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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토에서 온 몽환적 거인

스비아토슬라브 리흐테르의 이탈리아 투어 콘서트 실황 음반.

스비아토슬라브 리흐테르의 이탈리아 투어 콘서트 실황 음반.

 ‘동토의 제국’ 소련에서 온 피아니스트는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다. 남유럽의 따가운 햇살도, 자신을 쫓는 카메라도 익숙하지 않은 듯하다. 긴 연주여행으로 고단한 기색이 드러나기도 한다. 작은 돛단배 한 척이 졸고 있는 저 바다는 어디일까. 베네치아 앞에 열려 있는 아드리아 해일까, 아니면 시칠리아 팔레르모의 지중해일까. 앨범을 꺼낼 때마다 사진을 바라보게 된다.  
 

an die Musik : 이탈리아의 리흐테르

음반 ‘리흐테르 인 이탤리(Richter in Italy)’는 슬라바(스비아토슬라브 리흐테르·1915~1997)의 1962년 이탈리아 투어 콘서트를 녹음한 것이다. 그는 7주 동안 로마를 비롯해 북쪽의 베네치아에서 남쪽 시칠리아 섬의 팔레르모까지 여행했다.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는 만만해 보이지만 실제로 다녀보면 가도 가도 끝이 없이 길다. 슬라바는 서양문명의 본산을 두루 구경했겠지만 상당한 강행군을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소련 음악가들이 서방 연주여행을 떠나게 된 것은 1953년 스탈린이 죽고 난 뒤부터다. 흐루쇼프는 ‘철의 장막’ 안에 괴물이 아니라 최고의 예술가들이 산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55년 이후 오이스트라흐, 길렐스, 로스트로포비치 같은 소련의 대표 음악가들이 미국에 문화사절로 파견돼 놀라운 연주로 미국인들을 경악케 했다. 피아니스트 에밀 길렐스는 그러나 열광하는 미국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소련에는 리흐테르라는 피아니스트가 있다. 그의 연주를 들을 때까지 기다려 달라.”  
 
그런데 슬라바는 동료들이 서방으로 진출한 뒤에도 당국에 의해 발이 묶여 있었다. 독일계였던 아버지가 나치의 소련 침공 직후 비밀경찰에 체포돼 총살당했기 때문이다. 슬라바는 적국 독일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머지않아 그를 풀어주었다. 60년 슬라바는 대서양을 건너 뉴욕에 도착해 길렐스의 겸양을 증명했다. 그의 카네기홀 연속 연주회는 아직도 전설로 남아 있다.  
 
소련 연주가들이 서방 여행에서 자유를 누렸던 것은 아니다. 슬라바가 샤를 뮌시의 보스턴심포니와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1번 리허설을 마치고 반주가 너무나 훌륭해 지휘자의 손에 입을 맞췄는데, 감시인은 “소비에트 예술가가 외국인에게 고개를 숙인다”며 노발대발했다. 슬라바는 회고록에서 이들을 ‘수호천사’라고 불렀다(브뤼노 몽생종, 『리흐테르』).
 
흔히 오이스트라흐가 58년 앙드레 클뤼탕스 지휘로 녹음한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을 동곡 최고로 친다. 므라빈스키와 레닌필이 60년 런던과 빈에서 녹음한 차이콥스키 4·5·6번 교향곡도 아직 베스트셀러다. 그러나 이 음반의 연주가 어떻다느니, 초반 LP 가격이 엄청나다느니 떠들기 전에, 그 시절 소련 음악가들의 처지부터 돌아봐야 한다. 므라빈스키도 감시인의 ‘수행’을 받아야 했고, 레닌필 단원들은 런던 시민이 말을 걸면 긴장된 얼굴로 입을 닫았다.  
 
오이스트라흐는 절친했던 미국 바이올리니스트 메뉴힌이 망명을 권하자 이렇게 말했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것은 조국일세.” 스탈린 시대에 이웃들이 심야에 하나하나 사라져 돌아오지 않는 공포를 겪고도 항상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던 오이스트라흐는 정말 조국을 사랑했을까.  
 
슬라바는 수호천사들을 달고 서방 연주여행을 계속했다. 61년 영국에 데뷔했고, 이어서 유럽 국가들을 정복해 나갔다. 이탈리아 순회연주는 유럽의 대표 음반사인 영국 EMI와 독일의 DG(도이치 그라모폰)가 나눠서 녹음했다.    
 
EMI의 ‘Richter in Italy’는 슈만의 곡만 모은 것이다. 슈만은 나에게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었으나 이 음반의 ‘나비’(Papillons)는 단박에 그를 매혹적인 작곡가로 만들었다. 12곡의 짧은 피아노곡이 쉼 없이 이어지는 ‘나비’는 머리에 스파크를 일으킨다. 슬라바는 이 독특한 작품을 몽환적으로 연주한다. DG에는 ‘Svjatoslav Richter: Recital’이라는 타이틀로 음반을 남겼다. 모든 연주가 탁월하지만 드뷔시의 ‘판화’(Estampes)가 역시 몽환적이다. ‘그라나다의 황혼’ ‘비 내리는 정원’이 추상적 수채화다.  
 
슬라바의 이탈리아 실황을 듣는 즐거움은 청중의 반응에도 있다. ‘판화’는 마지막 음표의 여운을 낚아채며 소나기 같은 박수가 쏟아진다. 스크랴빈의 피아노 소나타 5번은 끝 악장 프레스티시모가 숨 가쁘게 절정을 향해 치달으면 마지막 음표 몇 개를 같이 연주하듯 박수가 터진다. 성미 급하지만 음악도 잘 아는 이탈리아 청중은 슬라바의 연주를 빨아들이듯 즐긴다.  
 
사진을 다시 바라본다. 해변의 슬라바는 47세다. 그는 자신이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라는 평가를 받게 될 줄 알았을까. 혹시 또 해변까지 수호천사들이 따라 나왔을까. 볼수록 묻고 싶은 게 많아진다. ●
 
 
글  최정동 기자 choi.jeongd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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