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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신언패와 반정, 그리고 세 가지 풍경

김기찬 라이팅에디터고용노동선임기자

김기찬 라이팅에디터고용노동선임기자

시대가 격랑에 휩싸일 때면 회자하는 글 가운데 하나가 설시(舌詩)다. ‘입은 화(禍)가 들어오는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날과도 같다. 입을 닫고 혀를 감추면 어느 곳에 있든 편안하다.’ 후당의 재상을 지낸 풍도(馮道)의 글이다. 그는 입 닫고 산 덕분인지 5왕조 11군주를 섬겼다. 후대에 지조 없는 사람이란 꼬리표가 붙을 만했다. 하지만 세상 사는 이치가 어찌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살 수 있는가. 말을 함부로 하면 반드시 화가 닥치니, 그의 말이 틀렸다고 할 수 없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도 하고, 한 번 한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고도 하지 않는가.
 

다양한 목소리 대접해야 사회주체 간 협력 가능
입맛에 맞는 말만 들으면 근간 제대로 못 세워

깊은 뜻이 담긴 이런 시문도 잘못 쓰이면 폭군을 낳는다. 연산군은 바른말을 하는 충신의 입을 설시로 봉쇄했다. 신언패(愼言牌)다. 충언을 하는 신하의 목에 걸었다. 한마디로 ‘입 닥치라’는 거다.
 
최근 상황이 신언패와 자꾸 겹쳐서 연상작용을 일으키는 건 왜일까. 박근혜 정부에서 언로(言路)는 소수의 게이트키퍼에 막혀 불통사태를 빚었다. 일방 독주는 민주주의라는 나라의 근간을 흔들었다. 조선시대 전국의 유생이 천리길을 마다치 않고 광화문에 집결해 집단 상소하던 모습은 촛불과 오버랩된다. 그리고 반정이 일어났다. 촛불에 의한 정권 교체다. 한데 이후 벌어지는 몇 가지 광경은 못내 아쉽다.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이지 못하고 따로 돌아가는 모습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쌍수’를 들었다. 19일 일자리위원회와의 간담회에서 나온 박병원 회장의 선창이었다. “정부 정책을 전폭 지지한다”면서다. 올바른 정부 정책에 힘을 보태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김영배 부회장이 비정규직 정책을 비판한 뒤 정부로부터 3단 경고를 받고 돌변한 태도여서 시선은 곱지 않다. 이런 화려한 리액션을 대화 상대인 노동계나 정부는 물론 학자조차 힐난한다. 한마디로 두 손을 든 걸로 본다. 오죽하면 “딱하다”는 말까지 나오는 판이다. 요즘은 아예 입을 닫았다. 경총 내부에서 “부끄럽다”는 자조가 나오는 걸 보면 단단히 잘못된 건 틀림없는 것 같다.
 
#이틀 뒤 한국노총 김주영 위원장은 “우리가 현 정부 승리의 주역”이라고 했다. 일자리위와 간담회에서다. 그러면서 “(노동계를) 구색맞추기에 필요한 장식물 정도로 여긴다”고 공격했다. 반정의 일등공신을 제대로 대접하라는 거다. 그러곤 요구사항을 나열했다. 공신록으로 보기에 안성맞춤인 상황이다. 민주노총 건설노조는 같은 날 광화문 일대에서 공약을 지키라며 시위를 했다. 출근시간이었다. 시민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항의에도 아랑곳없었다. 30일 총파업도 예고했다. 최근엔 이상한 일도 벌어진다. 조대엽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노조의 지지선언이 잇따르고 있다. 음주운전이나 취약한 전문성에 대해선 별 말이 없다. 이런 지원사격 뒤에 또 어떤 공신록이 나올지 궁금하다.
 
#고용노동부는 지난달 25일 국정기획위원회 업무보고에서 근로시간 단축에 대해 “산업현장 혼란과 근로자 실질임금 하락”을 들며 속도조절론을 건의했다. 성과 중심 인사운영과 같은 행정지침을 보완하겠다고도 했다. 대선 공약의 수정을 요청한 셈이다. 국정기획위는 일언지하에 잘랐다. 근로시간 단축은 물론 성과 관련 지침 폐지를 즉각 시행하라고 주문했다. 이어 기획재정부는 공공부문의 성과연봉제를 폐지했다. 담당 공무원은 시쳇말로 멘붕이다. “내가 만든 논리를 뒤집으려면 그보다 확실한 논리가 필요한데 내세울 만한 논리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연산은 중종반정으로 물러났다. 정치가 바뀔 줄 알았다. 한데 반정공신이 독주하기 시작했다. 입맛에 맞지 않은 상소를 한 신하를 떼 지어 공격했다. 중종의 개혁을 뒷받침하던 조광조마저 고꾸라졌다.
 
신언패를 찬 듯 납작 엎드린 경영계, 기세등등한 노동계, 영혼이탈을 겪는 공직사회. 초반 독주의 부작용은 아닐까 걱정된다. 내 사람은 어떤 짓을 해도 괜찮고, 상대는 무조건 찍어내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의 폐해는 아니길 바란다. 언로를 여는 건 그런 폐해를 막는 첫 관문이다. 조광조는 이렇게 얘기했다. “입맛에 맞지 않은 상소를 한 신하를 벌하는 것은 국가의 존망과 관계되는 일이다.”
 
김기찬 라이팅에디터·고용노동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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