고 탈주의 흥을 돋구는 송창식의 노래가 나오는 ‘고래사냥’의 바다행도 같은 맥락으로 이어진다.
 
분단되었지만 한반도는 여전히 삼면이 바다이기에 거대한 대륙의 내지에 비해 바다로 가기 어렵지 않다. 트인 바다를 보고 숨쉬며 아픈 기억, 답답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는 비움의 미학을 마음먹기에 따라 맛볼 수 있다. 당장 떠나기 힘들다면 바다영화를 보는 문화 바캉스를 누려 보는 것도 근사한 피서일 것이다.
 
 

유지나
동국대 교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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