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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방울 잉크 자국이 들려주는 이야기

윌리엄 모리스가 디자인한 책 『세상 너머의 숲(The Wood Beyond the World)』.<div>아침볕 드는 독일 라이프치히 국립도서관 창가에서 만난 풍경이다.</div>

윌리엄 모리스가 디자인한 책 『세상 너머의 숲(The Wood Beyond the World)』.

아침볕 드는 독일 라이프치히 국립도서관 창가에서 만난 풍경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윌리엄 모리스와의 ‘만남’이 일어난 순간은, 그가 직접 제작에 관여한 판본이 내 손에 촉각으로 닿았을 때였다. 까실하고 두툼한 종이의 감촉, 견실하게 눌려서 찍힌 볼록판 인쇄의 우둘두둘함, 저 풍요롭게 새까만 깊이를 담은 흑먹의 빛깔. 마침 도서관 창문을 통해 겨울날 오전 북구의 햇빛이 황금색으로 깊숙이 비쳐 들어왔다. 그윽한 자연의 빛을 머금은 종이는 마치 결이 살아있는 피부 같았다. 그 아래에서 맥이 고동치고 따뜻한 피가 흐를 것 같았다.
 

유지원의 글자 풍경

재질의 물성이 배제되는 복제의 기만
재질의 숨 쉬는 아름다움, 마티에르(matière). ‘물질’과 ‘재료’를 뜻하는 영어 단어 ‘매티리얼(material)’의 어원은 라틴어 ‘마테르(mater)’에서 왔다. ‘어머니’라는 뜻이다. ‘자궁’을 뜻하는 ‘매트릭스(matrix)’ 역시 ‘어머니’가 어원이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생명은 물질의 육신을 갖춘다. 어머니로부터 받은 육신을 입은 한, 인간은 촉감할 수 있는 재질의 물리적인 견고함에 안도감을 느끼리라 믿는다.  
윌리엄 모리스가 1896년에 디자인을 완성한 『초서작품집(The Works of Geoffrey Chaucer)』 독일 클링스포어 아르히프에서 직접 접한 판본

윌리엄 모리스가 1896년에 디자인을 완성한 『초서작품집(The Works of Geoffrey Chaucer)』 독일 클링스포어 아르히프에서 직접 접한 판본

 
어떤 물질이 그 물질이기 위한 고유한 특성은 유전자나 분자가 배열되는 ‘패턴(pattern)’에 의해 결정된다. 패턴의 어원은 물론 라틴어 ‘파테르(pater)’에서 왔다. ‘아버지’라는 뜻이다. 서구 문화에서는 형상이 정신적인 아버지라면, 재질은 물리적인 육신의 어머니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글자건 그림이건 종이 위에 구현되는 예술은 흔히 ‘평면조형’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한 장의 종이는 아무리 얇더라도 사실 3차원 입체물이다. 2차원 평면에서 일어나는 일에 비해, 종이 옆면의 미세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은 무시되곤 한다. 재질이 형상보다 우세하게 관할하는 이 영역에서도 숱한 물리적인 현상과 행위들이 일어난다.
 
종이에 남겨지는 자국들은 ‘형상의 아버지’와 ‘재질의 어머니’가 합작한 결과이지만, 흔히 형상 속에 담긴 언어적인 정보가 전부라고 여겨지는 것 같다. 오늘날 디지털과 옵셋 인쇄의 창백한 기술 환경 속에서 이런 경향은 더 심해져 간다. 재질 속에는 다른 층위의 비언어적인 정보들이 정교하게 담긴다.  
윌리엄 모리스가 1896년에 디자인을 완성한 『초서작품집(The Works of Geoffrey Chaucer)』 국내 디자인 도서에 여러 차례 복제되어 실린 도판

윌리엄 모리스가 1896년에 디자인을 완성한 『초서작품집(The Works of Geoffrey Chaucer)』 국내 디자인 도서에 여러 차례 복제되어 실린 도판

 
국내 디자인 도서들에서 여러 차례 복제된 도판으로 윌리엄 모리스를 접했을 때, 그의 작품들은 불필요하게 복잡하고 심지어 조잡해 보이기까지 했다. 제대로 된 ‘만남’이 일어나지 못한 것이다. 실제 스케일과 물성과 기법 그대로 19세기 판본을 직접 접했을 때, 윌리엄 모리스의 이상은 바로 그 미묘하게 섬세한 풍요 속에 담겨 있었다. 인터넷은 말할 것도 없이, 오늘날 대량생산 공정에서 책이 전하는 복제의 가짜성이란 얼마나 기만적인가!
 
자필 글씨가 전하는 비언어적 메시지
손으로 쓴 글씨는 말끔하고 균질하게 인쇄된 글자보다 한층 많은 비언어적인 메시지들을 전한다. 저명한 고음악 연구자이자 지휘자인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는 인쇄된 악보 대신 가급적 작곡가가 직접 손으로 쓴 자필악보를 보라고 권한 바 있다. 원본을 구하기란 어려울 테니, 차선책으로는 자필악보를 최대한 원본에 충실하게 복원한 복제본인 영인본을 구해서 보는 것이 좋다고 했다.
 
인간은 미세한 물리적인 자국과 흔적들 속에서, 놀랍게도 타인의 행동과 마음속 자취와 요동을 감지해낸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온 편지라도 마주할 때면, 같은 자국에서부터도 언어 너머의 흔적을 더 필사적으로 해독한다. 글씨를 써내려간 이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특정 순간의 머뭇거림이나 흔들림을 느끼고 그 마음을 읽는다.  
 
육성의 말이 몸짓·눈빛·표정 같은 비언어적인 메시지를 수반한다면, 육필의 글씨도 몸의 상태·기분·감정 같은 비언어적인 정보를 전달한다. 자필악보의 무수히 생생한 자국들로부터 연주자는 시간을 건너뛰어 작곡가의 음악적 상상 속 단서들을 읽어낸다. 아르농쿠르는 이것을 무의식적으로 전해지는 ‘마술적인 암시’라고 표현했다.
 
종이 위에 한 점 자국이 남기까지
시간의 경과에 따라 커피 한 방울이 자국을 남기는 추이

시간의 경과에 따라 커피 한 방울이 자국을 남기는 추이

이런 암시들을 읽어내는 인간의 능력이란 과연 마술처럼 놀랍다. 그러나 이것은 마술에만 머무르지 않고 과학으로도 설명된다. 신소재공학과의 연성물질물리실험실을 방문했을 때였다. 물방울 하나가 표면에 떨어진 후 증발하는 과정을 초고속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을 우연히 봤다. “신기하네요! 물방울이 X·Y·Z축 모두 균등한 비율로 작아지는 게 아니라, X·Y축 면적에 비해 Z축 높이가 현저하게 낮아져요.”  
 
이 말에 박사 과정 연구원이 답해주었다. “네, 잘 보셨어요. 그게 바로 저희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커피링 현상’이 생기는 이유에요.”
 
잉크 대신 커피 한 방울이 종이 위에 떨어졌다. 바로 이 작은 자국 하나가 남기까지의 과정에는, 숱한 물리적인 현상들이 얽혀든다. 종이의 단면은 작은 섬유인 셀룰로오스의 복잡한 구조로 조직된다. 이 조직에 커피 방울이 스며든다. 종이 뒷면까지 적시치 않도록, 종이 표면은 대개 코팅 처리된다. 이 코팅으로 인해 커피 방울이 순식간에 흡수되지는 않으므로, 종이 표면에 맺히거나 묻은 채 증발이 일어난다. 잉크와 커피액 등 액체 속에는 색을 남기는 고체 분자들이 들어있다. 액체가 증발하고 이 고체 분자들이 종이에 남겨지며 한 점 자국이 생긴다.  
 
액체가 증발할 때, 종이 표면과의 마찰력에 의해 X·Y축 평면 면적의 형태는 고정된 채로 Z축의 높이가 먼저 낮아진다. 그러면 가장자리가 안쪽보다 증발하는 속도가 더 빨라진다. 그에 따라, 커피 방울 내부에서는 안쪽의 물로 가장자리 쪽을 채우려는 흐름이 일어난다. 그렇게 색을 내는 분자들은 가장자리로 밀려나가면서 쌓인다. 이 분자들이 쌓여서 밀집되는 가장자리는 더 짙은 농도의 색을 낸다. 이것이 커피 자국 바깥쪽이 테두리처럼 짙어지는 이유다.  
 
울의 잉크 자국이 남기는 최초의 원초적인 흔적은 이런 이야기들로부터 출발한다. 필기도구를 움직이는 속도, 힘을 주느라 눌러쓴 필기의 압력, 멈칫 고민하느라 그대로 잉크가 번진 흔적, 손목이 움직이는 진폭, 손가락에서 필기구를 돌리는 회전, 잉크의 증발에 따른 농도 변화, 이 모든 불균질한 세계가 종이 위에 자국으로 남는다. 미세하게 얇은 종이 단면의 세계, 재질의 세계, 물질의 육신을 낳는 어머니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 자국의 존재로써 말로는 다 못할 비밀들을 우리에게 속삭여준다. ●
 
 
유지원
타이포그래피 연구자·저술가·교육자·그래픽 디자이너. 전 세계 글자들, 그리고 글자의 형상 뒤로 아른거리는 사람과 자연의 이야기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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