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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로 시장 잡겠다는 사고, 이제 벗어날 때다

사설
감사원의 감사 결과 드러난 면세점 선정 과정의 난맥상은 보는 사람을 아연케 한다. 관세청은 2015년 7월 진행된 입찰에서 매장 면적, 법규 준수 같은 항목의 점수를 조작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 결과 실제보다 190점 덜 나온 롯데가 탈락하고 대신 240점 더 받은 한화가 선정됐다. 같은 해 11월 진행된 입찰에서도 관세청의 점수 조작으로 두산이 선정됐다. 두 차례 탈락한 롯데는 청와대 지시로 신규 면세점 4곳을 추가 선정한 3차 입찰을 통해 월드타워점 사업권을 재취득했다.
 
면세점 비리의 파문은 일파만파로 번져나갈 조짐이다. 조작 의혹으로 검찰에 고발된 천홍욱 관세청장은 14일 사퇴했다. 검찰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수사 당시 대기업 조사를 맡았던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 이원석)에 사건을 배당하고 본격적인 수사에 나섰다. 점수 조작이 청와대 지시인지, 박근혜 전 대통령이 면세점 사업권을 놓고 대기업 총수들과 부당한 거래를 했는지 등을 집중 수사할 것으로 알려졌다. 로비 의혹을 받고 있는 한화·두산은 물론 롯데를 비롯한 면세점 운영 대기업들은 벌써 좌불안석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서 기업 로비 의혹 못지않게 더 주목해봐야 할 부분이 있다. 인허가권을 쥔 정부가 규제사업에 관한 권한을 자의적으로 행사할 경우 어떤 부작용이 나타나는지 하는 대목이다. ‘면세점 대전’이 벌어진 건 2012년 홍종학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0년이던 면세점 특허기간을 5년으로 줄이는 관세법 개정안을 발의하면서다.
 
10년마다 사실상 자동갱신되는 특허권을 바탕으로 롯데와 신라가 과점하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논리였다. 2013년부터 이 법이 시행되면서 면세점 특허 대전이 벌어졌다. 관세청은 구체적인 세부평가 항목을 자의적으로 정하는 밀실 심사, 심사위원 명단조차 밝히지 않는 깜깜이 심사를 통해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둘렀다.
 
이 같은 사례는 비단 면세점뿐만이 아니다. 요금 담합 의혹을 받고 있는 이동통신 사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통신 요금은 1위 사업자인 SK텔레콤의 경우 정부의 인가를 받고, KT와 LG유플러스는 신고만 하면 된다. SKT가 정부의 인가를 받는 과정에서 내용이 알려지면 경쟁업체들도 비슷한 요금제를 내놓는다는 건 업계 관계자라면 누구나 안다.
 
기업들이 경쟁을 벌이기보다는 정부의 가이드라인에 맞춰 안주하는 구조로 굳어져 버렸다. 스마트폰 가격 인하를 유도한다는 취지에서 도입한 단말기 유통구조 개선법(단통법) 역시 의도한 성과는 내지 못하고 엉뚱한 결과를 빚고 있다. 과당 경쟁을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도입한 보조금 상한선 때문에 온 국민이 비싼 가격에 단말기를 사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독과점의 피해를 우려해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며 시시콜콜한 가이드라인을 정해주는 과거의 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때가 됐다. 이제 면세점은 숫자를 정해 관세청이 특허를 주는 대신 일정한 기준을 갖추면 누구나 진입해 경쟁할 수 있는 등록제로 바꾸는 것이 시대의 변화에 적합한 방법이다. 이동통신 요금이나 단말기 가격도 규제를 확 풀어 마음껏 가격 경쟁에 나서도록 하는 방안도 검토할 만하다. 이 과정에서 편법이나 불법 등 불공정 행위를 저지른다면 철저히 가려내 엄격하게 처벌하면 된다.
 
최근 국내에서 도이체방크를 상대로 한 주가연계증권(ELS) 관련 집단소송에서 12년 만에 처음으로 120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난 것은 고무적이다. 하지만 미국에서 지난해 9월 불거진 웰스파고 은행의 유령계좌 스캔들이 집단소송을 통해 최근 1억4200만 달러(약 1600억원) 배상 합의가 이뤄진 것과 비교하면 너무 오래 걸리고 배상 규모도 작다.
 
주가 조작 피해 등 증권 분야로 한정된 범위를 모든 산업으로 확대하고 징벌적 배상을 추가하면 기업의 부당행위를 억제하는 힘으로 작용할 것이다. 기관투자가들이 갖고 있는 지분만큼 기업 경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스튜어드십코드 역시 대주주와 경영진의 전횡을 막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는 말이 있다. 선한 의도에서 시작한 일이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몇몇 대기업이 황금알을 낳는 면세점 사업을 과점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선의, 이동통신사가 담합해 요금과 단말기 가격을 높게 받는 것을 막겠다는 선의의 고민은 평가받을 만하다.
 
하지만 이런 선의에 기대 정치인과 공무원들에게 제멋대로 시장과 기업을 주무를 수 있도록 칼을 쥐여주는 건 바람직하지도, 효과적이지도 않다. ‘경쟁’이 아닌 ‘규제’의 힘에 기대 문제를 풀려는 사고에서 이제 벗어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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