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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습 때문에 여성의 행복 포기한 어머니 위해 소설 써"

충정공 민영환의 증손녀인 민명기씨. 최근 어머니를 모델로 한 장편 『하린』을 냈다. 김상선 기자

충정공 민영환의 증손녀인 민명기씨. 최근 어머니를 모델로 한 장편『하린』을 냈다. 김상선 기자

근대 이전을 배경으로 한 소설의 여주인공은 인습(因習)의 희생자인 경우가 많다. 주어진 이름 대신 누구의 아내이거나 딸, 어머니로 통했던 그들은 체제가 부과한 의무나 사회적 금기의 벽에 가로막혀 여성으로서의 행복을 쉽게 포기하곤 했다. 최근 출간된 장편소설 『하린』(문예중앙)의 주인공 김하린도 마찬가지다. 그의 경우는 오히려 정도가 심했다. 구한말 명문가 민씨 집안의 맏며느리여서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1861~1905)의 손주 며느리였던 그는 스물일곱에 남편을 잃고 평생을 청상으로 살았다. 세상천지 유일한 혈육인 외동딸 은기에 의지해서다.
민씨의 증조부 민영환의 생전 모습.

민씨의 증조부 민영환의 생전 모습.

 소설을 쓴 이는 하린의 실제 모델인 김성린(1921~2003)의 딸 민명기(72)씨다. 그러니까 민씨가 자기 어머니의 삶을 각색한 작품이다. 충정공의 증손녀이자 정치학자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아내인 민씨는 "젊은 시절 어머니가 사용했던 양반 계층의 언어, 지금은 사라진 당대의 풍속을 알리고 싶어 소설을 썼다"고 밝혔다. 20일, 북한산의 녹음이 커다란 거실창으로 쏟아져 들어올 것 같은 서울 평창문화로 자택에서의 인터뷰에서다. 
 민씨는 "가령 어머니 세대는 이성에게 편지를 쓸 때 이름을 호칭으로 삼지 않았다"고 했다. 소설에서 주인공 하린은 정혼만 한 채 결혼식을 올리지 않은 장래의 남편 민병수에게 편지를 보낼 때 "민군 보옵소서"라고 서두를 연다. 신여성 같으면 '병수씨'로 시작했을 텐데, 민씨 집안에서는 그러지 않았다는 얘기다. 하린이 나이 들어 딸 은기에게 편지 보낼 때도 반드시 사위 앞으로 보내되 사위의 높임말을 써서 "서랑(壻郞) 보오소"라고 시작한다. 그런 격식이 요즘 기준에 비춰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당대에는 통용되는 법도였다. 
 민씨는 '과거 복원'이 집필 의도라고 했지만 소설의 실제 방점은 하린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찍혀 있다. 물론 의무와 금기가 걸림돌이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하린은 시어머니 이씨, 어린 딸 은기와 함께 대전으로 피란 간다. 생존이 문제 되는 상황에서 반상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버선을 만들어 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하린 앞에 준수한 남성 한기범이 나타난다. 차츰 사랑을 키워가던 두 사람은 결정적인 순간, 각자의 자리를 지키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 짓는다. 무릇 사랑이 그렇듯 이뤄질 수 없어 더 안타깝고 짧아서 더 강렬한 감정의 소용돌이다. 
 민씨는 "실제 어머니는 누가 개가하라고 권하면 다락방에 올라가 목을 매달겠다고 한 분이셨다"고 밝혔다. "소설 속에서나마 짜릿한 로맨스를 만들어드려 여성의 행복과 거리가 먼 삶을 사셨던 어머니를 위로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창덕여고 시절부터 문학소녀였던 민씨는 유학 간 남편을 따라 미국에서 생활하던 1970년대 후반 LA 한국일보에서 주최한 문학상 공모전에 입상한 적이 있다. 자신의 첫 장편인 이번 소설을 쓰기 위해 소설 강좌를 들을까 하다 명작을 많이 읽기로 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남아공의 존 쿳시, 캐나다의 앨리스 먼로, 미국 작가 윌리엄 포크너의 작품을 특히 좋아한다"고 했다. 그들의 직선적인 화법, 짧은 문장을 닮고 싶었다는 얘기다. 
 충정공 집안의 가풍을 묻자 민씨는 "증조 할아버지의 존재를 의식한 건 중학교 들어가서인 것 같다. 남들 따라 함부로 행동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자랐다"고 답했다. "증조 할아버지가 워낙 겁이 많은 분이셔서 방 천장에 쥐가 돌아다녀도 무서워하셨다는데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정신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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