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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그대의 찬 손

송호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

송호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

그날은 기어이 비가 내렸다. 일몰의 늦은 비였다. 두 전(前) 대통령의 영욕(榮辱)이 교차된 날, 죽어 상승하고 살아 추락하는 한국 정치의 비극적 법칙이 동시 상영된 날, 종잡을 수 없는 국민의 심사를 그렇게라도 달래려는 느닷없는 비였다. 2800원짜리 핀을 꽂은 올림머리는 여전했지만 초췌했다. 수갑이 채워진 손, ‘나대블츠 503번 수인(囚人)’, 그대의 찬 손. 청와대로 1번지 관저의 세입자가 바뀌자 전임자는 18가지 혐의로 결박된 손을 모으고 모습을 나타냈다. ‘배신의 정치’를 성토하던 결기는 사라졌고, 죄목을 묻는 젊은 판사의 심문에 체념의 눈길은 천장을 응시했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법의 정신’에 의해 전직 청와대 주인은 무직 잡범(雜犯)이 되었다.
 

한국 정치는 정산보다
청산 유전자가 너무 강해 문제다
보수는 진보를 청산했고
진보는 보수를 일소했다
이제 극단적 상승과 추락 대신
관용과 성공한 정치 보고 싶다

그 시각, 남쪽 봉하마을엔 상처를 치유받고 싶은 사람들이 모였다. 사람 사는 세상을 외치다 결국 뇌물죄로 몰려 마지막 남은 출구로 몸을 던진 전직 대통령을 추모하는 자리는 눈물이었다. 8년을 쏟아내고도 다시 고이는 통한의 눈물이었다.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검찰청 포토라인에서 잡범 취급을 받은 그 수모를 원망하지 말라고 일렀다. 그의 말대로 ‘운명’이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닥치는 역풍, 이념 불화가 초래한 사화(士禍)적 스토리의 상징인 부엉이바위에 대통령이 된 문재인이 다짐했다. ‘우리는 다시 실패하지 않겠다’고, ‘그리운 당신의 꿈을 실현하겠다’고.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진보든 보수든 성공한 정치를 보고 싶다. 상승과 추락의 극한적 부침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지금부터 몇 년 후, ‘그대의 찬 손’에 불에 덴 듯 상처를 입고 전임자를 잡범 취급한 정권을 다시 절벽에 세우는 원억(冤抑)의 정치가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통치자가 법치의 쇠망치에 맞아 파멸하는 한국 정치의 천형(天刑)이 문재인 정권에서 막을 내렸으면 좋겠다. 전(前) 정권의 행보를 초토화하고 전임자를 유배해야 하는 이 처절한 운명적 형식 말이다.
 
1532년에 축조된 일본 나고야성(城)은 도쿠가와 시대에 개축해 오늘에 이른다. 오다 노부나가가 태어난 이 성은 오사카, 구마모토성과 더불어 일본 3대 고성(古城)이다. 높이 20여m에 이르는 성벽을 여러 번주(藩主)들이 고쳐 쌓았다. 허물고 새로 쌓은 게 아니다. 개축한 부분의 벽돌에 문양을 새겨 누가 어떻게 수리했는지를 확인하게 했다. 더러는 치명적 실수를 저질렀지만 전임자의 축조기술을 성찰해 한 걸음 나아갔다. 480년 풍상을 견뎌온 이유다. ‘일소(一掃)의 통치’ ‘청산의 통치’였다면 각 번주의 지혜는 소멸되었을 것이다.
 
청산(淸算)과 정산(精算)은 다른 개념이다. 청산은 부정을 낳지만 정산은 진화를 잉태한다. 정밀하게 진단해 좋은 점을 잇고 새로운 길을 뚫는 것이 정산이다. 한국정치는 정산보다 청산 유전자가 너무 강해 문제다. 광장의 촛불 민심도 청산을 더 원하고, 실정(失政)의 책임자를 지목해 발본색원하기를 외친다. 대선 정국이 원색적이고 거친 비난과 냉소의 언어로 뒤덮인다. 민주화 30년의 정치는 ‘탈정당화를 통한 정당화’, 전임자를 청산해 정당성을 구축하는 비난의 굴레였다. 보수는 진보를 청산했고, 진보는 보수를 일소했다. 정통성 탈환의 참극이 5년마다 반복되는 이 상황을 바꿔보려 협치·연대·통합을 때마다 꺼내들지만 그것을 축조하는 관용의 통치는 아직 요원하다.
 
원망을 해소해 갈망의 꽃을 피워도 운명적 역풍에 핏물처럼 낙화하는 애증의 교차에 ‘그대의 찬 손’이 있다. 헌재가 이미 탄핵한 통치자에게서 자백을 받아내려 병합 심판을 명령한 ‘법의 정의’를 부정할 필요는 없겠다. 그런데 저 운명적 형식이 여전히 어른거려 불안하다. 반복되는 파멸의 정치가 개막 팡파르를 신나게 울리는 새 정권에 스며들지 모른다는 불가항력적 무의식이 작동한 결과다.
 
8년 전 5월,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포토라인에 섰을 때도 같은 심정이었다. 필자는 이렇게 썼다. “국민의 명예와 정치의 품격이 달려 있는 소환 문제를 검찰의 성곽에 무작정 던져두는 것은 올바른 처사가 아닙니다… 정치란 우리 모두를 법의 수인이 되지 않게 하는 유일한 출구입니다. 국민의 자존심과 통치자의 명예를 동시에 구제하는 방식에 대한 고통이 필요합니다”라고 (2009년 5월 5일자). 정권은 외면했고, 결국 자신에게 내린 사망선고가 스스로 자존을 수호하게 했다. 생명 공양(供養)이 인당수 물갈퀴를 거뒀다.
 
박근혜는 국민의 자존도 자신의 명예도 지키지 못했다. 지킬 능력이 없음이 판명된 전(前) 통치자에게 법(法) 실증주의는 무엇을 구제하려 하는가. 품격 있는 회오(悔悟)? 아니다. 오직 남은 것은 연민, 언론 카메라에 수십 번 비춰질 초췌한 모습과 나약한 항변, 그리고 아버지 시간으로 나 홀로 망명했던 ‘나대블츠, 503번 수인’, 그대의 찬 손.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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