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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왕훙원 칭찬 “젊은 날의 내 모습 보는 듯하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28>
1 부주석 시절, 중국을 방문한 캄보디아 국왕 시아누크 부부와 공연을 관람하는 왕훙원(가운데). [사진 김명호 제공]

1 부주석 시절, 중국을 방문한 캄보디아 국왕 시아누크 부부와 공연을 관람하는 왕훙원(가운데).[사진 김명호 제공]

독재자들은 공통점이 있다. 호기심이 유별나고 사람 욕심이 남다르다. 건망증이 심하고 싫증도 빨리 낸다. 후계자의 몰락은 시간문제다. 왕훙원(王洪文·왕홍문)은 마오쩌둥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얼떨결에 후계자가 되고 말로는 처절했지만, 가정문제는 지혜롭게 처리했다.
 

문혁 때 상하이 조반파 이끌어
중공 10차 대회서 마오 후계자로
저우언라이와 마오 옆자리 꿰차
엄숙해야 할 장소서 실수 잦아
마오 눈밖에 나 권력서 멀어져

1967년 8월 4일 상하이, 문혁 발발 이후 최대 규모의 무장충돌이 벌어졌다. 방직공장 노동자 왕훙원이 이끌던 공총사(上海工人革命造反總司令部)가 상하이를 쑥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마오쩌둥은 속이 후련했다. “젊은 날의 내 모습을 보는 듯하다. 농민 집안에 태어나 군인과 노동자를 두루 거쳤다니 나보다 낫다”며 왕훙원을 칭찬했다. 공총사가 발표한 포고문도 꼼꼼히 읽었다. 전국의 신문과 방송에 보도하라고 지시했다.
 
2개월 후, 마오쩌둥이 천안문 광장에서 홍위병을 사열했다. 이날 왕훙원은 마오쩌둥을 처음 만났다. 상하이 대표로 참석한 왕훙원은 마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상하이로 돌아온 왕훙원은 상하이 제1서기와 시장을 비판대에 세우고, 시 전역을 장악했다. 기세가 상하이의 왕이나 다름없었다. 중앙과 선을 대기 시작했다. 2년 후에 열린 중공 9차 대회에서 주석단에 일석을 차지했다. 9차 대회는 문혁의 성공을 자축하고 경험을 한마디씩 하는 대회였다. 마오쩌둥, 린뱌오(林彪·임표),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에 이어 왕훙원이 공인 조반파(造反派)대표로 발언했다. 상하이의 상황과 자신의 소감, 결연한 의지를 중국과 전 세계를 향해 쏟아 냈다. 대회 마지막 날 중앙위원에 피선됐다.
 
1971년 9월, 중국을 탈출하던 2인자 린뱌오가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린뱌오의 배신은 문혁에 대한 조롱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오의 상처가 클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후계자로 장춘차오(張春橋·장춘교)가 부상했다. 장춘차오는 허구헌 날 중난하이로 달려가 마오쩌둥 주변을 맴돌았다. 하루는 마오쩌둥의 호출을 받았다. 왕훙원의 문장이 어떤가 물었다. 장춘차오는 마오가 왕훙원을 염두에 둔다고 직감했다. 장춘차오의 예상은 적중했다. 베이징에 온 왕훙원에게 엉뚱한 명령이 떨어졌다. “학습에 열중해라.” 숙소에 와 보니 『마오쩌둥선집』과 마르크스, 엥겔스의 저작들이 쌓여 있었다.
 
왕훙원은 중앙의 엄숙하고 판에 박힌 업무가 생소했다. 별도로 휴식시간이 있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매일 오후 3시에 일어나 각종 문건과 씨름했다. 저녁 먹고 나면 새벽까지 회의였다. 해 뜰 무렵에 아침 먹고 잠자리에 드는 이상한 생활이 계속됐다. 책은 보기도 싫었지만, 볼 시간도 없었다. 1년이 후딱 지나갔다.
 
2 중공 10차대회에 마오쩌둥·저우언라이와 함께 참석한 왕훙원(왼쪽). 1973년 8월 24일, 베이징. [사진 김명호 제공]

2 중공 10차대회에 마오쩌둥·저우언라이와 함께 참석한 왕훙원(왼쪽). 1973년 8월 24일, 베이징. [사진 김명호 제공]

추이건디(뒷줄 오른쪽 둘째)는 노래를 잘했다. 왕훙원과 함께 방직공장 노동자 시절 가무단에서 활동했다. [사진 김명호 제공]

추이건디(뒷줄 오른쪽 둘째)는 노래를 잘했다. 왕훙원과 함께 방직공장 노동자 시절 가무단에서 활동했다. [사진 김명호 제공]

왕훙원을 관찰하던 마오쩌둥은 결심이 섰다. 중공 10차 대표대회 주비(籌備)위원회 주임으로 왕훙원을 추천했다. 부주임에는 저우언라이, 캉셩(康生·강생), 예젠잉(葉劍英·엽검영), 장칭(江靑·강청), 장춘차오 등 여러 명이 이름을 올렸다.
 
10차 대회에서 왕훙원은 저우언라이와 함께 마오쩌둥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누가 봐도 마오의 후계자였다. 부주석에 임명된 왕훙원은 부인 추이건디(崔根娣·최근제)와 이혼을 결심했다. 비서에게 지시했다. “밥 빌어먹는 엄마와 살지언정, 높은 관직에 오른 아빠와는 살지 말라는 말이 있다. 애들을 엄마에게 데리고 가라. 내가 이혼한 것은 지를 위해서 그랬다는 말도 전해라.”
 
추이건디는 평범하고 선량한 여인이었다. 상하이에 온 비서에게 말했다. “호의로 받아들이겠다. 앞으로 그 사람은 고관 일에 열중하고, 나는 노동자로 열심히 살겠다.”
 
마오쩌둥은 왕훙원을 외부에 노출시키기 시작했다. 프랑스 대통령 퐁피두를 함께 접견하는 사진이 인민일보에 대문짝 만하게 실렸다. 중요한 행사마다 마오의 옆에는 왕훙원이 있었다.
 
상하이에서 자유를 만끽하던 왕훙원은 적응에 문제가 많았다. 엄숙해야 할 장소에서 실수를 많이 했다. 마오쩌둥은 왕훙원에게 싫증이 났다. 덩샤오핑과 함께 시험대에 올렸다. 왕훙원에게 질문을 던졌다. “내가 죽으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왕훙원은 주저하지 않았다. “주석의 혁명노선은 영원히 계속될 겁니다.” 덩샤오핑의 대답은 정반대였다. “천하대란이 일어날 겁니다. 군벌들 간의 전쟁이 불 보듯 합니다.” 마오는 덩샤오핑이 한 수 위라고 생각했다.
 
왕훙원은 마오쩌둥을 만날 기회가 점점 줄어들었다. 술과 사냥으로 빠지고 사치도 즐기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나자 왕훙원은 체포됐다.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벌어졌다. 매년 10월 1일, 국경일만 되면 추이건디가 상하이에서 애들 데리고 면회를 왔다. 이날은 두 사람의 결혼기념일이었다.
 
추이건디는 이유를 묻는 직장 상사에게 담담히 말했다. “왕훙원은 죄인이다. 남들이 어떻게 보건 상관하지 않겠다. 나는 그 사람에게 이혼을 요구한 적이 없다. 왕훙원은 아직 젊다. 게다가 가난한 집안 출신이다. 나는 감옥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
 
추이건디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92년 8월 왕훙원은 감옥에서 58세로 세상을 떠났다.
 
 
김명호 

도민이 행복한 더 큰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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