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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으로] 투자하겠다며 잠자리 요구 … 여성의 ‘지옥’이 된 혁신 천국

‘성희롱밸리’가 된 실리콘밸리
#2014년 세라 쿤스트(31)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투자회사 500스타트업에 취업하기 위해 면접을 봤다. 유명 벤처투자자인 데이브 매클루어가 공동창업한 회사다. 어느 날 새벽 3시 매클루어가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냈다. “당신을 고용해야 할지, 당신에게 작업을 걸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럽다.” 쿤스트는 메시지를 회사 관계자에게 언급했고, 이후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
 

면접 뒤 “고용할지 작업걸지 …” 문자
신고한 피해자가 되레 회사 떠나
우버 추문 이후 성희롱 폭로 잇따라

경험 없고 소수인 여성 창업자 약점
권력·돈줄 쥔 벤처 투자자들 횡포

우수 인재 빠져나가면 생존 힘들어
추한 마초문화 바꿀 계기 될 수도

#유명 투자자인 저스틴 칼드벡은 2015년 여성 창업자 린지 메이어가 세운 회사에 개인 돈 2만5000달러(약 2890만원)를 투자했다. 이후 업무와 무관한 문자를 자주 보냈다. 자신을 매력적으로 생각하느냐, 왜 그 남자친구를 만나느냐 같은 내용이었다.
 
#차량 공유업체 우버의 여성 엔지니어 수전 파울러는 지난해 직속상관으로부터 ‘함께 섹스할 여성을 찾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사내 메신저 대화를 캡처해 인사 부서에 신고했다. 성희롱은 분명하지만 처음 저지른 실수인 데다 우수 성과자이기 때문에 처벌하지 않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다른 부서로 옮기거나, 그 부서에 남거나 선택할 수 있는데, 남을 경우 매니저가 낮은 고과를 줘도 감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파울러는 퇴사를 선택했다.
  
최근 뉴욕타임스·파이낸셜타임스 등 언론이 보도한 미국 실리콘밸리 스타트업계의 성희롱·성차별 사례다. 여성 창업가와 엔지니어들이 투자자나 직장 상사로부터 당한 성추행과 성희롱을 잇따라 폭로하면서 실리콘밸리의 민낯이 드러나고 있다.
 
 
발단은 지난 2월 불거진 ‘우버 사태’였다. 우버를 퇴사한 수전 파울러는 개인 블로그에 ‘우버에서 보낸 매우, 매우 이상한 1년’이라는 글을 올려 우버의 성차별적인 조직문화를 폭로했다. 가죽점퍼에 관한 일화가 인상적이다. 직원 복지 차원에서 가죽점퍼를 나눠줬는데, 여성 엔지니어들은 받지 못했다. 숫자가 적어 남성처럼 대량 구매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지급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파울러를 성희롱한 직속상관은 상습범이었다. 다른 피해 여성들도 그를 인사 부서에 신고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처음 저지른 실수라고 인사 부서가 거짓말한 게 들통났다. 여론이 들끓자 우버는 법무장관을 역임한 거물급 변호사를 선임해 종합 감사를 맡겼다.
 
이 과정에서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 트래비스 캘러닉과 임원진의 부적절한 행동도 밝혀졌다. 캘러닉 일행은 한국 출장길에 단체로 룸살롱(karaoke-escort bar)에 가서 여종업원을 옆에 두고 유흥을 즐겼다고 한다. 동석한 여성 임원이 인사 부서에 문제를 제기했으나 묵살당했다. 내부 감사 결과 성희롱·성차별 사건이 200여 건에 달했다. 캘러닉 CEO와 최측근은 사임했다. 회사는 조직 정비를 다짐했다. 내부 고발로 달라지는 모습에서 용기를 얻은 여성들이 실명으로 성희롱을 폭로하는 계기가 됐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투자자 매클루어는 투자를 빌미로 여성 창업자 6명에게 성적으로 부적절한 행동을 했다. 복수의 여성은 투자자 칼드벡이 강제로 몸을 더듬거나 키스했다는 증언을 했다. 가해자로 지목된 매클루어와 칼드벡은 사과하고 CEO에서 사퇴했다. ‘우버 효과’ 덕분이다.
 
성희롱·성차별은 비단 실리콘밸리뿐 아니라 어느 산업, 어느 사회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실리콘밸리의 성희롱 폭로가 충격적인 건 첨단 기술과 미래지향적인 사업 아이템으로 경쟁하는 스타트업이 전통 기업보다 더 후진적인 조직문화를 가졌다는 점이다. 창의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기술 진보를 이루겠다는 포부, 자유와 도전정신을 중시하는 이미지와 다르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에서 10년 이상 근무한 여성 21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60%가 “성희롱을 당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다른 사람이 성차별받는 것을 목격했다는 응답은 90%였다. 응답자의 66%는 중요한 네트워킹 자리에서 소외된 적이 있다고 했다.
 
가장 참신해야 할 스타트업 업계에 성차별이 만연한 이유는 뭘까. 실리콘밸리에는 기술과 아이디어는 있으나 경험과 자본이 없는 예비 창업자들이 모여든다. 창업자들은 자기의 아이디어를 사업으로 구현하기 위해 모든 걸 감내하려고 한다. 벤처투자자는 자본을 투입해 수익을 올리고자 한다. CNBC는 “돈과 권력을 쥔 나이 많은 남자들과 순진하고 젊은 창업자들 간 힘의 불균형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자금줄을 쥔 벤처투자자가 갑질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된다는 뜻이다. 여성 창업자는 더 약자일 수밖에 없다. 정보업체 피치북에 따르면 여성 창업가가 지난해 받은 투자금은 15억 달러지만 남성이 유치한 금액은 582억 달러다.
 
스타트업은 작고 민첩해 속도감 있는 게 장점이지만 성숙한 리더십과 조직 인프라가 갖춰져 있지 않다는 건 단점이다. 짧은 시간에 수익을 내라는 압박을 투자자들로부터 받기 때문에 기술개발과 사업 확장을 우선시한다. 자연히 인사 부서 같은 조직 구축은 등한시하기 일쑤다.
 
여성 임직원 숫자가 너무 적은 것도 마초 문화를 강화한다. 커리어 정보업체 페이스케일에 따르면 미국 기술기업 CEO의 여성 비중은 21%로 다른 산업(36%)보다 적다. 여성 고위직도 대부분은 비기술직인 인사·법무·재무 등에 포진해 있다. 젊은 남성 엔지니어들이 매니저급으로 수직 상승하며 마초 조직문화가 만들어진다. 실리콘밸리 벤처투자회사 파트너 가운데 여성은 7%에 불과하다.
 
사무실에 공짜 음식과 공짜 술을 제공하고 오랜 시간 일하는 문화도 한몫한다. 회사 밖 개인 사생활이 거의 없고 회사에서 먹고 자고 일하다 보니 대학 남학생 사교 클럽(fraternity house) 같은 분위기가 이어진다. ‘브로그래머(Brogrammer·브라더+프로그래머)’ 문화가 왜곡되면서 성차별적 조직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피해 사례가 잇따라 폭로되면서 실리콘밸리 내 자성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인사 정보 포털인 링크드인의 창업자 리드 호프먼은 최근 품위서약 운동(#DecencyPledge)을 제안했다. 벤처투자자와 창업자의 관계를 직장 내 상사와 직원의 관계처럼 엄격히 규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유튜브 CEO 수전 워츠치키는 더 많은 여성을 고용하는 것이 조직문화 개선의 해법이라고 말했다.
 
조직문화를 세우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건 기본이다. 벤처투자자 밥 코셔는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스타트업이 견고한 문화와 가치를 정립하지 않으면 경쟁사보다 빠르게 혁신하고 더 나은 인재를 유치할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기업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앞으로 달라질 것이라는 긍정적인 기대도 있다. 우수 인재가 이탈하고, 소비자 불매운동이 벌어지는 것을 감수할 기업은 없기 때문이다. CNBC는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날지, 이번에도 바람으로 끝날지 아직 판단하기 이르지만 고질적인 관행을 돌아볼 기회가 된 건 분명하다”고 전했다.
 
 
[S BOX] “나는 못난 놈” 사과에 “그걸로는 부족” 추가 폭로
벤처투자회사 500스타트업의 데이브 매클루어 창업자는 성희롱 가해자로 지목되자 실리콘밸리다운 방식으로 사과했다. 뉴욕타임스 보도 후 24시간 만인 지난 2일 오전 트위터에 짧은 두 문장을 남겼다. “나는 못난 놈이다. 사과한다(I’m a Creep. I’m Sorry).”
 
사과는 또 다른 논란을 일으켰다. 말레이시아의 창업가 셰릴 여는 2011년과 2014년 매클루어에게 성희롱을 당한 사실을 추가로 폭로하며 “권력을 남용해 성적·신체적 접근을 시도한 투자자는 ‘못난 놈’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일갈했다. 매클루어는 이틀 뒤 다시 트위터를 통해 사퇴를 알렸다.
 
벤처투자회사 로어케이스캐피털의 크리스 사카는 사과를 잘못해 또 사과했다. 그는 뉴욕타임스 보도 하루 전 선수를 쳤다. 실리콘밸리에 만연한 성차별에 자신도 자유롭지 못하다며 사과하지만, 그간 다양성을 위해 여성과 백인이 아닌 창업자에게도 두루 투자했다는 취지였다. 피해자에 대한 직접 사과 없이 얼렁뚱땅 넘어가려 했던 셈이다.
 
사카는 비난이 쏟아지자 이틀 뒤 사건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해명을 다시 올렸다. 사카는 인스타그램·우버 등 스타트업에 초기 투자해 억만장자가 된 벤처투자업계 거물이다.
 
박현영 기자 hy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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