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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시시각각] 보수의 미래

이훈범 논설위원

이훈범 논설위원

프랑스 소르본대학은 13세기 신학교로 출발했다. 바야흐로 종교의 전성시대를 맞아 명성이 드높아갔지만 그것은 부지불식 악명을 쌓는 일이기도 했다. 400년 동안 유럽 대륙을 뒤덮은 종교재판을 주도한 것이 소르본대학이었다. 오죽 ‘골통’ 짓을 했으면 국왕인 프랑수아 1세가 소르본에 맞서 진보적 개방대학 ‘콜레주 드 프랑스’를 만들었을까.
 
18세기 들어 소르본은 또 다른 악명을 쌓는다. 가톨릭의 충직한 보호자를 자임한 과격 보수집단으로서 계몽사상가들을 탄압하고 계몽서적들을 불태웠다. 그렇게 또 한번 시대변화를 거스르다 프랑스혁명으로 폐교되고 만다. 소르본이란 이름이 가까스로 회생한 것은 100년이 지난 제3공화정 때였다. 이후 대학으로서 순수학문 발전에 이바지했지만, 끝내 태생적 보수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이름값을 못하는 대학으로 남고 말았다. 콜레주 드 프랑스가 비주류 사상을 표현하는 장으로서 오늘날까지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과 다르게 말이다.
 
요즘 이 땅의 보수정당을 보고 있자니 소르본의 몰락을 보는 것 같아 안쓰러워 하는 얘기다. 옛 영화의 그림자 뒤에서, 낡고 닳아 형체도 남지 않은 것을 지키려 애쓰는 모습이 그렇다. 그들이 지키려는 것은 뭘까. 하도 막 굴려서 민주공화국, 자유시장, 법치 같은 오래된 보수 가치들은 다 떨어져 나갔다. 눈을 씻고 찾아도 남은 건 기득권밖에 없어 보인다.
 
세계 각국 선거에서 훤히 보였는데 보지 못했나 보다. 우리보다 이틀 앞서 치러진 프랑스 대선에서 어떻게 의석 하나 없는 인터넷 정당의 서른아홉 살 대표가 당선될 수 있었는지 말이다. 지난해 말 미국 대선에서 어째서 힐러리 클린턴이 도널드 트럼프를 꺾을 수 없었는지 말이다. 미국이나 프랑스 국민들의 메시지는 간결 명료하다. 시대상황은 나 몰라라 기득권만 틀어쥔 기성 정당과 정치인들은 싫다는 거다.
 
미 국민들이 보기에 클린턴은 부시와 다를 바 없는 기득권층이다. 민주당 경선에서 자칭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 돌풍이 그래서 나왔다. 공화당은 제 색깔의 후보조차 내지 못했다. 미 대선은 자칫 아웃사이더들의 대결이 될 수 있었다.(그랬더라면 샌더스가 이겼을 거라 나는 본다.) 미 국민들은 기득권에 닿기보다 재벌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고 그래서 트럼프를 찍었다.
 
프랑스는 좀더 화끈하다. 프랑스 유권자들은 기득권의 청산을 원했다. 무능하거나 부패했으며, 또는 둘 다인 좌우 양대 정당을 모두 버렸다. 정치판을 처음부터 새로 짜길 바랐다. 그런 열망에 부응한 게 에마뉘엘 마크롱이었고, 그래서 선택받았다. 그는 다음달 총선 공천자의 절반을 정치 경험이 없는 신예들로 뽑았다. 마뉘엘 발스 전 총리가 사회당을 버리고 공천을 희망하자 거절하며 내놓은 대답이 명쾌하다. “우리가 할 일은 재활용이 아니다.”
 
워낙 기울어진 운동장이었지만 우리 대선의 메시지도 분명하다. ‘적폐’란 기득권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배우지 못한다. 선거기간 내내 “귀족노조”만 외쳤던 후보는 양지 찾아 가출했던 ‘귀족의원’ 13명의 ‘재활용’을 허용했고, 그 대가로 수갑을 푼 친박들이 다시 꿈틀대는 모습을 웰빙 초선들이 무기력하게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가짜 개혁파 의원들의 분리수거에 성공한 정당 역시 유승민이라는 퍽 쓸 만한 자산을 키워낼 능력 없이 ‘인위적 정계개편’이라는 무딘 가위를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기득권과 개혁은 함께 쥘 수 있는 게 아니다. 자유한국당 초선들의 개혁 성명서가, 바른정당의 자강 결의가 공허해 보이는 게 그래서다. 손 안에 든 걸 탈탈 털어 비워야 다시 뭘 쥐어야 할지 보이는 거다. 보이지도 않는 걸 쥘 수는 없다. “지혜로운 자는 행동으로 말을 증명하고 어리석은 자는 말로 행위를 변명한다”는 유대 격언 그대로다. 어리석음을 얼마나 털어내고 지혜로 채울 수 있느냐에 보수의 미래가 달렸다. 
 
이훈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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