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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 공항에서 생긴 일

성석제 소설
2015년 5월 어느날 오후, 스페인의 마드리드 공항 이곳 저곳에서 한국말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한국 국적 비행기의 출발이 서너 시간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출국장 바깥의 세관 사무처에 스페인에서 산 물건에 붙은 부가소비세 21퍼센트를 환급 받으려는 사람들이 영수증과 물건, 세금 환급 관련 서류 등을 챙겨들고 담당 직원의 스탬프를 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또 화물을 접수하고 보딩 패스를 발급받는 항공사 카운터 앞에도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세금 환급 창구 줄 끼어든 부부
“우리가 환급 못 받으면 나라 손해”
되레 큰소리 치다 줄 뒤로 쫓겨나
환급 받아서는 손자 줄 초콜릿 사

일행이 셋인 우리는 역할을 나눠 내가 짐을 지키고, 한 사람은 항공사 카운터에 접수를 하러 가고, 한 사람은 세금 환불 관련 스탬프를 찍어주는 창구 앞에 줄을 섰다. 항공사 쪽에 있던 사람이 일찍 줄을 선 덕분에 20분 만에 항공권을 발급받았다. 하지만 세금 환불 관련 창구 앞의 줄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게다가 세 개의 창구 가운데 하나는 직원이 꽤 오래도록 자리를 비웠는데 하필 그 앞에 줄을 선 우리 일행을 포함한 운 없는 사람들은 손에 서류를 챙겨들고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스탬프를 받아야만 출국장 안에 있는 환불창구에서 돈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심심해서 주변을 둘러보다 발견하게 된 안내문의 내용이 예사롭지 않았다.
 
“세관 직원은 필요한 경우에 고객께서 스페인 내에서 구입한 물건을 꺼내 제시하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항공사 카운터에 가서 물건을 가방에 넣고 화물로 부친 사람들은 구매한 상품을 보여 달라고 하면 낭패를 볼 수 있었다. 항공사 카운터에 먼저 가지 않고 세금 먼저 환급 받겠다고 온 사람이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일에는 우선 순위가 있는 법이고 비행기 타는 일에 비해 세금 환급은 부차적인 것이니까. 어쨌든 사전에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나처럼 처음으로 세금을 환불 받으려는 사람에게는 약간의 운도 따라줘야 무사히 세금을 돌려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다 같이 신발만 사기를 잘했네. 그것도 지금 다 신고 있으니까 보여 달라면 밑창까지 보여주면 되고.”
 
내 말에 일행 모두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쨌든 삼십여 분 가까이 지루하게 기다린 끝에 서류에 스탬프를 받는 데 성공했다. 내가 돌려받을 세금은 15유로, 우리 돈으로 2만원쯤 되었다. 나보다 훨씬 더 자주 해외여행을 다녀본 일행 한 사람이 서둘러 출국장 안으로 가는 검색대로 향하면서 내게 말했다.
 
“외국에 가서 물건 사고 세금 환급받는 건 돈 때문이 아니라 원칙의 문제라서 양보할 수가 없어요. 전 세금 환급을 못 받으면 귀국 비행기에서 잠이 안 오더라구요.”
 
그 말이 귀가 얇은 나로 하여금 출국장 안의 세금 환불 창구 앞에 줄을 서게 하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귀국 비행기에서 잠을 자야 시차에 잘 적응할 것이고 비행도 훨씬 덜 지루할 게 아닌가. 하지만 출국장 안 세금 환불 창구 앞의 줄은 바깥의 스탬프 찍어주는 데보다 훨씬 더 길었다. 창구 수도 두 개뿐이었다.
 
세금 환불을 받을 사람은 모두 귀가 얇은 사람인 듯 모조리 줄을 서 있는 것 같았다. 서류에 찍힌 스탬프를 확인하고 돈을 내주는 간단한 일을 하고 있는 직원들은 정년을 지난 세기에 넘어서서 노년에 후배들을 위해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듯, 동작이 십장생에 속하는 거북이처럼 느리고 성성한 백발과 은빛 수염이 신령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줄과 기다림은 더 길어졌다. 마침 옆줄에 서 있는 사람이 항공사 직원이어서 지겨움을 약간 덜 수 있었다. 그는 수백 번의 해외근무 중 물건을 산 게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비행기 탑승 시간이 한 시간쯤 남은 상태에서 마침내 예닐곱 명만 지나면 내 차례가 될 순간이었다. 휘리릭, 하는 돌개바람 소리를 동반하며 화려한 등산복 차림에 큰 덩치의 오십대 부부 두 사람이 내 앞에 끼어들었다. 줄 서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볼멘소리를 냈다. 특히 외국인들이 각국의 언어로 힐난하는 소리가 들렸고 휘파람 소리까지 났다. 예의가 존재의 구성물질인 듯한 항공사 직원이 내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는 그들에게 말했다.
 
“선생님, 여기서는 줄을 서셔야 합니다. 모두 기다리고 계시는 게 보이시지요?”
 
여자가 먼저 반응했다.
 
“당신, 뭐예요? 경찰이라도 돼요?”
 
“저는 조금 있다가 출발할 대한민국 국적 항공사 직원입니다.”
 
남자가 거친 사투리에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기내에서 싸아비스나 잘할 일이지 왜 남의 일에 끼어들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야?”
 
창구 안에 앉아 있는 거북이를 닮은 나이든 직원은 재미있다는 듯이 일손을 멈추고 머리 뒤로 깍지를 낀 채 그들끼리의 대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뒤쪽에 서 있던 어떤 승객이 말했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더니, 아이구 잘들 하십니다.”  
 
부부 중 여자가 줄 서 있던 사람들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말했다.
 
“우리가 밖에서 스탬프 찍느라고 줄을 얼마나 오래 섰는데요! 우리 물건 산 거 많아요! 비행기가 곧 출발할 건데 우리가 여기 줄 뒤쪽에 서 있다가 세금 환급 못 받으면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큰 손해 아니에요? 그리구요, 우리 안에 들어와서도 딴 데서 한참 줄 서 있다가 시간 다 까먹고 이 줄이 맞는다고 해서 지금 온 거라고요! 남보다 일부러 늦게 온 게 아니에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어떻게 이렇게 정교한 논리가 있단 말인가. 나는 일행을 돌아보며 맹세했다.
 
“내가 귀국해서 삼년 안에 이 이야기를 안 쓰면 그 새 늙어죽은 줄 아시오.”
 
줄 뒤로 쫓겨 간 그들이 결국 세금을 환급받았다는 것을 나중에 비행기 안에서 확인했다. 그들은 환급 받은 세금으로 손자들에게 줄 초콜릿을 샀다.
 
 
※‘성석제 소설’은 성석제씨가 소설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실험적 칼럼으로 4주마다 연재됩니다.
 
 

성석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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