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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에 씻을 수 없는 악몽 남기고 흥남 철수 발판 마련

한국전 흐름 뒤바꾼 장진호 전투 
1 중공군은 1950년 10월 말 대공세를 펼쳐 국군과 연합군의 북진을 막았다. 함경남도 장진호로 진출했던 미 해병사단이 철수하고 있다.

1 중공군은 1950년 10월 말 대공세를 펼쳐 국군과 연합군의 북진을 막았다. 함경남도 장진호로 진출했던 미 해병사단이 철수하고 있다.

방미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이 장진호 전투 기념비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1월 27일부터 약 2주간 벌어진 ‘장진호 전투’를 기념하는 상징물이다. 함경남도 개마고원 장진호 일대에서 벌어진 이 전투를 미 해병대의 고전, 참담한 후퇴 등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만 실상은 중공군에 씻을 수 없는 타격을 남긴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특히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에겐 ‘이 상태로는 미군을 이길 수 없다’는 점을 각인시켰다. 그는 현대화한 미군과 재래 전법의 중공군 사이에 놓인 거대한 격차를 간파했던 것이다.
 

1950년 11월~12월 2주 간의 싸움
미 해병사단의 처절했던 후퇴 작전
중공군의 피해는 훨씬 더 심각
‘미군 못 이긴다’는 공포감 떠안아
동부전선 진격 작전 수포로 돌아가

2주간의 전투는 미군 1만2000명의 사상자(3000명 전사)를 낼 정도로 참혹했지만,중공군의 남하를 지연시켜 전세(戰勢)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으며, 10만 명에 달하는 피란민의 극적 탈출을 도운 역사적인 전투였다.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대공세
2 미 1해병사단 후퇴로의 마지막 관문. 건설 자재를 공수해 끊긴 다리를 잇고 있다. 3 올리버 스미스 해병사단장이 진격 독촉과 성화에도 불구하고 물러설 때를 상정해 차분하게 닦아 놓은 하갈우리 비행 활주로에서 물자를 내리는 대형 미군 수송기.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2 미 1해병사단 후퇴로의 마지막 관문. 건설 자재를 공수해 끊긴 다리를 잇고 있다. 3 올리버 스미스 해병사단장이 진격 독촉과 성화에도 불구하고 물러설 때를 상정해 차분하게 닦아 놓은 하갈우리 비행 활주로에서 물자를 내리는 대형 미군 수송기.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전투는 1950년 11월 말 도쿄(東京) 유엔군 사령부의 맥아더 장군이 내린 ‘크리스마스 대공세’의 흐름에서 벌어졌다. 맥아더는 11월 말에 압록강과 두만강의 한반도 접경지대로 서부의 미 8군, 동부의 미 10군단을 진군시켰다. 미 8군과 10군단으로 나눈 지휘권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공세(攻勢)에서는 드러나지 않았으나 수세(守勢)에서는 결정적인 문제로 작용할 소지가 있었다. 그럼에도 맥아더의 의지는 확고했다. 크리스마스 전에는 전쟁에서 승리해 귀국하자는 결심이었다.  
 
서부의 진군은 주춤했다. 미 8군 2사단이 평북 군우리의 협곡에서 중공군 매복에 걸려 참담한 패배를 기록했고, 그 전주(前奏)는 서부의 동쪽 견부(肩部)를 담당했던 한국군 2군단이 아주 무기력하게 물러서면서 일찌감치 울렸다. 병력 1만 2000명 정도의 미 1해병사단은 원산으로 상륙한 뒤 황초령과 부전령을 지나 개마고원에 오른 뒤 장진호(長津湖)를 거쳐 북한군 지휘본부가 있는 강계로 진격할 참이었다. 미 1해병사단은 고토리~하갈우리~유담리를 지나 장진호에 진격하는 루트를 일단 상정했다. 걸어 들어오는 먹잇감을 기다리듯 중공군은 미 1해병사단의 이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 9병단 소속 7개 사단이었다. 병력은 6만~7만에 달했다.
4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8일 오후(현지시간) 방미 첫 일정으로 버지니아주 콴티코 미 해병대 국립박물관에 있는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찾아 설명을 듣고 있다. 김성룡 기자

4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8일 오후(현지시간) 방미 첫 일정으로 버지니아주 콴티코 미 해병대 국립박물관에 있는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찾아 설명을 듣고 있다. 김성룡 기자

 
일부 자료에는 병력 비율이 1:10에 이르렀다고도 기록돼 있다. 그 격차에도 불구하고 미 1해병사단은 제 갈 길을 충실히 갔다.  
 
5 하갈우리에 진출한 미 해병대원들의 식사 장면. 이 뒤에 고난의 후퇴의 행군을 시작했다.

5 하갈우리에 진출한 미 해병대원들의 식사 장면. 이 뒤에 고난의 후퇴의 행군을 시작했다.

사단장은 올리버 스미스 소장. 깡마른 체구에 강인한 인상의 장군으로서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리에 수행했었다. 그는 차분하며 치밀했다. 에드워드 알몬드 10군단장의 성화와 같은 진격 독촉에도 그는 ‘물러설 때’를 상정했다. 나아갈 때와 다른 물러설 때의 상황…. 전투에서는 제 병력을 온전히 지켜 나중을 기약하려면 반드시 따져야 할 대목이었다. 그는 진격하는 루트에 요충(要衝)이라 여겨지는 곳에는 적어도 1개 소대 이상을 배치했다. 물러서는 길목을 지키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진격 중간 지점인 하갈우리에 비행활주로를 닦았다. 답답한 진격이었다.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의 눈에도 그랬고, 그의 충복이었던 10군단장의 입장에서는 더 그랬다.  
 
6 장진호 전투 당시 중공군.

6 장진호 전투 당시 중공군.

추위도 문제였다. 한반도에서 강설(降雪)이 가장 빠른 곳이 개마고원 일대다. 아울러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먼저 닥친다. 11월 말에 들어서면 보통은 영하 30도까지 곤두박질친다. 장진호 전투가 벌어지던 때는 더 심했다. 기온은 영하 40도를 기록했다. 유담리까지 해병대의 진출은 순조로웠다. 그러나 중공군은 집요하게 해병대를 물고 늘어졌다. 중공군 대병력이 곳곳에 출몰했다. 유담리에는 미 1해병사단의 2개 연대, 후방인 하갈우리에 1개 연대가 진출해 있었다.  
 
중공군은 전면에 79, 89, 59사단을 투입했다. 이들은 북쪽과 서쪽, 하갈우리~유담리를 잇는 능선 세 곳에서 공세를 벌여왔다. 지표로부터 35㎝까지 얼어붙어 참호마저 팔 수 없는 상황. 두텁게 내려 얼어붙은 눈판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11월 27일이었다.
 
이튿날 스미스 해병사단 소장은 진격을 멈췄다. 후퇴를 결정했다. 고난에 가득 찼던 그 뒤의 여정이 바로 ‘장진호 전투’의 장면이다. 막대한 병력의 중공군에게 미군은 처절한 응전을 펼치며 물러섰다.  
 
영하 40도 추위와의 싸움
7 당시 미 해병대를 괴롭힌 건 중공군뿐 만이 아니라 영하 30~40도의 강추위가 가장 큰 적이었다고 한다. [중앙포토]

7 당시 미 해병대를 괴롭힌 건 중공군뿐 만이 아니라 영하 30~40도의 강추위가 가장 큰 적이었다고 한다. [중앙포토]

부상자가 속출했고 사망자도 급증했다. 강한 추위 때문에 중공군에 비해 탁월한 화력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탄약이 강추위로 불발할 때가 잦았기 때문이다. 쇠붙이에 손을 대면 손이 얼어붙을 정도여서 정밀한 사격술을 발휘할 수도 없었다. 잔뜩 얼어붙은 음식을 허겁지겁 먹었던 해병대원들은 고약한 배탈을 앓아야 했다. 얼어붙은 땅에 삽이 들어가지 않아 폭약을 사용했지만 굳게 얼어붙은 땅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시계(視界)를 15m로 좁혀놓은 강력한 눈보라를 피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스미스 사단장의 침착함이 빛을 냈다. 부상자를 실어 나를 수 있는 대형 수송기가 비행기 활주로로 내려앉을 수 있었다. 중요한 장비도 챙길 수 있었다. 후퇴의 요로는 잔류시켰던 병력이 지켜줬다.  
 
천시(天時)와 지리(地利)는 미 해병사단에 절대 불리했지만 그를 넘어서려는 사람의 합쳐진 노력, 인화(人和)는 미 해병대의 몫이었다. 그들은 참담한 후퇴상황에서도 부상 동료를 챙기고, 사망한 전우의 시신을 거뒀다. 시신은 트럭에 싣고,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포신(砲身)에 줄로 매달아 이동했다.
 
대형 수송기 C-47은 하갈우리에 내려 부상자와 사망자 시신을 실어갔다. 스미스 소장은 그러나 공로(空路)를 이용한 후퇴를 거부했다. 이끌고 온 수많은 장비와 무기를 적에게 내줄 수 없다는 각오에서였다. 그리고 공격해오는 중공군을 막강한 화력으로 응징했다.  
 
마지막 장애는 끊긴 다리였다. 후방을 노렸던 중공군이 황초령에서 흥남으로 향하는 곳의 다리 일부를 폭파했기 때문이다. 미군은 조립할 수 있는 다리 자재를 공수했다. 모두 8세트의 자재를 실어 800피트 상공에서 투하하는 작전이었다. 이 중 1개가 적진에 떨어졌고, 다른 1개는 부서졌다. 그리고 6개 세트가 전해져 결국 흥남으로 향하는 후퇴로를 확보했다.  
 
그 뒤에 벌어진 게 흥남 철수작전이다. 미 해병사단과 다른 아군, 10만 명의 난민을 무사히 남쪽으로 싣고 내려온, 우리에게는 큰 감동으로 남아 있는 작전 말이다. 중공군은 그 즈음에 이미 체력이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황초령을 넘어 흥남까지도 진격할 수 없을 정도로 중공군의 모든 전력은 소진에 가까운 상태에 접어들었다.  
 
기동(機動) 어려워진 중공군  
미 해병대의 화력에 죽어 넘어지는 사람도 많았지만, 더 그들을 괴롭힌 것은 영하 40도로 곤두박질친 추위였다. 특히 군화와 피복·식량 등 보급이 낙후한 중공군의 피해는 막심했다. 중공군은 전체 전선 운용에 큰 차질을 빚고 말았다. 장진호 싸움 뒤 동부전선을 밀고 내려가 유엔군을 전면에서 압박하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개마고원의 험한 지형과 지독한 추위에 동상(凍傷)을 입은 병력이 전체의 절반을 넘어 추가 기동(機動)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미 해병사단도 참혹한 상실(喪失)을 맞았지만 빛나는 전우애(戰友愛), 뛰어난 장비와 화력, 굳세고 침착한 전의(戰意)로 중공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이 점이 장진호 전투가 세운 전과(戰果)다. 펑더화이는 이 결과를 두고 현대전의 결정적인 요소가 무엇인지를 생각했고, 차후의 전쟁에서 미군을 이길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한다. 장진호 전투는 베이징(北京)에서 전쟁을 지휘한 마오쩌둥(毛澤東)과의 불화, 전쟁의 요체를 알지도 못한 채 전쟁을 벌인 김일성과의 심각한 반목을 낳기도 했다.
 
 

유광종 중국인문경영연구소 소장 ykj3353@naver.com
대학에서 중어중문학을 전공한 뒤 홍콩에서 중국 고대 문자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중앙일보 타이베이 및 베이징 특파원 역임. 『중국이 두렵지 않은가』『지하철 한자 여행 1호선』『백선엽 장군의 6.25전쟁 징비록』(1~3권) 등 6··25전쟁 관련 저서 10권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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