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이정재의 퍼스펙티브] ‘착한 가격’으로 분배를 해결한 경제는 없다

가격 포퓰리즘
가격을 건드리는 일은 언제나 유혹적이다. 자신을 좌파라고 여기거나 인간미를 강조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춥고 배고프고 잘 곳조차 없는 이들의 처지를 어찌 눈 뜨고 보랴. 해결책은 두 가지다. 물건값을 내리거나 돈을 나눠주는 것이다. 좌파는 전자를 선호한다.
 
나름 이유와 논리가 있다. 우파가 가격을 시장 효율의 결과로 보는 반면 좌파는 높은 가격=폭리라고 등식화한다. 등식을 거칠게 단순화하면 이렇다. ‘가격을 시장에 자유롭게 맡겨 놓으면 재화가 아주 불공평하게 배분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한국 사회는 기업만 배를 불린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807조원의 사내 유보금은 안성맞춤의 공격 근거다. 그래 놓고 수요공급의 법칙에 따라 가격을 매긴 결과라며 서민들에게 빈곤을 받아들이라는데 이런 세상이 어떻게 정당한가. 노숙자들은 잠자리가 없어서 길바닥에 장판을 깔고 잔다. 쥐꼬리만 한 연금으로 개 사료를 먹고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세 모녀 사건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데도 기업은 재화가 희소해질 조짐만 보여도 가격을 올린다. 이런 기업의 행위는 부당하기 짝이 없다. 그러므로 빈곤 탈출을 위해 정부가 가격에 개입하는 것이야말로 정당하다.’ 이런 논리를 펼친다면 좌파다. 새 정부의 경제 정책은 좌파인가 아닌가. 여기 세 가지 사례가 있다.
 
첫 번째는 신용카드 수수료율 인하다. 국정기획자문위원회와 금융위원회는 영세·중소 가맹점 기준을 낮추는 방식으로 수수료율을 인하하도록 했다. 국정기획위는 이런 결정을 내리면서 신용카드 회사들의 의견은 한 번 듣지도 않았다. 만난 적도 없다. 그저 소상공인들의 의견만 충실히 반영했다. 하기야 카드 수수료율 인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자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소상공인 보호 대책이기도 하니 어쩌겠나. 신용카드사들은 당장 마지막 남은 할인 혜택까지 줄이기로 했다. 결과를 단순화하면 수수료율 인하→45만 가맹점주(소상공인) 연 80만원 혜택→카드사 수수료 3500억원 감소→고객 혜택 최대 3500억원 감소가 될 것이다. 생색은 정부가 내고 돈은 소비자가 내는 꼴이 되고 만 것이다.
 
하기야 새 정부만 그런 것도 아니다. 신용카드 수수료율 인하는 권력의 단골 선심성 메뉴가 된 지 오래다. 2007년 2~3.6%였던 수수료율은 아홉 차례에 걸쳐 지난해 0.8(영세가맹점)~1.3%(중소가맹점)까지 낮아졌다. 결과는 익히 아는 바다. 이익이 준 카드회사들은 고객 혜택부터 줄였다. 주유할인 카드는 아예 자취를 감췄다. 부가서비스를 줄이고 고금리 대출을 확대했다. 콜센터를 아웃소싱하고 인력을 줄였다. 외국인 투자자도 발길을 돌렸다. 수익이 줄자 현대카드에 출자했던 GE캐피털은 철수했다.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은 종종 ‘관치의 화신’으로 불린다. 그가 2004년 카드 사태로 시장이 불안해지자 금융회사들의 팔을 꺾으며 “관(官)은 치(治)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 김석동이지만 정부가 시장 가격을 건드리는 일에는 질색했다. 5년 전 신용카드 가맹점 수수료율을 정부가 정하도록 하는 여신전문금융업법 개정안이 국회 정무위원회를 통과할 때 김석동은 마지막까지 반대했다. 그는 “신용카드 회사는 공기업이 아니다. 수수료율을 정부가 정하는 것은 시장 원리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주무 장관이자 금융위에 규제 권력이 더 생기는 내용임에도 완강히 반대했다. 그가 론스타 매각을 승인한 것도 시장의 규칙·질서·자유에 따른 것이다. 이런 내용을 새 정부도 잘 안다. 아마 그가 이번에 금융위원장 물망에 올랐다가 없던 일이 된 것도 그런 시장주의자로서의 ‘소신’들이 걸림돌이 됐을 것이다.
 
두 번째는 이동통신비 인하다. 국정기획위는 기본료(약 1만1000원) 폐지를 밀어붙였다가 한발 물러섰다. 대신 2만원대 데이터요금제를 의무화하고 저소득층과 사회 소외계층엔 월 1만1000원을 추가 할인해 주도록 했다. 국정기획위는 이동통신사 의견 역시 한 번도 듣지 않았다. 대선 공약인 데다 전 국민이 혜택을 본다는 이유다. 결과를 단순화하면 통신비 인하→6200만 가입자 혜택(전체 인구보다 가입자가 많다)→이통사 수익 약 3조~4조원 감소→신규 투자 위축, 품질·속도 저하로 이어질 것이다. 생색은 정부가 내고 돈은 기업이 내는 구조다. 통신업계는 불만이다. 익명을 원한 한 관계자는 “소외계층 지원은 정부가 재정으로 할 일이지 기업의 돈을 뜯어서 할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당장은 혜택 같지만 멀리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통신업체와 유통업체의 일자리가 줄고 서비스 품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자칫 통신 포퓰리즘의 종말을 보여준 ‘이스라엘의 비극’을 맞을 수도 있다. 이스라엘은 통신요금을 낮추기 위해 2012년 통신시장을 대폭 개방했다. 300달러이던 통신요금이 5년 만에 30달러로 낮아진 극단적 사례도 나타났다. 하지만 산업 쪽은 황폐해졌다. 이익을 못 낸 통신사는 망했고 투자는 줄었다. LTE 보급률은 51.3%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국 중 33위다. 모바일 인터넷 속도도 OECD 평균에 크게 못 미친다. 통신 인프라 낙후로 세계 최고 ICT 강국의 위상이 흔들릴까 걱정할 지경이다.
 
세 번째는 실손보험료 인하다. 국정기획위는 내년에 폐지하려던 보험료 조정 폭을 되레 ±25%로 강화하고 가격 자율화는 아예 없던 일로 하기로 했다. 역시 대선 공약이었으며 역시 국정기획위는 보험회사 쪽과는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실손보험은 팔수록 손해다. 보험사들의 손해율은 2015년 122.1%였다. 보험료 100원을 받아 보험금으로 122원을 내준 셈이다. 보험사들은 “(정부가 가격 인하를 계속 밀어붙이면) 실손보험을 팔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사실 실손보험은 태생적으로 도덕적 해이에 직면할 가능성이 큰 상품이다. 의료 쇼핑과 과잉 진료를 부추기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보험은 본래 ‘최후의 보험업자’인 국가가 제공하지 않으면 시장에선 제공될 수 없는 것이 맞다. 손해를 보면서 보험상품을 팔려는 보험사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의 선택은 두 가지다.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거나 (단속에 나서서 과잉 진료나 의료 쇼핑을 근절하거나) 도덕적 해이를 감수하고 국가가 보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실손보험이 사회 약자들에게 도움이 되고 꼭 필요한 것이라면 후자 쪽을 택해야 할 것이다. 시장 실패는 바로잡지 않고, 재정을 풀어 할 일을 기업 팔을 비틀어 해결하려는 것은 복지국가도, 자유민주 국가도 아니다.
 
권력이 가격을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은 유례가 깊다. 서기 301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900여 개의 물품과 150여 종의 서비스 가격을 제한하는 ‘최고 가격령’을 발표했다. 황제는 법령을 위반하는 자는 죽음으로 다스린다고 했다. 결과는 썩 좋지 못했다. 올리지 못하는 물건값 대신 은화인 데나리우스의 가치가 급락하는 쪽으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현대판 사례는 베네수엘라다. 2007년 우고 차베스 대통령은 몇 가지 기본 식료품의 가격 상한을 선포했다. 쇠고기·우유·설탕 등을 상한 가격보다 높게 받는 가게는 국유화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결과는 불문가지. 수퍼마켓들은 이런 식료품 판매를 중지했다. 급기야 돈을 줘도 우유·설탕을 구할 수 없게 됐다.
 
남 얘기 할 것도 아니다. 우리도 보수·진보 가릴 것 없이 가격 포퓰리즘을 즐겨 썼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기름값이 묘하다”며 정유사를 압박했고 52개 주요 생필품으로 MB 물가지수를 만들어 가격을 통제했다. 하지만 MB의 가격 통제는 물가 관리라는 측면이 강했다는 점에서 국가가 재화의 가격을 직접 통제하는 진짜 좌파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새 정부는 최저임금 1만원에 전·월세상한제까지 가격 통제를 확대하고 있다. 이런 가격 통제는 자칫 기업과 노동자, 부자와 서민을 편가르는 여울목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가격 통제가 빈곤이란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도 아니다. 사회주의 경제학자 아바 러너는 “빈곤은 물가가 높은 것이 아니라 빈곤층에 돈이 없다는 게 문제”라며 “빈곤을 해결하는 것은 가격 조정이 아니라 소득 분배”라고 했다.
 
국가가 경제에, 특히 가격에 가능한 한 간섭하지 않기를 바라는 이유는 경제를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은 유혹을 받는 정치인들의 행동이 장기적이고 총체적으로 경제에 해로울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시장에서의 공정 가격은 상대적 희소성에 따라 경쟁을 통해 정해지는 것이 맞다. 물론 어떤 가격이 공정한가는 따져봐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거래 쌍방이 얻을 이익을 공평하게 하는 방향”의 공정가격을 주장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싸게 사서 비싸게 팔려는 욕망을 죄악시했고, 르네상스 시대 살라만카 학파는 재화가 귀중하게 여겨지는 정도를 근거로 가격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들을 거쳐 현대 경제학자들은 가격이 상대적 희소성에 의해 결정돼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이유는 간명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자원과 노동을 대규모로 낭비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새 정부 들어 거의 사라진 말이 있다. 구조개혁, 구조조정이다. 구조개혁 없이는 4차 산업혁명, 지속 가능한 일자리 창출도 없다. 썩은 부위를 도려내야 새살이 돋는다. 놔두면 생살까지 썩어간다. 시장 개입과 가격 통제는 모르핀과 같다. 잠시 고통을 줄여줄 수는 있지만 빈곤을 막을 수도, 사라지는 일자리를 붙들어 맬 수도 없다. 그것이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 군사안보연구소

군사안보연구소는 중앙일보의 군사안보분야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군사안보연구소는 2016년 10월 1일 중앙일보 홈페이지 조인스(https://news.joins.com)에 문을 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https://news.joins.com/mm)를 운영하며 디지털 환경에 특화된 군사ㆍ안보ㆍ무기에 관한 콘텐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연구소 사람들
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