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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치쑨은 도도히 흐르는 大河” 사후 9년 만에 명예 회복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27>
1 칭화대학은 예치쑨(오른쪽 셋째)의 영혼이나 다름없었다. 가족이 없던 예치쑨의 집은 당대 명교수들의 휴게실이었다. 1928년 봄 칭화대학 예치쑨 집 문전.

1 칭화대학은 예치쑨(오른쪽 셋째)의 영혼이나 다름없었다. 가족이 없던 예치쑨의 집은 당대 명교수들의 휴게실이었다. 1928년 봄 칭화대학 예치쑨 집 문전.

신중국 수립을 선포한 중공은 대학조정에 착수했다. 구미에 맞는 사람은 남겨 두고, 맘에 안 드는 교수들은 “책 편집이나 하라”며 출판사로 보냈다. 교육부는 예치쑨(葉企孫·엽기손)의 공헌과 영향력에 인색하지 않았다. 칭화대학 교무위원회 주석에 임명했다.

지식인들 사상개조운동에 냉소적
대학 책임자서 평교수로 전락
교육과 독서, 인재양성에만 몰두
국민당 특무 문제로 온갖 고초
원폭 유공자 대부분이 예치쑨 제자

 
예치쑨은 당이 요구하는 조정방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학문의 자유와 대학의 민주화, 교수치교(敎授治校)를 견지했다. 지식인들 대상으로 사상개조운동이 벌어졌을 때도 개조에 냉소적이었다. 상급기관이 대륙을 떠난 전 교장 메이이치(梅貽琦·매이기)를 적으로 규정했다. 메이이치 비판운동으로 학계가 떠들썩했다. 예치쑨은 메이이치를 두둔했다. “적과 동지도 구분 못 하는 사람”이라며 바보 취급받았다. 동료 과학자가 비판대에 올랐을 때도 거꾸로 가기는 마찬가지였다. 중국 과학계에 기여한 공을 높이 평가하는 글을 발표했다. 결과는 격렬한 질책과 혹독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교육부는 예치쑨을 베이징대학 물리학과로 전임시켰다. 예치쑨은 현실을 받아들였다. 조카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다. “전통을 자랑하는 대학의 책임자에서 평교수로 전락했다. 나는 이미 낙오자다. 사상이 다른 사람들의 지시에 맞장구쳐야 된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교육과 연구에 주력하려면 맹종하는 수밖에 없다.”
 
예치쑨은 교육과 독서, 인재 양성에만 몰두했다. 언쟁을 피하고 학술회의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전인대 대표에 선출됐지만, 정치 문제에는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다 보니, 문혁 초기만 해도 안정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홍위병들에게 끌려갔을 때도 다리 부러진 것 외에는 남들 보다 덜 얻어맞고 풀려났다.
 
베이징대학은 학교로 돌아온 예치쑨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국민당 특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며 심문을 계속했다. 제자가 구술을 남겼다. “반동학자의 소굴이었던 중앙연구원 총간사를 역임했고, 연구원 원장 주자화(朱家驊·주가화)는 국민당 특무조직 중통(中統·중앙조사통계국)의 책임자였다. 예치쑨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대학 측은 가택수색과 월급지불을 중지했다. 매달 소액의 생활비만 지급하고 거처도 학생 기숙사로 제한했다.  당시 베이징대학 인근에서 예치쑨을 봤다는 전 정치협상회의 부주석 첸창차오(錢昌照·전창조)도 기록을 남겼다. “출옥한 예치쑨은 행동의 자유가 없었다. 병들고 허약한 고독한 노인이었다. 거리에 나갔다가 봐서는 안 될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다. 굽은 허리에 초라한 복장, 해진 신발 신은 노인이 지팡이에 의지해 힘든 걸음을 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예치쑨 선생이었다. 말라 비틀어진 능금을 우물거리며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걸인과 다를 바 없었다. 젊은 학생이 지나가자 돈이 있으면 몇 푼만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물리학계의 대선배이며, 중국 물리학의 발전에 누구도 범접 못할 공을 세운 선생의 비극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모욕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학자들이 속출하던 때였다. 세월이 지나서야 안 사실이 있다. 예치쑨은 휘어질지언정 부러지지 않는, 강철 같은 사람이었다.”
 
2 학술회의에 참석해 첸쉐썬(錢學森)과 환담하는 우요쉰(吳有訓·왼쪽). 연도 미상. [사진 김명호 제공]

2 학술회의에 참석해 첸쉐썬(錢學森)과 환담하는 우요쉰(吳有訓·왼쪽). 연도 미상. [사진 김명호 제공]

4년간 예치쑨을 조사한 대학 측은 결론을 내렸다. “예치쑨이 특무였다는 소문은 낭설이다. 중통은 칭화대학에 침투한 적이 없다.” 예치쑨은 교수자격을 회복했다. 숙소도 배정 받았다. 문혁이 끝나자 칭화대학 시절 동료들이 찾아왔다. 허리가 굽어 침상에 눕지도 못하고, 의자에서 잠자는 예치쑨을 바라보며 분통을 터뜨렸다.
 
예치쑨의 건강은 하루가 달랐다. 전립선 비대증이 심각했다. 걷지도 못하고 소변도 가누지 못했다. 방안에 악취가 진동했다. 의사들이 수술을 권해도 막무가내였다. 치료도 거절했다. “내버려 둬라. 이제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다. 몇 년 더 살아 봤자 의미가 없다. 내게 관심 갖지 말고 문병도 오지 마라.” 1977년 1월 10일, 예치쑨은 혼수상태에 빠졌다. 친구들이 수레에 태워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측은 고약했다. 신분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며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다. 반나절을 기다리다 아는 의사 통해 뒷문으로, 그것도 몰래 들어가서 겨우 입원했다.
 
예치쑨은 입원 3일 만에 눈을 감았다. 당 선전부는 “평가가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도를 금지시켰다. 1주일 후, 초라한 추도회가 열렸다.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이 추도사를 읽었다. 중국 과학과 과학인재 양성에 거대한 공적을 남겼다는 언급이 없었다. 보다 못한 물리학자 우요쉰(吳有訓·오유훈)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 이런 억울한 일이 있느냐며 통곡을 해 댔다.
 
사망 9년 후, 예치쑨은 명예를 회복했다. 찬사가 쏟아졌다. 한 가지만 소개한다. “예치쑨은 도도히 흐르는 대하(大河)였다. 1925년 예치쑨이 과학인재 양성을 시작한 지 39년 만에 중국은 핵실험에 성공하고, 45년 만에 인공위성을 발사했다. 중국이 스스로 자신의 역사를 쓰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1999년 9월, 중국은 양탄일성(兩彈一星·원자폭탄, 수소폭탄, 인공위성) 공로자 23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거의가 예치쑨의 제자들이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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