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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은 하는 유전자

성석제 소설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어디에선가 전해 들은 것입니다. 이른바 전문(傳聞)이지요. “사람이 살며는 얼마나 살더란 말이냐”는 정선 아라리의 노랫말도 있듯 한 사람이 살고 만나고 느끼고 겪은 것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야기를 짓는 경우보다는 전해듣고 전해주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뜻이지요.
 

조선시대 신문고 대신 생긴 격쟁
백성이 왕 앞에서 억울한 일 호소
임진왜란 거치며 일본에도 전해져
광장의 ‘집단 격쟁’ 곧 결과 확인

조선시대에는 격쟁(擊錚)이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임금이 거둥(행차)하는 길목에 가서 서 있다가 징이나 꽹과리를 울려서 주의를 끌고 행렬이 멈추면 자신의 사연을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격쟁은 성종 임금 때부터 시작했는데 『조선왕조실록』에만 약 300회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격쟁은 신문고가 폐지된 뒤 대신 실시된 것으로 격쟁의 범위에는 자손(아들)이 조상(아버지)을 위해, 처가 남편을 위해, 동생이 형을 위해, 종이 주인을 위해 하는 것 네 가지가 기본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민폐에 관계되는 사항이면 격쟁을 해도 외람률(猥濫律)의 적용 - ‘외람되게 사건이 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문제를 삼았으니 저 놈을 당장 하옥했다가 곤장 100대에 유배 3000리에 처하라!’ 하는 식의 처분을 받지는 않았지요. 턱도 없는 일을 가지고 무고를 하거나, 사소한 일임에도 해당 도의 관찰사나 수령을 거치지 않고 외람되게 왕에게 직접 아뢰는 자만 처벌을 했던 겁니다.
 
백성이 절대 권력의 화신인 왕에게 직접 자신과 가족에게 일어난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나서는 것을 제도적으로 보장한다. 오늘날처럼 주권재민의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한 합리적인 민원 해결 제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반면 일본에는 격쟁 같은 제도가 임진왜란 전까지는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백성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왕이나 쇼군이 행차를 할 때는 혹여 자객의 습격이라도 받을까 하여 백성들을 무조건 땅에 꿇어 엎드리게 하고, 혹 고개라도 들면 호위무사로 하여금 가차없이 목을 날려버리게 했다고 전해집니다. 조선처럼 ‘인본주의(유학, 文, 天命)’를 기반으로 정통성을 확립한 게 아니라 ‘힘과 폭력(武)’으로 집권했으니 통치자나 통치자의 아랫것들이 일반 백성을 아주 우습게 보는 게 당연했겠지요. 일본의 전통적인 관(官) 우위 문화, 순치된 국민, 순종적 기질은 거기에서 만들어졌다고 보기도 합니다. 이럴 경우 백성은 늘 무지몽매하므로 두들기고 가르칠 대상이고 조용조(租庸調)의 의무만을 다하는 하찮은 소모품일 뿐이지요.
 
그런데 임진왜란 직후에 일본에도 격쟁 비슷한 일이 예외적으로 생겼다는 겁니다. 왜 임진왜란이 사이에 있는 것일까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은 상당수의 조선인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지식인·관리도 있었지만 일반 백성 가운데서도 전문 기술이나 특출한 기예를 가진 사람들을 많이 잡아갔지요.그렇지 않았다면 전쟁에 지고 다급히 철수하면서 굳이 배에 태워 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어느날 쇼군이 행차에 나섰습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수십 명의 호위무사들이 쇼군이 타고가는 가마를 철통처럼 에워싸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수상한 행동을 하는 자가 없나 살피고 있었습니다.
 
행차의 앞과 뒤, 옆에 있던 백성들은 땅에 엎드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어서 행차가 지나가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때의 쇼군이 누구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해준 분이 말씀을 하지 않으셨거든요. 추측컨대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에 일본 천하통일의 내전에서 승리하여 에도 바쿠후 시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든지, 그의 아들 히데타다였겠지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1603년 일왕에 의해 쇼군으로 임명되자마자 얼마 안 있어 아들에게 직위를 물려주었습니다. 히데타다는 1605년부터 1623년까지 쇼군의 자리에 있었지요. 이에야스는 ‘오고쇼(물러난 쇼군)’가 되어서 일상적인 정치 외에 외교· 화폐· 교통 등 전국적인 정책을 다뤘다고 합니다.
 
아무튼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쇼군의 행차가 진행 중인데 갑자기 남루한 옷차림의 한 백성이 한길 가운데로 불쑥 나서서 “할 말이 있습니다” 하고 외쳤습니다. 호위무사들은 거의 동시에 칼을 뽑아들었지만 백성이 쇼군의 행차를 가로막고 길 한 가운데 서서 종이 깨지는 듯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러대는 경우는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상황이라 순간적으로 어쩌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도 잠시, 그 백성의 운명은 그들의 칼 아래 어육이 되고말 게 뻔했지요. 엎드려 있던 백성들은 자신들의 머리 위로 가엾은 한 사람의 피가 뿌려질 것을 상상했습니다.
 
그런데 무사들의 칼이 헐벗은 한 백성의 몸뚱이로 몰려갈 때 가마에 앉아 있던 쇼군이 “잠깐만!” 하고 무사들을 제지했습니다. 그 역시 평생 처음 겪는 일이라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싶어졌던 겁니다.
 
그는 백성을 곁으로 오게 한 뒤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요. 백성은 자신은 조선에서 끌려온 사람으로 산 설고 물 설며 낯선 사람 천지인 일본 땅에서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너무 힘겹다, 고향에서 잘 살고 있던 사람을 납치해 왔으면 최소한 먹고 살게는 해줘야 하지 않느냐고 당당히 따졌습니다. 듣고 있던 쇼군이 감탄할 정도였지요. 무지렁이처럼 언제나 힘 없고 순종만 하는 백성들만 봐왔을 테니까요.
 
“네 뜻은 잘 알겠다. 조치를 취하라고 일러두지. 그런데 너는 쇼군의 행차 앞에서 고개를 들거나 소리를 치면 당장 목이 날아간다는 걸 몰랐느냐? 뭣 때문에 목숨을 건 것이냐?”
 
백성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대답했습니다. “몰랐습니다. 조선에서 백성들이 임금님의 행차를 가로막고 꽹과리를 울리면서 나서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인데 목을 자르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어쨌든 그 백성은 그 자리에서 죽지 않았고 그의 후손과 후손을 통해 이 이야기가 길이 전해 내려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이 나라에는 왕도 없고 절대 권력자도 없습니다. 그렇게 착각하는 사람들은 있었지요. ‘제왕적 대통령제’ 탓을 하는 사람도 있고요. 오랜 옛날부터 이 땅의 백성들은 최소한 자기 할 말은 하고 살았습니다. 그 유전자가 지난날 우리를 광장으로, 거리로 선뜻 나서게 했고 역사의 잘못된 흐름을 바로잡도록 정의를 소리 높여 외치게 했던 것이지요. 물론 추호의 외람됨도 없이. 이제 며칠 뒤면,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민주적인 ‘집단 격쟁’의 결과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석제 소설’은 성석제씨가 소설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실험적 칼럼으로 4주마다 연재됩니다.
 
 

성석제
소설가 

도민이 행복한 더 큰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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