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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이 뭐길래, 럭셔리까지 홀리다

래퍼가 점령한 패션월드 
떠오르는 힙합 뮤지션 찬스더래퍼의 거리 공연 모습. [사진 찬스더래퍼 인스타]

떠오르는 힙합 뮤지션 찬스더래퍼의 거리 공연 모습. [사진 찬스더래퍼 인스타]

저 높은 곳을 향하던 패션이 땅으로 내려 왔다. 대중은 매 시즌 예술의 경지를 보여주던 하이엔드 패션 대신, 쉽고 당장 입을 수 있는 옷을 더 '경배'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스트리트 패션이다. 그 중심에 힙합이 있다. 힙합은 1980년대 미국에서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음악 장르. 자유롭고 즉흥적인 형태의 새로운 음악으로 전세계를 지배하던 힙합은 이제 제2의 전성기를 맞으며 패션계에까지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대체 힙합이 뭐길래. 그리고 왜 패션은 지금 힙합을 노래하는 걸까. 글=이영표 '레옹' 패션 디렉터 , 정리=이도은 기자
 
절제된 스타일로 길거리 귀환
90년대식 로고패션을 부활시킨 게스. [사진 게스]

90년대식 로고패션을 부활시킨 게스. [사진 게스]

요즘 홍대 앞이나 가로수길에서 젊은 남녀의 스타일을 유심히 본 적 있는지. 몇 가지 눈에 띄는 아이템이 있다. 래퍼들이 주로 쓰고 나오는 스냅백(사이즈를 조절할 수 있는 똑딱이 단추가 뒤에 달린 야구 모자), 복고풍 스니커즈, 그리고 커다란 로고나 문자가 새겨진 티셔츠다. 간혹 여기에 큼지막한 액세서리를 더하는 경우도 있다.  
매장 제품들도 비슷하다. 구찌·디올·루이비통·돌체앤가바나 등 럭셔리 브랜드마다 자사의 로고를 전면에 내세운 디자인을 속속 선보인다. 브랜드를 감추는 게 미덕이던 몇 년 전의 '로고리스' 트렌드와는 영 딴판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그너처 아이템도 다시 등장한다. 베르사체의 청바지, 루이비통의 블루종 점퍼가 대표적이다. 럭셔리 제품만이 아니다. 엉덩이에 걸친 바지 위로 보이는 복서 트렁크, 미국 프레피 문화를 상징하는 피케 셔츠도 요즘 주목 받는 아이템이다.
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의 힙합 패션. [중앙포토]

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의 힙합 패션. [중앙포토]

사실 이런 유행이 우리 눈에 그다지 낯설지는 않다. 1990년대 길거리를 장악했던 힙합 패션의 귀환이기 때문이다. 당시 힙합 뮤지션들은 뮤직 비디오를 통해 흘러내릴 것 같은 통 넓은 청바지에 빅 로고 티셔츠, 화려한 목걸이와 팔찌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나이키·아디다스·푸마 같은 스포츠 브랜드의 스니커즈나 미 프로농구(NBA) 선수들이 신었던 농구화 역시 뮤지션들에겐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아이템이었다. 옷차림이 튀는만큼 단박에 전세계 젊은이들의 시선을 잡아 끌었다. 힙합은 몰라도 힙합 패션은 따라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생겨났다. 국내도 예외가 아니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길거리를 쓸고 다니는 ‘똥싼 바지’와 속옷 노출이 유행했다. 머리에 두건을 쓰거나 노랗게 탈색하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20년 전 잦아들었던 힙합이 2015년을 기점으로 다시 스트리트 패션의 주류로 돌아왔다. 다만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 '세고 강한' 개성을 드러내던 힙합 패션은 사라졌다.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과장되고 헐렁한 팬츠 대신 스키니 팬츠나 슬림한 피트의 팬츠가 주를 이룬다. 여기에 복고풍 스니커즈를 매치하는 식이다. 또 티셔츠 대신 단정한 셔츠에 화려한 액세서리만 더하면서 예전에 비해 훨씬 깔끔해졌다. 한 마디로, 컬러나 실루엣의 강약을 조절해 다른 스타일과 섞어 입는 믹스앤매치가 새로운 힙합 스타일의 포인트다.
 
패셔니스타 래퍼의 활약
루이비통과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 슈프림이 협업해 내놓은 컬렉션. [사진 루이비통]

루이비통과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 슈프림이 협업해 내놓은 컬렉션. [사진 루이비통]

'세련되고 우아한 힙합 스타일'로 진화한 데는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일단 세계적 패션하우스의 역할이 컸다. 트렌드를 이끄는 이들이 지난 몇 시즌 동안 너도나도 힙합을 필두로 한 스트리트 문화를 컬렉션에 녹여냈다. 가령 슈트 옷감으로 바이커 팬츠를 만든다거나(루이비통), 정교한 프린트가 들어간 트랙 슈트를 선보이는 식(구찌)이다. 지방시는 지난 시즌 컬렉션에서 힙합 패션을 기반으로 농구 저지 팬츠·점퍼나 농구화 등과 믹스매치한 스타일링을, 릭 오웬스 역시 블랙·그레이 등 무채색 계열의 컬러만으로 아방가르드한 스타일을 추구하며 힙합 패션을 교묘하게 접목시켰다.
버버리와 러시아 출신 디자이너 고샤 루브친스키의 협업 컬렉션. [사진 버버리]

버버리와 러시아 출신 디자이너 고샤 루브친스키의 협업 컬렉션. [사진 버버리]

이와 반대로, 새로 생겨난 스트리트 브랜드가 하이엔드 패션을 지향하기도 한다. 신데렐라처럼 등장해 화제를 모은 베트멍, 1990년대 포스트 소비에트 시절을 재해석한 스트리트 패션으로 주목받는 고샤 루브친스키가 대표적이다. 둘다 길거리 감성의 옷을 정식으로 갖춰 입는 스타일링이 공통적인데, 운동복에 아찔한 하이힐을, 품 넓은 청바지에 매끈하게 재단된 재킷을 입는 식이다. 
양극단이라고 여겨지는 럭셔리 브랜드와 스트리트 브랜드가 아예 협업에 나서기도 한다. 최근 버버리는 고샤 루브친스키와 손잡고 버버리를 대표하는 트렌치코트와 칼라 부분에 체크 트리밍이 들어간 해링턴 재킷(허리와 손목에 밴드가 들어간 남성용 재킷), 체크 반소매 셔츠와 반바지 등을 새롭게 해석한 남성복을 선보였다. 이미 루이비통은 2017 가을 겨울(FW) 남성복 컬렉션에서 미국 스트리트 브랜드 슈프림과 협업, 사전 주문 완판 기록을 냈다. 구찌 역시 2016 가을·겨울 컬렉션에서 그라피티 아티스트 트러블 앤드류와 협업한 바 있다.  
패션 디자이너 알렉산더 왕(가운데)과 두터운 친분을 자랑하는 칸예 웨스트(왼쪽) 가족.  [사진 '알렉산더 왕' 브랜드 인스타그램]

패션 디자이너 알렉산더 왕(가운데)과 두터운 친분을 자랑하는 칸예 웨스트(왼쪽) 가족. [사진 '알렉산더 왕' 브랜드 인스타그램]

하지만 이같은 브랜드나 디자이너의 '전향'만으로 달라진 힙합 트렌드를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힙합 뮤지션 자체가 고급스러워진 게 하나의 요인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그들이 입은 옷이 바로 공개되고 매출로 이어진다. 그 파급력은 과거와는 비교가 안 된다. 이들 패션이 지나치게 사치스럽고 과시적이라 '패션 부르주아'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다. 
칸예 웨스트와 아디다스 오리지널스가 손잡고 출시한 이지 부스트 350 모델.  [사진 아디다스]

칸예 웨스트와 아디다스 오리지널스가 손잡고 출시한 이지 부스트 350 모델. [사진 아디다스]

'패셔니스타 래퍼'의 원조로 꼽히는 칸예 웨스트는 간결한 실루엣과 컬러의 조화를 중시하며 '칸예 스타일'이라는 자신만의 색깔을 만든 인물이다. 올블랙이나 회색·베이지 등 차분한 컬러를 짝짓는 식에다, 스웨트 셔츠와 스태디움 재킷 등 단순한 실루엣의 옷을 주로 걸친다. 멋쟁이로 알려진 초창기 나이키와 손을 잡고 ‘에어 이지’ 모델을 선보였고, 아디다스와 함께 ‘이지 부스트’ 컬렉션으로 입지를 다졌다. 이후 A.P.C와의 협업 제품은 미국에서 단 하루만에 완판되는 기록을 남겼다. 이제는 아예 자신의 이름을 내건 디자이너 브랜드를 만들어 힙합 패션에 또다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새로운 패셔니스타 래퍼 발굴도 그 중 하나다. 예를 들어 2016 가을겨울 컬렉션에서 모델로 등장시켰던 후배 래퍼 릴 야티는 2017년초 노티카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발탁돼 199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브랜드의 부활을 꾀하고 있다. 
입는 옷마다 화제가 되는 래퍼 에이셉로키. 럭셔리 브랜드의 모델로만이 아니라 협업 디자이너로도 유명하다. [사진 에이셉로키 인스타]

입는 옷마다 화제가 되는 래퍼 에이셉로키. 럭셔리 브랜드의 모델로만이 아니라 협업 디자이너로도 유명하다. [사진 에이셉로키 인스타]

올초 노티카 디자이너로 발탁된 힙합 뮤지션 릴 야티. [사진 릴 야티 인스타]

올초 노티카 디자이너로 발탁된 힙합 뮤지션 릴 야티. [사진 릴 야티 인스타]

에이셉로키도 그에 못지 않은 패션계 '거물'이다. 그가 입은 구찌 스웨트 셔츠가 '에이셉로키 셔츠'로 불릴 정도다. 화려한 시계나 주얼리로 멋을 내는 것이 특기다. 노래 '패션 킬라(Fashion Killa)'에서 프라다·돌체앤가바나·발렌시아가·헬무트 랭·알렉산더왕 등 수많은 럭셔리 브랜드를 읊조릴 정도로 관심이 많다. 음악은 언제하나 싶게 패션 행사에도 자주 얼굴을 비춘다. 알렉산더 왕, 디올 옴므 쇼에서 맨 앞자리를 차지하는 단골 손님이고, 스스로 팬임을 강조한 J.W. 앤더슨 쇼에서는 오프닝 모델로 서기도 했다. 라프 시몬스, 릭 오웬스 같은 디자이너와의 협업도 자유자재로 벌인다.  
남성 패션지 GQ의 표지모델이 된 찬스더래퍼. [사진 찬스더래퍼 인스타]

남성 패션지 GQ의 표지모델이 된 찬스더래퍼. [사진 찬스더래퍼 인스타]

두 사람 뒤를 이어 최근 패션계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는 래퍼들은 열 손가락이 넘는다. 트래비스 스캇 역시 최근 패션쇼 앞자리에 가장 먼저 초대 받는 뮤지션으로, 알렉산더 왕 팀에 합류해 2016 FW 광고 캠페인에도 등장했다. 2017년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신인상, 최우수 랩 앨범상을 받은 찬스 더 래퍼 역시 패션지 커버 모델은 물론 겐조와 협업한 H&M 광고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경계 허물기, 통섭의 시대
힙합의 전성시대는 지금 문화 전반에서 일어나는 '경계 허물기'에서 비롯됐다고 봐도 무방하다. 클래식과 팝이, 영화와 웹툰이 만나 영역을 넘나들며 진화하는 가운데 패션 또한 통섭의 대열에 들어섰다는 이야기다. 당대 예술 사조, 건축 양식, 선대 예술가에게서 영감을 얻던 디자이너들이 길거리와 대중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고상한 상류층이 애용하던 하이엔드 패션과 비속어와 욕설 가사가 난무하는 힙합이 하나로 연결된다.  
알렉산더 왕 광고에 등장한 래퍼 빅 멘사. [사진 빅 멘사 인스타]

알렉산더 왕 광고에 등장한 래퍼 빅 멘사. [사진 빅 멘사 인스타]

또 힙합 자체가 지니는 통섭의 속성도 한 몫한다. 래퍼이자 캘빈 클라인과 작업한 조이 배드애스는 패션지 보그와의 인터뷰에서 "힙합 자체가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이라며 "패션 문화 음악 예술이 모두 합해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힙합은 혼자 하는 음악이 아니다. 크루, 컬렉티브 그룹, 스쿼드라는 개념이 있다. 소속사와 별개로 서로 친목과 인맥을 통해 모임을 만드는데, 노래 하나를 내놓기까지 서로가 단점을 메워주고 장점을 살리는 것이 목적이다. 에이셉로키의 크리에이티브 그룹인 AWGE가 대표적이다. 국내에도 '섹시스트릿' '더코홀트' 'ADV' '벅와일즈' 등이 크루의 이름으로 활동 중이다. 음악·영상·패션·사진 등 각자의 분야에서 팬덤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문화를 빠르게 확산시키기에 유리하다. 내로라하는 럭셔리 브랜드마다 SNS를 통해 래퍼들과의 친분을 드러내고, 패션쇼와 광고 캠페인에 이들을 불러들이는 건 이러한 파급력을 무시하지 못하기 때문일 터다. 
무엇보다 힙합은 강한 자기 표현과 창조력의 산물이다. 음악이 아닌 보여주는 모든 모든 것이 그러하다. 패션을 통해 자신의 화려함과 위대함을 보여주려 했던 그 힙합의 스웨그는 오히려 더 공고해지고 있다. 허세라고? 하지만 어쩔 것인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이 시대에 힙합은 오히려 두 팔 들어 환영할 만한 멋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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