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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의 퍼스펙티브] 한국에는 이제 제왕적 대통령이 없다

개헌 논의의 함정
우리가 30년째 운영하고 있는 1987년 헌법은 처음부터 하나의 미완성된 헌법으로 취급받아 왔다. 출범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내각제 개헌론이 노태우 정부 시절에 제기됐고, 이후로도 다양한 헌법 개정론이 끈질기게 제기돼 왔다. 민주화 30년을 맞이하는 올해 봄에 취임한 문재인 대통령 역시 전임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개헌론을 제기해 왔는데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문 대통령의 개헌론은 이전의 대통령들과 결을 달리하고 있다.

87년 헌법 체제는 진화 거듭
초기엔 대통령이 무소불위 권력
이젠 국회 견제로 권력에 한계

대통령은 야누스의 얼굴 가져
임기 초반 제왕적 권력자이나
임기 후반 극심한 레임덕 전락

대통령 권력 견제에만 초점 맞춘
개헌 논의는 현실과 맞지 않아
중앙·지방 간 수직 분권화 논의해야

 
첫째, 이전 대통령들과는 달리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개헌에 관한 의지를 적극적으로 밝혀 왔다. 취임 직후인 지난달 문 대통령은 대통령 중임제 개헌 공약을 내년까지 추진하겠다고 언급한 바 있다. 현직 대통령이 개헌 정치에서 차지하는 압도적 위치를 감안한다면 개헌에 관한 심도 있는 논의는 본격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역대 대통령들의 개헌 관심사가 주로 권력구조의 개편에 치우쳤던 바와 대조적으로 문 대통령은 지난주 전국 시·도지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내년에 다뤄질 헌법 개정안에 지방분권을 강화하는 조항을 포함하겠다고 언급함으로써 개헌을 통한 지방분권의 의지를 강력히 나타냈다.
 
하지만 개헌 논의가 항상 이성적이고 합리적 토론으로만 진행되지는 않는다. 여기에는 늘 당파적 이익, 기득권 지키기가 개입되게 마련이다. 이러한 불순물로부터 개헌 논의를 구해 내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 초점이 명확해져야 한다.
 
첫째, 우리가 운영해 온 이른바 1987년 헌법 체제는 지난 30년간 꾸준히 진화하면서 동태적으로 변화해 왔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자면 일부 개헌론자들이 흔히 개헌의 근거로 언급하는 1987년 체제가 낡고 시대에 뒤떨어졌으니 개헌하자는 주장은 현실과 동떨어진 진단에 불과하다. 지난 30년간 우리는 선거제도·정당제도·국회제도를 불완전하게나마 꾸준히 수정해 왔고 그에 따라 위의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87년 헌법 출범 당시의 권력 집중 민주주의로부터 꽤 이동해 권력 집중 체제와 권력 분산 체제의 중간 가까이까지 이동해 왔다. 달리 말해 헌법 조항을 직접 손대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헌법체제를 뒷받침하는 정당·선거·국회제도를 분권화함으로써 헌법 체제의 운영은 권력 집중보다는 중간의 혼합형으로 진화해 왔다.
 
둘째,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권력의 분산 혹은 집중에는 비단 대통령-국회 사이의 수평적 권력 관계, 대통령-여야 정당 사이의 관계라는 차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주 문 대통령의 발언에서도 확인되는 바와 같이 권력의 분산·집중에는 중앙정부-지방정부 사이의 수직적 관계라는 차원 역시 중요한데, 지금까지 중앙-지방 분권화 논의는 매우 소홀하게 다뤄져 왔다고 할 수 있다.
   
87년 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먼저 일부 개헌론자들이 내세우는 87년 체제의 핵심 속성으로서의 제왕적 대통령제의 변화를 살펴보자. 민주화 초기만 하더라도 우리의 대통령제가 권위주의 시대의 제왕적 대통령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민주화 초기 제왕적 대통령을 떠받치는 핵심 기둥은 두 가지였다.
 
첫째, 대통령은 여당의 제왕적 총재로서 여당 소속 의원들을 압도적으로 지배했다. 국회의원들의 생사 여부를 좌우하는 공천 권력은 대통령 혼자 독단적으로 행사하는 권력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통령은 또한 방대한 (불법) 정치자금을 조성해 여당에 대한 통제 수단으로 활용했다.
 
둘째, 제왕적 대통령은 여당(다수 여당)에 대한 제왕적 지배를 발판으로 국회의 견제 기능을 사실상 무력화시켰었다. 다수당 여당이 대통령의 거수기에 불과한 상태에서 행정부가 제출하는 예산안, 법률안, 대통령의 인사권에 대해 국회가 실질적인 견제를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다시 말해 민주화 이후에도 한동안 국회는 권위주의 시대의 통법부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대통령-국회 관계는 제왕적 대통령의 독주로 특징지어졌다. 정치학 교과서에서 말하는 견제와 균형은 작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민주화 초기의 제왕적 대통령은 더 이상 실재하지 않는다. 한국의 대통령은 오늘날 두 얼굴의 대통령(Janus-faced presidency)으로 진화했다. 5년 임기 동안 대통령들은 지극히 대조적인 상황을 경험하게 된다. 임기 전반부는 과거처럼 제왕적 대통령으로서의 권력을 누린다. 임기 초의 높은 기대를 바탕으로 지지율은 고공 행진을 거듭하며 이를 기반으로 추진하는 일련의 개혁 조치(예를 들면 김영삼 대통령의 금융실명제 도입, 군 사조직인 하나회 해체 등)에 힘입어 언론도 매우 우호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또한 여당 역시 대통령의 정책에 대해 협조적이며 따라서 대통령-국회 관계는 대통령의 압도적 우위로 특징지어진다.
 
그러나 대통령의 임기가 후반으로 접어들고 시간과 지지율이라는 권력 자원이 위축될 때 대통령들은 어김없이 위기의 대통령 신세로 추락했다. 레임덕 대통령으로의 추락은 대통령 주변의 부패 스캔들로 시작되곤 한다. 대통령의 친인척이나 비선 실세의 부패 연루가 밝혀지면서 지지율은 곤두박질치고 대통령의 여당·정부조직·국회에 대한 지배력은 순식간에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린다. 대통령의 임기 종반부는 아무런 일을 할 수 없는 식물 대통령 상태가 되며, 가장 심각한 경우는 국회의 탄핵에 의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정리해 말하자면 과거 제왕적 대통령들은 대부분 예외 없이 임기 후반에 레임덕 대통령으로 전락했다. 이러한 두 얼굴의 대통령으로의 전환은 단지 대통령들의 책임으로만 돌릴 문제는 아니다. 레임덕 대통령 현상의 또 다른 배경은 바로 정당체제·선거제도·국회 운영에서 진행돼 온 권력 분산의 결과이기도 하다. 권력의 분산에 따라 정당·국회가 제왕적 대통령을 견제하고 통제할 수단은 확대돼 왔고 그 결과가 바로 두 얼굴의 대통령제다.
  
민주화 30년, 권력 집중에서 중간형 체제 진화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87년 체제가 출발할 무렵 우리 민주주의는 수평적인 관점에서 대통령에게 많은 권한과 권력이 집중돼 있는 체제였고, 다수제 민주국가의 모델이라 할 수 있는 영국 정도만이 우리의 87년 체제보다 권력이 집중돼 있는 국가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권력 집중은 2004년 정치 개혁을 전후로 그림상의 거의 중간까지 완화돼 권력 집중 체제와 분산 체제의 중간형으로 진화했다.
 
이러한 중간형으로의 변화를 이끈 요소들을 살펴보자. 첫째, 비록 충분하지는 않지만 정당 내부의 제한적 분권화가 체제 전반의 분권화를 촉진했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이 대통령 후보를 선출할 때 미국식 후보 경선 제도를 수정한 제한적 경선제를 실시하면서부터 정당 분권화는 조금씩 진척돼 왔다. 제왕적 총재가 스스로 대통령 후보로 나서거나 혹은 후계자를 지명하는 방식으로부터 벗어나 당원과 시민들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후보 선출 권한이 분산됐다. 대통령 후보 선출뿐 아니라 국회의원 후보 선출 과정도 점진적으로 (물론 국회의원 후보 선출 방식은 분권화와 집중화 사이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해 왔다는 점에서 대통령 후보 선출 방식의 분권화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 왔다.) 분권화됐고, 이에 따라 대통령의 여당 의원들에 대한 제왕적 지배도 약화됐다고 할 수 있다.
 
둘째, 2004년 국회의원 선거 제도가 1인2표 혼합형 투표제로 전환되면서 정당체제의 분권화가 눈에 띄게 진전됐다. 지역구 투표와 비례대표 투표를 별도의 투표로 하게 되면서 유권자들은 더 넓은 선택지를 갖게 되었고 (전문적인 용어로는 지역구-비례대표 분할 투표라 부르는데, 전체 유권자의 대략 20% 정도가 분할 투표를 하고 있다.) 그에 따라 정당 정치는 안정적인 다당제화가 진행됐다. 다당제화는 곧 집권 여당 또는 제1당이 과반 의석에 미달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고 그에 따라 의회 내 권력 분산이 좀 더 촉진되는 결과를 낳게 됐다.
 
아울러 2012년 여야 정당들이 이른바 국회 선진화법을 도입함으로써 소수 세력의 반대는 좀 더 강력해졌고 (신속법안 처리를 위해 다수 세력은 60%의 의석이 필요하게 됐다.) 이 또한 국회 내의 권력 분산, 대통령-국회 사이에 권력 분산을 확대했다고 할 수 있다.
 
종합해 말하면 우리는 지난 30여 년간 이른바 1987년 체제를 꾸준히 개혁하면서 권력집중 체제를 완화시켜 왔다. 일부 87년 체제 개헌론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정치 권력이 대통령에게 초집중돼 있던 87년 체제는 오늘날 거의 중간 가까이에 있는 혼합형 체제로 진화해 왔다. 권력의 탈집중화는 정당체제·선거제도·국회제도에 걸쳐 두루 진행돼 왔으며, 그에 따라 87년 체제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제왕적 대통령은 이제 제왕적 권력과 위기를 반복하는 두 얼굴의 대통령으로 변화해 왔다.
 
지금 우리의 민주헌정 체제가 직면하고 있는 좀 더 시급한 과제는 수평축상의 권력 분산보다는 수직축상의 권력 분산일 것이다. 대통령을 견제하는 국회·정당·선거정치상의 수평적 권력 분산은 꽤 진행된 반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사이의 수직적 권력 분산은 지난 30년간 지지부진한 채로 남아 있다. 지난 30년의 민주화 실험이 수평적 분산에 치우쳤다면 이제는 수직적 권력 분산을 통해 수평적 권력 분산과 수직적 권력 분산이 (마치 프랑스처럼) 균형을 이루는 체제를 지향할 시점이다.
 
장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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