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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씨, 실망입니다

김진국 칼럼
정유라씨의 돌발행동이 뉴스가 됐다. 새벽 2시 정씨가 검사의 승용차로 뛰어가는 CCTV 영상이 마치 첩보영화 같다.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 필요한 증언이다. 그런데 이런 소식을 보는 마음이 왜 가볍지 않을까.
 

DJ 정계은퇴 YS 내각제 파동 돌파
위기 확산 막고 반전의 계기 마련
타이밍 맞춰 선수 치는 것도 능력

사과 기회 날린 박 전 대통령처럼
안철수 늑장 사과 진정성 의심 받아
왜 정치 하는지 더 깊은 고민 필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정씨 때문이 아니다. 이런 아수라판을 만든 모든 책임이 결국 박근혜 전 대통령이다. 정호성 전 제1부속비서관의 통화 녹음은 결정적인 증거가 됐다.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의 수첩 56권은 박 전 대통령을 유리병 속에 가둬 버렸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단죄한 5공 비리 청문회에서 장세동 전 경호실장은 모든 책임을 떠안았다. ‘왕 실장’으로 불린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문화계 ‘블랙리스트’ 하나도 자기는 모른다고 잡아뗐다. 충성은 일방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지도자가 확고한 믿음과 권한을 줄 때 생기는 것이다. 그러기에는 박 전 대통령의 배신 트라우마가 너무 컸다.
 
박 전 대통령은 3월 21일 처음 검찰 조사를 받았다. 저녁 11시 40분쯤 조사가 끝났지만, 다음 날 아침 7시에 청사를 나왔다. 진술 조서를 고치느라 7시간이나 걸렸다. 그렇게 꼼꼼하게 손질해 형량이 얼마나 조정될 거로 기대한 걸까. 전직 대통령의 수형 기간이 그런 것에 좌우될까. 역사적 기록을 정확히 남기고 싶었을까. 그렇다면 헌법재판소의 최후 변론은 왜 하지 않았을까. 왜 탄핵 이전에 국민에게 설명해 주지 않았을까. 1인 방송 인터뷰 같은 낯 뜨거운 일들을 참모들은 왜 말리지 않았을까.
 
박 전 대통령 재판은 결국 정치 재판이다. 정치 지도자에게 중요한 것은 법정형 이상으로 국민의 심판이다. 감옥을 나와도 국민이 외면하면 죽은 것이다.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 여사처럼 국민이 지지하면 갇혀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은 정치적 재판을 그르쳤다. 민심을 몰랐다. 심지어 스스로 한 일이 무슨 일인지 몰랐다. 유신 시절의 기준으로 대통령의 권한을 제왕처럼 착각했다. 그릇된 인식에 잘못된 판단이 따를 수밖에 없다. 사과할 시기를 놓치고, 사과할 범위에도 인색했다. 모든 일을 스스로 떠안고 책임을 지는 것이 옳았다. 진술 조서를 7시간이나 수정하는 모습이 구차하고 딱하다.
 
정치지도자에게는 언제나 위기가 닥친다. 박 전 대통령의 대처는 최악이다. 다른 정치인들은 그런 위기에서 어떻게 할까. 당장 국민의당 안철수 전 대표의 위기 대처는 또다시 그런 길을 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박 전 대통령에게도 여러 차례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뒷북만 쳤다. 같은 조치를 한 단계만 먼저 취했어도 많이 달라졌을 수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2년 12월 18일 저녁 개표방송을 보고 바로 정계 은퇴성명을 작성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내각제 각서가 공개되자 바로 짐을 싸 지리산으로 갔다. 시간을 놓치지 않아 위기가 더 확산하는 걸 막았다. 오히려 반전의 기회로 삼을 수 있었다.
 
안 전 대표는 사과를 너무 미뤘다. 무엇을 기다린 건가.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면 아직도 멀었다. 재판이 끝날 때를 기다릴 게 아니라면 바로 사과했어야 했다. 무어라 변명해도 사과 수위를 최소화하려고 여론의 눈치를 봤다는 의심을 피할 수 없다.
 
국민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먼저, 더 많이 던졌어야 한다. 박 전 대통령은 내각을 국회에 맡기면서 위기를, 탄핵을 막아 보려 했다. 그러나 임명권이 대통령의 고유 권리라며 움켜쥐고, 총리 후보자를 상의도 없이 발표해 버렸다. 타이밍을 놓치면 꼭 같은 것을 내놔도 소용이 없다. 쫓기지 않고, 선수를 치는 것이 지도자의 능력이다.
 
안 전 대표의 사과는 시기가 늦어져 진정성도 의심받았다. 여론의 압력을 받아 억지로 사과하는 모양새가 됐다. 내놓은 것도 아무것도 없다. 무엇으로 책임을 지겠다는 건가. 모든 걸 걸어야 한다. 그 위기로 이익을 볼 사람도 승부를 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5공 시절 목숨을 걸고 단식했다. 모든 걸 다 던질 각오가 아니면 대통령이 될 생각을 버려야 한다.
 
안 전 대표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다르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모양이다. 김 전 대통령과 달리 안 전 대표는 확고한 지지 기반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번 정계를 은퇴하면 다시 복귀하기 어렵다고 걱정한다. 그러면 버티기만 하면 집권의 길이 열릴 수 있을까.
 
안 전 대표는 왜 정치를 하려고 하는지 돌아볼 때다. ‘정치인 안철수’를 있게 한 것은 새 정치에 대한 기대다. 한때 ‘안철수=새 정치’로 통했다. 그러나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 아무 것도 보여 주지 못했다. 정치권 밖의 논평가로서 ‘낡은 정치’를 비판할 때는 새로웠지만, 정치에 뛰어들어 ‘새 정치’를 내놓아야 할 때는 갈증만 나게 했다. 후보직을 쉽게 넘긴 것도 상처가 됐다. ‘강철수’가 아니어서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다. 서울시장이건 대통령이건 국민이 직접 뽑는 지도자다. 국민들은 새로운 영웅을 기대했다. 국민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자리다. 그런데 안 전 대표는 아무 고민도 보여 주지 않고, 국민에게 어떤 설명도 없이 쉽게 던져 버렸다. 무욕(無慾)이 아니라 무책임으로 비친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도 안 후보는 새 정치를 보여 준 게 없다. ‘MB의 아바타’ ‘갑철수’라는 말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는 이번에 사과하면서 “힘겹게 만든 다당 체제가 유지될 수 있도록 국민의당에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실 것을 호소 드린다”고 했다. 그게 새 정치인가. 그렇다면 안철수가 아니라도 가능한 것 아닌가.
 
왜 정치를 하려고 하는가. 새 정치인가, 대통령이라는 자리인가. 안 전 대표에게 좀 더 깊은 고민과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jink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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