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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근법 무시한 구성 오히려 현대적, 그림으로 표현한 한자 굉장히 신선”

서혜경의 ‘책거리’, 44 x 66 cm

서혜경의 ‘책거리’, 44 x 66 cm

금광복의 ‘호랑이와 까치’, 56 x 115cm

금광복의 ‘호랑이와 까치’, 56 x 115cm

“어머, 이 호랑이 눈 좀 봐! 어쩌면 이렇게 동그랗고 커다랗게 그려놨을까?! 무섭기는커녕 귀엽기만 하네!”  
 

밀라노, 한국 민화의 매력에 빠지다

이탈리아 밀라노에 사는 한 독일계 여성이 까치와 호랑이 그림 앞에서 감탄사를 연발한다. 미장원에서 막 나온듯한 긴 속눈썹과 빨간 입술,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커다란 두 눈, 폭신폭신해 보이는 네 발, 금방이라도 누구를 홀릴 듯 요염한 자세…. 한국 사람들에게는 이미 익숙하지만 이탈리아인들에게는 신선해 보이는 이 그림, 바로 민화(民畵)다.  
 
디자인의 도시 밀라노에 한국 민화 바람이 불었다. 밀라노 스포르체스코 성 맞은편에 자리한 루치아나 마탈론 재단(Fondazione Luciana Matalon·2000년 설립) 갤러리에서 7일부터 13일까지 ‘한국 민화 특별전’이 열렸다. 사단법인 한국민화협회(회장 엄재권)가 주관해 밀라노에 민화를 선보인 것은 이번이 세 번째. 그전까지는 도자기·회화·공예품과 함께 한국 전통문화의 하나로서 소개됐으나, 민화만 단독으로 전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트페어, 공모전 개최, 해외전시 기획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한국민화협회가 유럽 디자인의 본고장인 밀라노에 당당히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그 현장에 중앙SUNDAY S매거진이 다녀왔다.

 
백화순의 ‘화조도’, 34 x 59 cm

백화순의 ‘화조도’, 34 x 59 cm

진진미의 ‘화조도’, 23 x 50 cm

진진미의 ‘화조도’, 23 x 50 cm

궁중 회화에서 출발해 조선시대 말(18~19세기) 대중적으로 발전한 민화(民畵)는 먹을 주로 사용한 선비들의 문인화와는 달리 여러 색상의 물감을 사용해 그린 화려한 채색화다. 민화라는 말은 일본인 미술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1889~1961)가 1929년 교토 민예품 전람회에서 ‘민속적 회화’라는 뜻으로 처음 사용했다. 서양의 근대미술 교육을 받은 그는 원근법을 무시하고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이며 기이한 구도로 표현된 조선의 민화에 큰 감동을 받았고, 후에 민화 수집가가 되었다. 37년 일본의 월간 ‘공예’지 2월호에 “민중 속에서 태어나고 민중에 의해 그려지고 민중에 의해 유통되는 그림이니 ‘민화’라고 부르자”고 기고한 후 이 같은 이름이 정착됐다.  
 
하지만 한국 내에서는 이 용어에 대한 부정적인 목소리가 종종 들렸고 이름을 바꾸려는 시도도 몇 번 있었지만 결국 ‘민화’로 돌아오곤 했다.  
 
엄재권의 ‘한여름밤의 꿈’, 29 x 63 cm

엄재권의 ‘한여름밤의 꿈’, 29 x 63 cm

민화는 실용성과 연속성, 상징성과 장식성이라는 목적으로 부귀다남·무병장수·입신양명·유유자적 등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표현한 그림이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까치, 재앙과 질병과 굶주림을 막아주는 호랑이, 다산을 기원하는 잉어와 연꽃, 부귀와 행복의 상징인 모란, 행운을 가져다주는 봉황은 민화의 단골로 등장하는 상징물이다. 사회 윤리의 기본 덕목을 주제로 한 글씨와 거기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려넣은 것들도 적지 않다. 너무 많은 색을 한꺼번에 사용해 일견 촌스럽게까지 느껴지기도 했던 민화는 현대에 들어 점점 진화하고 있다. 더 좋은 물감과 파스텔톤 색조의 사용, 디지털 기기의 활용 등 다양한 제작 방법으로 21세기 동시대를 반영하며 거듭나고 있다. ‘속세의 그림’이 아닌 ‘대중의 그림’으로 현대인의 일상 속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올해 처음 민화만으로 전시, 참여 작가도 4배 늘어
조영옥의 ‘연꽃’, 40 x 85 cm

조영옥의 ‘연꽃’, 40 x 85 cm

이번 밀라노 민화 전시는 전시기획사 오렌지 브리지(Orange Bridge)를 운영하고 있는 장성안 대표가 기획·주관한 ‘코리안 분더캄머 아트 페스티벌(Korean Wunderkammer Art Festival)’의 일환이다. 밀라노 브레라 예술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화가로 활동했던 장 대표는 2014년부터 밀라노에서만 20여 개의 한국작가 전시를 기획했다. 지난해 루치아나 마탈론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에는 민화를 비롯해 도자·현대미술·조각·사진·영상 등 한국의 여러 예술 장르를 한데 모아 소개했지만, 올해에는 세 차례로 나눠 전시에 나선다. 민화(7월 7~13일)에 이어 전통과 현대 미술(MAEC 갤러리, 7월 13~21일), 한국 현대미술(산 페델레 갤러리, 7월 17~21일)이다.  
 
7일 오후 개막식에서 만난 엄재권 한국민화협회 회장은 “작년에도 이곳에서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과 함께 전시를 했는데, 민화가 산수화나 인물화 위주의 기존 동양화와는 스타일이 다르고 내용이 재미있어서 그랬는지 현지 반응이 좋았다”라며 “그래서 올해에는 독자적으로 민화만 따로 전시하자는 말이 나왔고, 작년에는 40명만 참여했지만 이번에는 164명이 각각 한 작품씩 출품해 규모를 키웠다”고 설명했다.  
 
넬로 타이에티(Nello Taietti) 마탈론 재단 이사장은 “이 재단의 이사장직을 맡기 전부터 개인적으로 한국 미술에 관심이 많았고 갤러리를 운영하며 한국 작가들의 그림 및 도자기 전시회를 자주 개최했다. 한국은 여러가지로 이탈리아와 비슷한 점이 많아 더 애정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는 재단 갤러리에서 민화전을 열게 된 이유에 대해 “작품을 파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탈리아, 특히 밀라노에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것”이라며 “한국이란 나라를 잘 알기 위해서는 문화를 깊이 아는 것이 진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층과 2층 전시장 벽을 가득 메운 164점의 민화는 대부분 긴 세로 족자의 형태로 걸렸다. 모시에 그려 족자를 하지 않은 작품들은 테이블 위에 펴서 전시했다. 그림 사이즈가 제각각 달라 족자의 넓이와 길이, 배경천의 색도 서로 달랐지만, 나름대로 개성있게 연출됐다.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계단 복도는 물론 전시 공간의 중앙에도 족자를 커튼처럼 늘어뜨려 되도록 많은 참여작품을 소개하려고 애쓴 갤러리측의 배려도 돋보였다.
 
전통적인 민화의 스타일을 고집한 작품은 물론, 수묵화 기법을 가미해 담담하고 세련되게 단순화시킨 작품, 피카소의 게르니카처럼 사물을 입체적으로 분해한 작품, 동화책의 일러스트레이션처럼 귀여운 작품들도 적절히 섞어 놓았다. 서양화처럼 원근감을 표현하지 않고 모든 정물을 같은 크기로 겹쳐 표현한 문방도(文房圖)는 마치 네덜란드의 초현실주의 화가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의 작품을 떠올리게 했다. “서양 그림의 기본틀을 벗어나는 민화의 구성이 화려한 색채와 어울려 오히려 모던하게 느껴진다” “복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은 상징 문양들은 그 자체로 스토리텔링”이라고 현지인들은 입을 모았다.  
 
해당 작품과 카탈로그 설명을 일일이 비교해가며 뜻을 이해하려 애쓰는 사람도 많았다. 자신을 카밀로라고 소개한 이탈리아 건축가는 책과 주변 물건들을 화려하게 그린 문방도(文房圖)를 가리키며 “전통적인 동양의 그림에서 보기 힘든 직선, 서양화에서 주로 사용한 원근법의 사용 대신 채도를 낮게 표현한 점 등이 기존 아시아의 동양화와 달라보여서 그런지 나에겐 매우 현대적으로 느껴진다”고 했다. 문자와 그림을 결합한 문자도(文字圖) 앞에서는 “상징적 그림으로 표현한 한자도 굉장히 신선해 동시대의 아이콘처럼 보인다. 매우 흥미롭다”고 감탄했다.  
전승미의 ‘Courtesy’, 36 x 25 cm

전승미의 ‘Courtesy’, 36 x 25 cm

조미영의 ‘Painting of Characters’, 35 x 70 cm

조미영의 ‘Painting of Characters’, 35 x 70 cm

 
정신수양의 방법에서 자신만의 예술로 승화
사진 오른쪽부터 전시 큐레이터 미켈라 옹가레티, 한 사람 건너 장성안 오렌지 브리지 대표, 넬로 타이에띠 마타론 재단 이사장, 엄재권 한국민화협회 회장, 금광복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

사진 오른쪽부터 전시 큐레이터 미켈라 옹가레티, 한 사람 건너 장성안 오렌지 브리지 대표, 넬로 타이에띠 마타론 재단 이사장, 엄재권 한국민화협회 회장, 금광복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

엄 회장은 민화가 가진 차별성을 “벽에 걸고 보는 감상화가 아닌 장식화”라고 설명했다. “1970년대 이전만 해도 민화를 전공하거나 배우는 사람은 드물었지만, 2000년 이후 민화 열풍이 불기 시작하면서 특히 여성분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다. 민화는 문인화처럼 많은 수양과 능력을 요구하지 않는데다가 배울 수 있는 기회도 많아져 접근성이 높아졌다.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더라도 선생님이 떠준 밑그림에 색칠을 하다보면 저절로 정신수양도 된다. 그렇게 민화의 매력에 푹 빠져 새로운 형태와 색상에 계속 도전하며 작업을 하다 보면 작품 수가 늘어나고 어느새 민화 작가가 되어있는 경우도 많다.”  
 
한국 민화가 이탈리아, 아니 유럽의 수집가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까. 넬로 타이에티 회장은 우선 두루마리 형식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유럽에서는 두루마리를 흔히 ‘중국 양식’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방식은 영구적이지 않고 고객들이 좋아하지도 않는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액자에 넣어 가치를 높인 작품을 좋아한다. 종이에 그린 그림이라도 액자에 걸면 훨씬 품위가 있고 판매도 가능해진다. 모든 작품을 액자에 넣어 가져오긴 어렵겠지만 몇 점이라도 액자에 넣어 전시한다면 전체적인 격이 올라갈 것”이라고 귀띔했다. 또 “이 같은 전시는 한국 문화를 널리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에 오프닝 시 참여 작가들이 한복을 입거나 한식 다과를 준비하는 것도 플러스 요인이 될 수 있다”며 “이곳 사람들은 작가들이 발표하는 작품을 보고 해당 나라를 이해하기 때문에 참여 작가들은 문화 외교관으로서 큰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엄 회장은 “작품 수가 많다 보니 차근차근 보면 각기 다른 그림들일지라도 외국인들에게는 일견 비슷비슷해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며 “향후 전시는 액자 활용을 포함해 디스플레이와 큐레이션을 더욱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
 
 
밀라노(이탈리아) 글·사진 김성희 중앙SUNDAY S매거진 유럽통신원sungheegioielli@gmail.com,  사진 한국민화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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