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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냉면과 비발디로 이 여름을

레이첼 포저의 비발디 ‘라 체트라’ 연주 음반

레이첼 포저의 비발디 ‘라 체트라’ 연주 음반

바야흐로 냉면의 계절이다. 한여름 냉면집 앞에는 줄이 길게 늘어선다. 하지만 다른 식당들에 비해 자리는 빨리 난다. 시원한 육수와 쫄깃한 면발 한 젓가락이 목으로 넘어가는 순간, 기다림의 지루함도 모두 잊혀지게 마련이다. 냉면 없는 대한민국의 여름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WITH 樂 : 비발디 ‘라 체트라’

여름 음식이 냉면이라면, 여름 리듬은 보사노바다. 그런데 클래식은 어떤가. 최소한 브람스나 말러는 텁텁하고 복잡하다. 여름은 역시 비발디다. 가을에도 겨울에도 비발디를 듣긴 하지만, 가장 좋을 때는 샤워를 마치고 에어컨을 틀어 놓은 거실에서 속옷만 입고 듣는 비발디다. 선풍기 바람에 젖은 머리칼을 말리며 듣는 비발디의 협주곡은 평양냉면의 시원함에 필적한다. 음악과 더불어 금세 온몸이 보송보송해진다.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바로크 시대 협주곡의 기본구조에 따라 3악장으로 이루어진다. 느린 악장을 사이에 두고 빠른 악장이 앞뒤에 배치된다. 단순하다. 빠르게-느리게-다시 빠르게. 간결하고 빠른 음형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독주 악기와 협연 악기들이 이를 주고받는다. 음악용어로 리토르넬로 형식이라고 한다.  
 
이러한 반복 위에 조성에 변화를 주고 리듬과 악센트를 통해 음악적 변화를 끌어내는 것이 ‘빨간 머리 사제’ 비발디의 스타일이다. 그런데 한 곡 한 곡 자세히 듣지 않으면 모든 곡이 비슷하게 들리기도 한다. 비발디 애호가가 아니라면 그의 협주곡 중 인상적인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 작품 번호를 맞출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스트라빈스키가 비발디를 두고 ‘450여 개의 같은 곡을 만든 작곡가’라고 조롱한 것도 이해가 간다.  
 
비발디는 사제이며 작곡가이고 또한 당대의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자였다.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 중 가장 유명한 곡은 ‘사계’다. 오래전 연주인 이 무지치(I Musici)와 펠릭스 아요의 음반은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이 곡은 ‘화성과 창의에의 시도’ Op. 8중 앞의 4개 협주곡에 표제를 붙인 것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어디선가 흘러 나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클래식 1위에 꼽힌다. 그 다음으로 유명한 비발디의 협주곡은 Op. 3 ‘화성의 영감’이라는 12곡이다. 그 외에도 Op. 4 ‘라 스트라바간차’(화려함)나 Op. 9 ‘라 체트라’(고대 악기 리라)라는 협주곡이 자주 연주된다.  
 
현재 바로크 바이올린 연주자 중 최정상급이라고 할 수 있는 레이첼 포저는 위에 언급한 비발디의 협주곡 모두를 음반으로 남겼다. 그녀의 비발디 연주가 관심을 끌게 된 것은 2002년 음반 ‘라 스트라바간차’가 그라모폰상을 비롯해 각종 음반상을 휩쓸면서부터다. 이후 레이첼 포저는 바흐나 모차르트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다가 10년 뒤 비발디로 다시 돌아왔다. 그 음반이 2011년에 나온 ‘라 체트라’다. 12곡으로 이루어진 이 협주곡집은 몇몇 곡이 기존의 현악기에서 쓰지 않는 변칙적인 조율을 해서 이색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두 명의 바이올리니스트가 있는 음반 표지를 통해서도 눈치챌 수 있듯 9번째 협주곡은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이다.
 
레이첼 포저와 홀랜드 바로크 소사이어티는 이 음반에서 바로크 협주곡의 매력인 화합된 즐거움을 여실히 보여준다. 비발디 협주곡의 진부함을 걷어낸 것이 이 연주의 가장 큰 장점이다. 악보 한 장 한 장마다 새로운 음표를 발견하는 기분으로 연주에 임한다. 종종 바로크 음반에서 보이는 과격하고 성난 소리는 없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을 아는 이들의 진정성은 악보의 성실한 탐독과 서로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만들어내는 것으로 보인다.  
 
협주곡 4번 E장조를 보자. 현악기들이 짧고 강하게 문을 두드린다. 이어 갑자기 작고 여린 16분 음표의 바이올린이 빠른 대조를 이룬다. 몇 번의 반복 이후 바람에 물결이 밀려가듯 매력적인 바이올린 독주가 시작된다. 또 한 번의 반복 이후 포저의 독주는 어린 물고기가 물의 저항을 이해했다는 듯 자신감 있게 현악반주 위를 유영한다. 느린 악장은 ‘사계’의 여름 2악장을 닮아 정오의 나른한 고요를 독주 바이올린이 그려낸다. 이어서 나그네의 등 뒤로 불어오는 바람처럼 오케스트라가 이를 받아준다.  
 
7번의 느린 악장은 여름 강가에서 저녁놀을 바라보듯 고즈넉하고 10번의 느린 악장은 바이올린의 피치카토(현을 뜯는 기법) 위에 독주 바이올린이 작은 성당에서 나지막한 아리아를 부르듯 울린다.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인 9번에서 레이첼 포저와 주디스 스틴브링크는 서로의 옷을 골라주는 친자매처럼 다정하다. 
 
지난해 여름은 유난히 힘들었다. 올해 시작된 더위는 비발디와 평양냉면으로 이겨 보려고 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내가 사는 도시에서는 냉면집보다 유명한 밀면집이 훨씬 많다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냉면파다. ●
 
 
글 엄상준 TV PD 90emper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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