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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냇가 몽돌 같은 바흐

빌헬름 켐프가 1969년 피아노로 연주한 ‘골드베르크 변주곡.’ 아리아의 분위기가 독특하다.

빌헬름 켐프가 1969년 피아노로 연주한 ‘골드베르크 변주곡.’ 아리아의 분위기가 독특하다.

뉴스에서 자기 허물에 갇힌 뱀을 보았다. 호주의 한 파충류센터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대개 뱀은 긴 나뭇가지처럼 헌 옷을 벗어던지고 사라진다. 그런데 사진 속 비단뱀은 자동차 운전대처럼 둥그렇게 허물을 벗었다. 뱀은 입구에서 나오면서 다시 출구로 들어갔는데, 입구와 출구가 붙어버리니 자기가 벗어놓은 허물 속을 맴돌게 된 것이다.  
 

WITH 樂 :
빌헬름 켐프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처음에 뱀은 “아! 이렇게 옷 갈아입다 죽는구나”했을 것이고, 시간이 지나서는 “나의 조상이 인간 여자에게 저지른 죄 때문에 이 고리 안에서 죽는구나!”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서양의 신화에도 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거대한 원형의 뱀이 있다. 그리스인들은 이 뱀을 ‘우로보로스’라 불렀다. 그들은 이 뱀이 세계를 또는 우주를 둥글게 감싸고 있다고 상상했다.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의 무한성, 영원회귀 같은 것이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BWV 988) 역시 앞과 뒤가 같은 원형구조다. 바흐가 수면용으로 만든 이 곡은 아련한 아리아로 시작해 30개의 변주가 따라붙는다. 그리고 마지막 32번 곡에서 다시 처음과 같은 아리아로 마무리된다. 중간에 바흐가 계산기를 돌려서 배치한 빠르고 느리고 울퉁불퉁하고 매끈한 변주가 있지만 결국 기-승-전-아리아로 끝나는 셈이다.  
 
클래식 애호가들은 ‘골드베르크 변주곡=글렌 굴드’라는 공식을 가지고 있다. 음악 인생을 골드베르크 변주곡으로 수미쌍관 해서 세칭 ‘굴드-베르크’라는 말까지 만들어 낸 이가 글렌 굴드다. 하지만 오늘은 세상에서 두 번째로 좋은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이야기하려고 하니 굴드는 빠지는 게 좋겠다. 바로 빌헬름 켐프의 1969년 음반이다. 이 곡이 왜 세상에서 두 번째로 좋은 골드베르크 변주곡인지는 조금 설명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줄 세우기를 좋아한다. ‘세계 3대 기타리스트’ ‘쓰리 테너’ ‘나만의 베스트5’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 곡의 명연은 수두룩하다. 쳄발로 쪽에서는 구스타프 레온하르트나 피에르 앙타이를 이야기하고, 피아노 연주로는 앞선 글렌 굴드나 로잘린 투렉, 안드라스 쉬프를 말한다. 모두 복수형 1등들이다. 시끄럽고 소란스런 순위 매기기 품평회가 끝나고 나면 비로소 빌헬름 켐프의 자리가 보인다. 1등은 늘 그들의 몫이고 켐프의 오래된 녹음은 그래서 두 번째로 좋은 골드베르크다. 독창적이며 유일무이하다는 의미다.  
 
바흐의 성악곡이나 키보드 곡들을 피아노로 편곡했던 빌헬름 켐프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에서도 바흐에 대한 낭만주의적 해석을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그의 해석은 바흐가 만든 구조를 유연하게 받아들이며 그 위로 노래하듯 자연스럽게 멜로디를 얹는 것이다. 몇 종의 다른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고 나서 켐프의 연주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첫 곡 아리아 때문에 적지 않게 놀랐다. 장식음들이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처음 인사를 나누는데 상대의 바지 지퍼가 흘러 내려간 걸 알아차린 것. 말해주기도 그렇고 말해주지 않기도 그런 난감한 상태였다. 하여간 나는 장식음이 빠진 빈 공간의 어색함을 어디서 보상받아야 하는지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리아가 끝나고 변주가 시작되자 조금씩 켐프 스타일에 적응되기 시작했다.  
 
그의 연주는 피아노로 연주하는 바흐 건반음악에서 자주 보이듯 음표를 콕콕 찍는 스타카토식의 표현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그래서 자극적이지 않고 너그러운 느낌이 강해진다. 7번 변주를 들어보자. 전체적으로 딱딱하고 경건한 느낌을 주는 로잘린 투렉의 저음은 쇠로 만든 구슬처럼 단단하다. 반면 켐프의 것은 시냇가의 몽돌이 굴러가듯 정겹다. 작은 푸가가 끝나고 시작되는 11번 변주에서 투렉은 예민하고 사려 깊은 숙녀의 걸음걸이다. 그러나 켐프의 연주는 소풍 길에 신난 남자아이의 발걸음처럼 즐겁다. 캠프는 여기서 베토벤 중기 소나타의 어느 소절을 연주하는 것처럼 바흐를 낭만적으로 묘사한다.  
 
그렇다면 전설적인 글렌 굴드는? 그는 이인삼각달리기 대회에 나온 청년이다. 왼발 오른발 합이 딱딱 맞는다. 켐프는 느린 12번 변주에서도 반복구절을 지키며 실타래를 풀듯 자신의 노래를 유유히 펼쳐나간다. 마치 여름철 뭉게구름이 하늘을 가르며 천천히 지나가듯 말이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얽힌 비밀 하나를 고백하자. 오래전 육아전쟁으로 고달팠던 일요일이었다. 직장 핑계를 대고 집을 탈출해 숲속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두어 시간 이 곡만 들었다. 바람은 달콤했고 구름은 유유히 흘러갔다. 혼자만 평화로웠다. 더워지는 요즘 그날이 떠오른 것은 이 곡과 함께 한 이기적인 평화가 약간의 죄책감과 더불어 기억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들 비밀은 지켜주시리라 믿는다. ●
 
 
글 엄상준 TV PD 90emper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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