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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속으로] 지리산 자락 젊은이들, 천왕봉 올라야 남자로 인정

지리산 국립공원 50년, 터줏대감들과 1박2일 탐방기
지난 2일 전남 영광에 있는 대안학교인 성지송학중학교 학생 등 전국에서 온 탐방객 30여 명이 천왕봉에 올랐다. [송봉근 기자]

지난 2일 전남 영광에 있는 대안학교인 성지송학중학교 학생 등 전국에서 온 탐방객 30여 명이 천왕봉에 올랐다. [송봉근 기자]

지리산은 1967년 12월 국립공원 1호로 지정됐다. 올해로 50년째. 기자는 지난 1일부터 1박2일간 지리산을 오르며 ‘지리산 사람들’을 만났다. 경남 산청이 고향인 최수덕(63)씨와 함께였다. 함양 출신이자 지리산국립공원사무소(이하 사무소) 구조대원 곽일권(58)씨도 일부 구간을 함께했다. 두 사람은 젊은 시절 한때 도시에서 산 걸 제외하면 평생 지리산 자락에서 살았다. 곽씨는 160회, 최씨는 200회 천왕봉을 올랐을 정도다.
 
산행 코스는 백무동 계곡을 출발, 장터목 대피소에서 1박 한 뒤 천왕봉~벽계사~중산리 계곡까지. 백무동에서 5.8㎞ 떨어진 장터목 대피소까지 등산로는 잘 정비돼 있었다. 하지만 곳곳이 가파르고 돌무더기가 많아 험난했다. 곽씨는 “50~60년까지 이런 등산로가 없어 백무동에서 조금만 들어가도 길을 찾지 못해 다시 내려오기 일쑤였다”고 말했다.
 
왼쪽부터 구조대원 곽일권씨, 장터목 대피소 이홍우 팀장, 산악인 최수덕씨다. [송봉근 기자]

왼쪽부터 구조대원 곽일권씨, 장터목 대피소 이홍우 팀장, 산악인 최수덕씨다. [송봉근 기자]

최씨는 지리산 등산로를 개척하고 직접 그린 지도를 보급한 우천(宇天) 허만수(1916~76)씨를 만난 일화를 들려줬다. 허씨는 진주에서 태어나 열 살 때 일본에 건너가 대학 시절 산악회를 만들어 일본의 주요 산을 올랐다. 29세 때 진주에 돌아와 33세 때부터 지리산 세석평전에 움막을 짓고 생활하며 조난객을 구조하는 등 30년 가까이 지리산을 지켰다. 그러다 76년께 지리산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후 산악인들은 그를 ‘지리산 산신령’으로 불렀고, 80년 중산리 법계교 옆에 비석을 세워 추모했다.
 
최씨는 “중학 시절 지리산에서 우천 선생을 만났는데 길 잃을 것을 염려했던지 자신이 그린 지도 한 장을 건네줘 수년간 사용했다”며 “지리산 최초 등산 안내도나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허씨 외에도 지리산에는 영웅으로 칭송받는 사람들이 있다. 경남 고성 출신의 김경열(1917~95)씨는 언론인으로 광복 이후 지리산 얘기를 많은 글로 남겼다. 62~64년 ‘지리산 자락의 민화와 토요(土謠)’ ‘지리산 학술조사 및 칠선계곡 등반로 개척보고서’ 등을 부산일보에 시리즈로 연재했다.
 
우종수(1921~2014)씨는 남원에서 태어나 55년 지리산 최초의 산악 단체인 ‘연하반(지리산악회)’을 창설해 지리산국립공원 지정을 주도한 인물이다. 72년 조재영·조출환·김석문씨 등이 만든 두류산악회는 천왕봉 아래 천왕샘을 만들고 지리산 이정표 설치, 탐방로 개설, 등산지도 제작 등을 했다.
 
최수덕씨와 곽일권씨는 이들의 후예 격이다. 최씨는 “지리산 자락의 젊은이는 성인식을 하는 것처럼 천왕봉을 올라야 남자로 인정받았다”고 지리산 입문 과정을 설명했다. 곽씨는 “나물 등을 캐다 길 잃은 주민을 찾으러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지리산과 가까워졌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산행 중 다리가 아픈 등산객을 만나면 스프레이 파스로 응급조치를 해줬다. 곽씨는 “지금은 탐방로에 무인 구급함과 심장 제세동기까지 설치돼 있을 정도로 등산로가 잘 정비돼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참샘(약수터) 인근에는 물파스·후시딘 등이 있는 무인 구급함이 있었다.
 
지리산 장터목 대피소.

지리산 장터목 대피소.

출발 4시간30분 만에 도착한 곳은 97년 세워진 장터목 대피소. ‘장터’가 붙은 건 옛날 산청·함양 사람이 정기적으로 만나 물건을 파는 장을 열어서다. 지리산에는 71~97년에 모두 8개의 대피소가 들어섰다. 이 가운데 피아골·치밭목 대피소만 민간이 운영하고 나머지는 사무소가 직영한다. 치밭목 대피소(산장·해발 1425m)는 ‘지리산 터줏대감’으로 불렸던 민병태(61)씨가 지난해 9월까지 31년간 임대 운영했던 곳이다. 현재 사무소가 새로 대피소를 짓고 있다.
 
민씨는 1985년 4월 치밭목에 올랐다가 철근 콘크리트의 뼈대만 남아 폐허나 다름없던 산장을 봤다. 71년 건립됐으나 72년부터 산장지기가 없어 추위를 피하려던 등산객이 나무 침상과 출입문 등을 하나둘 빼내 장작으로 쓴 탓이다. 그는 산악회 회원들과 힘을 모아 그해 11월 산장을 고쳐 개장했다. 이후 산장에 살며 100여 명의 조난객을 구조했다. 민씨는 치밭목이 재개장하는 7월부터는 사무소 구조대원으로 일한다. 국내 최장수 산장지기에서 구조대원으로 지리산 사람의 명맥을 이어가는 것이다. 민씨는 “죽을때까지 엄마 품 같은 지리산과 함께해야 할 운명인 것 같다”고 말했다.
대피소 안 숙소. 도서관 같은 칸막이가 머리 부분에만 나눠져 있어 자리를 구분한다.

대피소 안 숙소. 도서관 같은 칸막이가 머리 부분에만 나눠져 있어 자리를 구분한다.

 
장터목 대피소엔 30~40여 명의 탐방객이 서로 모르는 사이인데도 준비해온 음식을 나눠 먹으며 시끌벅적했다. 세석 등 대피소에서만 10여 년간 근무한 이홍우(43) 장터목 대피소 팀장은 “국립공원 지정 후 산에 쓰레기를 버리거나 담배 피우는 모습은 3~4년 전부터 거의 사라졌다”며 “2013년 입산시간 지정제 시행 후 대피소 인근에서 야영하며 술 마시던 일도 더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이곳 직원 7명은 3~4명씩 일주일간 대피소에서 생활하고 산 밑에서 4일간 휴식한다. 근무시간은 오전 6시부터 오후 11시까지. 대피소 청소와 구조·구급 활동이 주요 임무다.
 
오후 9시 불이 꺼지자 사방이 껌껌했지만 대피소 밖 하늘엔 별이 총총했다. 다음날 오전 4시쯤 탐방객들은 일출을 보기 위해 대피소를 빠져나갔다. 장터목에서 천왕봉 가는 길은 지리산 3대 봉우리인 반야봉과 노고단 등 고봉들이 보이고, 첩첩산중이어서 ‘장엄하다’는 말이 떠올랐다.
 
지리산 봉우리는 유래가 있다. 노고단은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기려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성삼재(1102m)는 삼한시대 마한군에 쫓기던 진한왕이 성이 다른 3명의 장수에게 이곳을 지키게 해 붙여졌다. 반야봉 아래 피아골은 원래 피밭(稷田)이 많아 피밭골로 불리다 바뀌었다. 한국전쟁 등 나라가 어지러울 때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곳이기도 하다.
 
천왕봉에 다가가자 ‘통천문(通天門)’이라는 바위 굴이 나왔다. “사람도 지나면 신선이 되고 신선도 이곳을 지나야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는 최씨의 설명이다. 천왕봉엔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30여 명의 탐방객이 있었다. 아들(14)과 함께 온 유정(52·여·전남 해남)씨는 “평생 소원인 천왕봉에 올라 너무 기쁘다”고 말했다.
 
천왕봉 표지석에는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는 글이 있다. 원래 ‘경남인’과 ‘영남인’을 거쳐 지금의 글이 새겨졌다. 인근 바위에 천주(天柱·하늘을 받드는 기둥)라는 글도 있다. 선인들의 발자취도 많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지리산을 유람하고 지은 유람록만 70편 정도다. 김종직(1431~92)이 1472년 함양군~천왕봉~영신사 등을 4일간 둘러보고 쓴『유두류록』, 김일손(1464~98)이 1489년 10일간 함양~쌍계사 등을 유람하고 쓴『두류기행록』등이 그것이다. 최치원(857~915)은 천왕봉 아래 법계사에 머물 때 법당 남쪽의 바위에 자주 올랐는데 이 바위를 문창대(文昌臺)라 한다.
 
장터목 가는 백무동 등산로 초입.

장터목 가는 백무동 등산로 초입.

천왕봉에서 천왕샘과 개선문을 지나 법계사를 거쳐 중산리로 내려가는 길은 백무동 계곡에서 올라오던 길보다 더 가팔랐다. 법계사를 지나 종착지가 다가올수록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지리산은 좋은 것만 베풀어주지, 사람처럼 상처 주거나 뭘 요구하지 않아, 그러니 찾는 이의 마음이 가벼워지지.” 산행을 마치며 최씨가 한 말이다.
 
지리산 지켜주는 ‘천왕할매석상’ 분실됐다 되찾아
지리산을 지키는 산신령은 ‘천왕할매’다. 옛날에는 천왕봉 인근 성모사(聖母祠)란 사당에 ‘천왕할매석상(일명 성모석상·사진)’도 있었다. 이 석상의 주인공이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 고려 왕건의 어머니 위숙 왕후,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이라는 갖가지 설이 전해왔다. 이승휴(1224∼1300)의 『제왕운기』 등 문헌에도 등장한다.
 
그런데 해방 이후 이 석상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누가 훔쳐갔다거나 특정 종교집단이 훼손했다는 여러 추측만 무성했다. 그렇게 천왕할매는 지리산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남았다. 그러던 1987년 진주의 한 과수원에서 사라진 천왕할매석상이 훼손된 채 발견됐다. 이후 이 석상은 우여곡절 끝에 천왕봉이 아닌 천왕사(중산리)로 옮겨졌다. 이 과정에 지난 2000년 경남 산청군민들로 구성된 성모상 건립추진위원회가 중산관광단지(시천면 중산리)에 새 천왕할매석상을 세우기도 했다. 이 석상은 높이 2.1m, 너비 1.5m로 원형 천왕할매석상보다 조금 더 크다. 함양군도 2000년부터 ‘지리산 천왕 축제’를 열어 천왕할매를 기리고 있다.
 
지리산 사람들은 이 천왕할매가 예나 지금이나 지리산을 찾은 사람을 치유하고 기도를 하면 들어준다고 믿고 있다.
 
함양·산청=위성욱 기자 w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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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